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6화 〉 5. 빵과 비수(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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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앙은 갓 100살이 넘은 어린 엘프였다.
이를 인간에게 들려주었다면 대개는 코웃음을 치고 넘어갈지도 몰랐다. 대개의 단명종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보다 짧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엘프는 달랐다.
태생부터 질서의 세계수에게 축복을 받은 존재들이었다.
활쏘기와 정령술에 특히 재능을 보이며, 죽기 직전까지 노화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영원한 젊음과 건강을 누리는 엘프들의 평균 수명은 500세에 달했다.
그러니 아비앙은 스스로를 ‘어린 엘프’라 칭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말마따나 엘프들의 사회에서 100살은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를 나이이기도 했으니까.
비록 세작 노릇을 하느라 성인식을 제대로 치르지는 못했으나, 아비앙은 성인이 된 만큼 더욱 성실히 엘프의 번영을 위해 일할 것을 맹세했다.
아비앙의 임무는 그만큼이나 막대했다.
인간들 틈새에 뒤섞여, 동족들에게 필요한 자원을 조달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이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북부를 벗어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이도 소수에 불과했다.
변신 마법에 대한 특이한 재능이 없었다면, 아비앙 또한 세작으로 선발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터였다.
어린 나이의 엘프는 대개 미숙하고 나약해서 첩자로 선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 오랜 관습을 깨고 첩자가 된 아비앙은 마을의 원로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인류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들뿐이었다.
한때는 엘프들이 인류를 발아래에 둔 적이 있다고 했다.
태곳적 인류는 보잘 것 없는 종족에 불과했다. 그 힘은 온갖 축복을 타고나는 엘프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비앙은 진심으로 그 시절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인간들은 대부분이 욕심쟁이에 사고방식도 괴상했다. 아직도 아비앙은 그날 마을을 덮쳤던 인류의 군세를 떠올릴 때마다 치가 떨렸다.
그리고 그날 마을로 흘러들어온 인간 하나까지도.
하나같이 이상하거나 폭력적인 이들뿐이었다. 밤마다 아비앙은 제 살갗에 닿는 날붙이의 감촉을 떠올리며 몸을 떨곤 했다.
그처럼 악한 존재들은 지배가 필요했다. 선량한 엘프들이 그들을 계도하고 지도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 사실 아비앙은 두려웠다.
인간을 내심 깔보고 무시했지만, 그것은 공포의 발로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비앙은 두려움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인류는 살아있는 전염병과 같았다.
그들은 지나간 자리를 황폐화시키고 오염시켰다. 이는엘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엘프들은 점점 더 미쳐가고 있었다.
이 또한 전부 인간들 탓이었다.
마을의 어른들이 미쳐가고 있는 것도, 아비앙의 육체에 저주받은 씨앗이 심어진 것도, 세상이 엉망진창인 것도 전부 다.
아비앙이 제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사기를 친 것도 그 탓이었다.
엘프들의 광증이 심해질수록 고향에서 공급받는 상품의 수는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비앙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동족들이 너무나 많았다.
매달 정해진 금액을 납입하지 못하면 그들은 굶어죽어야만 했다.
고귀한 엘프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으나, 굶주린 배는 때때로 뇌보다 먼저 사고하는 법이었다.
결국 아비앙은 동족 대신 제 자존심을 팔기로 했다.
그래봐야 상품에 가짜를 일할씩 섞는 정도에 불과한 사기였다. 그 어설픈 수작질에도 대개의 고객들은 깜빡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수년 간 장사를 하며 쌓아온 신뢰관계가 있었던 덕이었다.
아비앙은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비록 난생 처음 짓는 죄인지라 조바심이 일기는 했다.
아무리 소심한 행각이라 하더라도 사기는 사기였다.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위병소에 끌려가는 상상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다 엘프라는 사실이 탄로나기라도 한다면?
끔찍했다. 아비앙이 그와 비슷한 악몽을 꾸다가 끙끙거리며 눈을 뜬 적만 수십이었다.
하지만 몇날며칠이 지나도 아비앙을 붙잡으러 오는 이는 없었다.
몇몇 손님들이 찾아오긴 했으나, 고양이로 변신한 아비앙의 기척을 눈치 채는 이는 없었다. 아비앙으로서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아비앙은 생각했다.
이대로 고향에서 제대로 된 재료가 올 때까지만 버티자.
그때 실수를 고백하고 마땅한 대가를 치르면 될 일이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손님들은 아비앙을 용서해 주리라.
그렇게 안이한 계산을 마치며, 슬슬한가로운 일상으로 복귀할 무렵이었다.
사내 하나가 아비앙을 찾아왔다.
그 이후는 피와 살점이 튀는 광경의 연속이었다.
사내에게 안면을 연속으로 강타당하며 아비앙은 생각했다.
아, 그래.
인간은 역시나 무섭구나.
대화를 거부한 쪽은 아비앙이었다.
그리고 먼저 폭력을 휘두른 쪽도 그녀였으나, 사내의 무자비한 폭력에는 기가 질릴 대로 질릴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사내는 아비앙의 본모습을 보고도 머뭇거리는 기색조차 없었다.
망설임 없이 관자놀이를 걷어차이고, 정신을 잃은 지 수 시간.
아비앙은 그 악독한 사내를 떠올리며 눈을 떴다.
헐떡이는 숨결이 그녀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대변하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가 파르르 경련하며 주위를 훑었다.
암실(??)이었다.
빛 한 줄기 새어 들어오지 않는 방 안에서 광원은 등불 하나가 유일했다. 그 불 그림자를 등지고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달랐다.
사내 하나가 아비앙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아비앙은 온몸이 구속된 채로 의자에 묶여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해방은 힘들어 보였다. 설령 전력을 다하더라도 이 노끈을 풀어낼 수는 없을 듯했다.
처음에는 당황했던 아비앙이었다.
그러나 점차 기억이 되돌아올수록, 눈앞의 사내가 누구인지도 자연스레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비앙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그 무시무시한 인간.
금빛 눈동자가 서늘했다. 아비앙은 당장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사내의 옆에는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시립해 있었다.
공손한 자세로 선 그녀는 사내의 부하로 보였다. 아비앙을 힐끔 바라보는 그 짙은 녹색의 동공이 요사스러웠다.
뱀에 가까운 여인이다.
아비앙은 본능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공포를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고귀한 엘프가 인간 따위에게 겁을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끅끅 차오르는 울음소리는 참을 수 없어서, 아비앙은 비명을 내질렀다.
“너, 너! 내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우선 확실히 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렇게 내뱉어진 사내의 목소리는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담백한 진실만을 읊고 있다는 투였다.
아비앙이 잠시 멈칫한 사이, 그는 느긋한 어조를 이어갔다.
“나는 너와 대화를 나누려 했어. 그런데 거부한 건 네 쪽이고… 그러니까 다소 무례한 짓을 저질러도 이해해 주길 바랄게.”
‘대화’라니?
아비앙은 너무나 뜻밖의 단어를 들은 탓인지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그토록 대화를 외치던 아비앙의 동족들을 학살한 이들이 누구란 말인가.
따뜻하고 풍요롭던 대수림에서 엘프들을 쫓아내, 차갑고 시린 북부의 벌판으로 내몬 이들은 또 누구고.
바로 인류였다.
그조차 모자라 아비앙의 고향 사람들까지 타락시킨 이들이 아닌가.
아비앙은 곧장 증오로 머리가 뜨거워져 외쳤다.
“대화?! 내가 왜 너희 인간 놈들이랑 대화를… 커억!”
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혈기는 화를 부르는 법이었다.
콱, 하고 사내의 발길질이 서슴없이 아비앙의 명치를 파고들었다.
아비앙은 숨이 턱 막히는 격통에 말조차 끝맺지 못했다. 단지 의자째로 나동그라져 컥컥거리는 신음을 토해낼 뿐이었다.
가슴이라도 두드리고 싶은데, 묶여 있어서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아비앙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으나, 사내는 조금의 연민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지막이 옆에 시립해 있던 여인을 호명할 따름이었다.
“……네리스.”
“네.”
여인은 군말 없이 아비앙이 묶인 의자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순종적인 하녀라도 되는 태도였다.
아비앙은 불신을 담아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 부릅떠진 눈에는 경악이 맺혀 있었다. 아비앙의 인생에 이러한 취급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야 첩자 교육을 받으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기는 했다.
그러나 상상과 현실은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있었다. 더불어 모든 것이 부족한 엘프들에게는 제대로 된 첩자를 교육할 여유조차 부족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아비앙이었다.
파직거리면서 소녀의 뇌리에 균열이 이는 듯했다. 자존심과 명예욕으로 억지로 기워 붙인 정신이 무너지기 직전의 징조였다.
엘프는 삶에 대한 욕구가 여타의 생물보다도 강했다.
자고로 본능을 영원히 억누를 수는 없었다.
사내는 차가운 음색으로 경고했다.
“말했잖아, 대화를 거부한 쪽은 너라고… 그리고 다음부터는 발길질로 끝나지 않아.”
그리고 팍, 하고 의자의 팔걸이에 틀어박히는 도끼날.
언제 꺼냈는지도 모를 속도였다.
아비앙은 그 짤막한 실력 과시에 그만 기가 질리고 말았다.
예전부터 깨달아야 했지만, 다시금 실감했다.
저 사내는 강하다.
아비앙 따위는 상대조차 되지 않을 터였다. 살아온 세월로 따지면 아비앙의 반의 반도 살지 않았을 텐데!
종자부터가 달랐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비앙은 저 사내에게 패배한 것이다.
그 지독한 열패감과 공포감에 젖어, 아비앙은 히끅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엘프 소녀의 허세가 점차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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