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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15화 (315/649)

〈 315화 〉 5. 빵과 비수(13)

* * *

아비앙은 옅은 신음을 흘리며 기절해 있었다.

널브러진 장소는 엠마의 공방 한 켠에 마련된 소파 위였다. 노끈으로 손목과 발목마저 구속당한 여인의 모습은 묘한 동정심을 일으켰다.

고작해야 갓 성인이나 되었을까 싶은 소녀였다.

모르는 이가 보면 나를 당장 위병에 신고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굳이 가녀린 계집아이의 손발을 꽁꽁 묶어둔 꼴이라니.

물론 내게도 할 말은 있었다.

우선 저 여인은 인간이 아니라 엘프였다.

인류의 적이자, 아카데미로 침투한 첩자라는 뜻이었다. 위병이 잡아가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저 여자였다.

더불어 그녀는 숙련된 전투요원이기도 했다.

만일 내가 상대였다면 구속까지는 필요 없었다.

어차피 무슨 짓을 해도 엘프가 내 멱을 따기는 힘들었다. 여태껏 증명됐다시피 실력 차도 명확했을뿐더러, 엘프의 주력 분야는 마법으로 보였던 탓이었다.

마법사가 지근거리에서 검사를 상대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다만 지금 엘프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이는 내가 아니라 엠마였다.

아무리 안전장치를 확보해도 모자랐다.

심지가 곧고 상냥한 엠마였다. 사기를 친 엘프에게 동정심을 품더라도 의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찰나의 방심은 치명적인 실책을 낳는 법이었다.

엠마가 비전투인원인 이상, 나는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엘프를 주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눈을 뜬 엘프가 엠마를 습격하는 미래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엘프도 곱게 죽지는 못할 테지만 말이다.

나는 다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엠마의 낯빛을 살폈다.

식은땀으로 손이 흥건한 나와는 달리, 엘프를 내려다보는 엠마의 눈빛은 진중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턱을 괸 채 한참이나 고심에 잠겨 있었다.

연구자만이 지닐 수 있는 눈이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엠마 또한 아카데미 연금학부의 일원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이제야 실감했다.

엠마의 입술이 달싹인 것은 그때였다.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해… 본래 안정되어 있어야 할 장기들도 예민해져 있고. 상당한 통증이 수반될 텐데, 인체 개조의 흔적 같아.”

심각한 어조로 내뱉은 말이었다.

신중한 성격의 엠마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엘프의 육체는 누군가에 의해 개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비정상적인 재생 능력은 그로부터 기인하고 있으리라.

나는 ‘인체 개조’라는 말을 듣자마자 불현듯 누군가를 떠올리고 말았다.

내 여동생의 모습을 하고, 광소를 터트리던 여인.

그리고 시체 거인의 핵을 이루고 있던 지저분한 꼬마애.

미트람.

암흑사제이자, 생체 개조의 권위자.

한때 내 숙적이었던 그녀가 자연스레 내 뇌리를 스쳤다.

내 입에서 반사적인 질문이 새어나왔다.

“……누가 개조했는지는 알 수 없지?”

“지금으로서는 그래. 워낙 꼬아놔서 원리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하나…….”

그와 동시에 엠마의 손에 은은한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가녀린 손이 엘프의 명치 부근부터 시작해서, 가슴 어림을 지나 목젖을 훑듯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엘프의 몸이 덜컥거리며 거친 반응을 보였다.

엘프의 목젖 부근에서 한참을 끙끙거리던 엠마는, 이내 온힘을 다해 손을 엘프의 입쪽으로 쳐올렸다.

그러자 엘프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괴이한 비명 소리.

끼에에에에에에에엑­!

엘프의 턱 관절이 열리고, 그 안에서 얼핏 흉측한 생김새의 살덩어리가 비쳤다.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그 직후 살덩어리는 다시금 모습을 감추었다.

내 시야에 어딘가 익숙한 잔흔을 남기면서.

나는 곧장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엠마는 그 끔찍한 광경에도 딱히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하기야 예전부터 연금술만 관련되면 한없이 진지해지는 그녀였다.

평소에도 온갖 징그러운 재료를 다루는데, 엘프 몸에 기생하는 살덩어리를 보았다고 겁을 집어먹을 이유가 없었다.

단지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선언할 뿐이었다.

“……저게 바로 마력의 핵이야. 육체랑 너무 깊숙이 융합되어 있어서, 당장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해.”

그 말을 듣고 나는 비로소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저따위 악취미적인 개조를 하는 곳은 온 대륙을 통틀어도 하나밖에 없었다.

“암흑교단…….”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암흑교단은 북부의 엘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니, 관계를 맺는 것을 넘어 엘프를 통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일일이 인체 개조까지 해줄 이유가 없을 테니까.

내 한숨 소리를 들으며, 엠마는 걱정스러운 낯빛을 했다.

나를 말없이 응시하는 그 눈동자에 걱정이 듬뿍 배여 있었다. 그녀가 자꾸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기에, 나는 일부러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엠마. 내가 알아서 할게.”

본래라면 그것으로 끝났어야 할 이야기였다.

엠마는 내가 살아가는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다.

내 길은 이미 피와 시체로 얼룩진 지 오래였다. 그 춥고 어두운 길에 나는 엠마를 동행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지키고 싶었으니까.

허나 오늘의 엠마는 조금 달라 보였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언뜻 내게 물었다.

“또 떠나는 거야……?”

“아마도, 그래도 걱정하지 마… 금방 돌아올게.”

엠마가 조금이라도 안심하길 바라는 마음에 던진 위로였다.

그럼에도 고개를 숙인 엠마는 말이 없었다. 음영이 드리운 그녀의 얼굴을 보니 내 마음도 좋지 않았다.

나는 한 걸음 엠마에게 다가섰다.

힘없이 선 그녀는 살짝만 당겨도 내 품에 폭 안길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무심코 손을 내뻗었다가, 그만두었다.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

기나긴 한숨을 내뱉으며, 나는 등을 돌렸다.

엘프야 다시 자루에 담으면 그만일 터였다.

슬슬 네리스 선배를 찾아가 봐야 할 시점이었다.

나 혼자서는 수집할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었다.

만일 엠마가 자그맣게 중얼거리지만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그 자리를 뜰 예정이었다.

“……나, 들었어. 너 죽을 뻔했다고.”

내 걸음이 우뚝 멎는 순간이었다.

내 곤혹스러운 눈빛이 엠마를 향했다. 그러든 말든 엠마는 우울한 어조로 고백을 이어갈 뿐이었다.

“내가 만든 물약이잖아? 부작용도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성녀님한테 연락 받았어. 처음에는 숨겼지만… 나도 그 정도는 들을 자격이 있을 것 같아서.”

그 ‘자격’이라는 낱말이 왜 이리 가슴에 걸렸을까.

아니, 사실 내심은 알고 있었다.

나는 엠마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특별 취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시점에 따라 차별처럼 느껴질 여지도 존재했다.

우대와 무시는 동전의 양면이다.

어느 한 쪽만으로는 성립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머리가 새하얘지더라. 그 다음에는 숨이 턱턱 막히고… 정신을 차렸는데, 눈물을 흘리는 줄도 모르고 엉엉 울고 있더라고. 한참 동안이나, 으응. 아니, 몇날며칠을…….”

“……엠마.”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엠마는 특유의 밝고 씩씩한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단지 쓸쓸한 낯빛을 한 채 내게 단언했을 뿐이었다.

“이안, 나는 네가 무서워.”

쿡, 하고 내 심장을 파고드는 한 마디였다.

“네가 죽을까 봐 무섭고, 네가 없는 세상이 무서워… 너를 알기 전까지는 이러지 않았는데, 참 이상하지?”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 흐느낌이 섞여들고 있었다.

어느덧 엠마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는 흐릿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나는 무어라 위로를 건네고 싶었으나,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제일 무섭고 힘든 건, 네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거야.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데, 나는 물약밖에 만들 줄 모르는 평민 계집애니까…….”

“……엠마.”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는 바는 없었다. 다만 본능적으로 엠마의 자기비하를 멈추고 싶다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내 손이 조심스레 엠마의 손을 움켜쥐었다.

“나는 이미 너한테 몇 번이고 목숨을 빚졌어. 왜 그렇게만 생각해, 너는 내게 충분히…….”

“……알고 있어.”

울먹이는 목소리를 억지로 가라앉히며, 엠마는 다급히 제 눈가를 소매로 훔쳐냈다.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어… 고마워.”

알고는 있었을 터였다.

엠마는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비상했다. 언제나 남의 심기를 거스르는 법이 없었고, 배려심이 넘쳐 제 주장을 앞세우지도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납득하지도 못했는데, 엠마는 내가 곤란할까 싶어 얼른 제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나는 그 점이 못내 가슴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북부에는 암흑교단이 도사리고 있었다. 심지어 엘프들과 연수까지 했다면 그 위험도는 더욱 높다고 가정해야 했다.

그토록 위험한 곳에 엠마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한랭건조한 북부의 기후도 마음에 걸렸고, 제국의 5대 명문으로 오롯한 유르디나 가문의 자존심도 신경 쓰였다.

평민은커녕 하급귀족조차 제대로 우대받지 못할지도 몰랐다.

제 신분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는 엠마와 동행해 봐야 좋은 꼴은 보지 못하리라.

그 수많은 이유들이 부유했다.

단 하나만 들어도 엠마를 데려가지 말아야 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나는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엠마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살짝 눈물 맺힌 눈으로, 엠마가 애처로운 미소를 지은 것은.

“나, 또 기다릴게… 잘 다녀와야 해?”

그 처량한 표정을 마주한 순간.

“……가자.”

머리가 새하얘져서, 내가 내뱉은 말은 그랬다.

도리어 얼떨떨한 눈빛을 한 쪽은 엠마였다.

얌전히 나를 보내주려던 그녀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으, 응?”

“함께 가자, 엠마. 너만큼은 내가 어떻게든 지킬 테니까…….”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면서도, 나는 이것이 옳은 일인지 갈등이 일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내 답은 동일할 터였다. 적어도 엠마의 그 물기 어린 미소를 마주할 때부터, 나는 함정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론은 이미 내려졌다. 남은 것은 이를 실현할 각오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단단히 마음을 다져야 했다.

좋아, 해보자.

엠마가 그렇게 원하니까.

정작 엠마는 영문을 몰라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북부로 향하는 길에 새로운 동행인이 추가되었다.

*

엘프가 의식을 되찾은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후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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