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17화 (317/649)

〈 317화 〉 5. 빵과 비수(15)

* * *

아비앙이 눈물을 터트려도 사내는 평온해 보이기만 했다.

그는 그저 우묵한 눈빛으로 울먹이는 엘프 소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사내의 입이 열린 것은, 얼마쯤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앞으로 한 번 저항할 때마다,네 몸에 재미있는 흔적이 새겨질 거야…물론 당장 동족의 비밀을 털어놓으라니,고민이 되겠지.”

그러면서 사내는 슬쩍 밀실의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이 어두컴컴한 곳에서도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되는 듯했다. 그 짤막한눈짓마저 사내와 아비앙 사이에 있는 현걱한 격차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벽면의 어디쯤을 응시하고 있다가,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동족을 배신하라고는 하지 않아.다만 네 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지,잠시 나가 있을 테니 천천히 생각하고 있어.”

그 말이 끝이었다.

이후 사내는 눈길 한 번조차 주지 않은 채 암실을 떠나갔다.

여유만만한 태도였다.

그 뒷모습이 마치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아비앙은 숨을 죽였다.

사내는 아비앙에게 굳이 많은 시간을 투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방치할 리가 없었다.

아비앙의 가치는 고작 그 정도인 것이다.

언제든 다시 구할 수 있는,대체 가능한 엘프 세작.

그리고 쓸모조차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그 말로는 뻔했다.

지금껏 저 사내의 잔혹한 성미를 직접 체험하지 않았는가.

어둠 속에 갇힌 소녀는 온갖 불길한 상상에 물어뜯기고 있었다. 고독과 외로움이 이토록 무서운 적이 되리라고는 아비앙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당혹감도 한몫했다.

벌써 상황은 수 시간 동안 진행되고 있었으나,정작 그중에서도 아비앙이 의식을 가지고 있던 시간은 극히 짧았다.

눈을 감았다 들 때마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는 셈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무서웠다.

무자비한 폭력은 불타는 증오를 꺾어 버렸고,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초조한 마음뿐.

설상가상으로 아비앙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너 말이야,얼른 불고 끝내면 안 될까?”

조롱인지 설득인지 모를 말이었다.

아비앙은 제 목덜미를 핥는 숨결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흐릿한 푸른 눈동자가 측면을 향했다.

그곳에는 아비앙의 등 뒤에서,얼굴을 내밀고 속삭이는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잡티 하나 없이 예쁜 피부,앞머리에 애교스러운 차이점을 주는 머리핀.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인상이었으나,그 눈빛과 목소리는 지독히도 염세적이었다.

‘네리스’였던가.

사내는 분명 여인을 그렇게 불렀다.

“나,오늘 비번인데 불려왔거든.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 줄 알아?그러니까 얼른 끝내고 가자,응?내 마음에 아직 일말의 자비가 남아있을 때.”

“……허,헛소리!”

아비앙의 외침은 발작적이었다.

가슴 속에서 한 줌 남은 저항심이 맹렬히 불타고 있었다.본래 인간이든 엘프든 완전히 꺾이기 전이 가장 격렬한 법이었다.

네리스는 흐응,하고 묘한 소리를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어서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

“나,나는 자긍심 높은 엘프야!너희 인간종 따위에게 자그마한 정보라도 넘겨줄 리가……!”

“……푸흡.”

허나 아비앙의 마지막 발악은,이내 네리스의 웃음소리로 틀어 막히고 말았다.

네리스는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웃음을 참으려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하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었는지,네리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홍소를 터트렸다.

“푸흐,아하…아하하하하하하!자,자긍심?!”

“……무,뭐야.”

그 처참할 정도의 조소에 아비앙은 더욱 당황한 낯빛을 했다.그러든 말든 네리스는 의자 등받이를 탁탁 내리치며 계속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그,그딴 말을 했던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 줄 알아?푸흐,아하하핫!나,나는 안 그랬을까?응?”

그 진심이 담긴 반문에 아비앙의 낯빛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녀의 뇌리 속에 방금 전 보았던 장면이 재생되었다.아무런 반론조차 없이 사내의 지시를 곧장 이행하던 네리스의 모습이.

일말의 의심조차 없는 행동이었다.

누가 보아도 네리스는 사내에게 순종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한때는 아비앙처럼 굴었다고?

네리스의 돌발행동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더니,허공에 흑색의 궤적을 그렸다.

그 날카로운 파공성에 아비앙은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하지만 그 행동이 불러온 결과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촤르르,하고 아비앙을 구속하고 있던 끈들이 흘러내렸다.

난데없이 자유의 몸이 된 아비앙은 얼이 빠져 네리스를 바라보았다.

네리스는 입꼬리를 비틀며 가학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그렇게 자신만만하면 가 봐…대신 붙잡히면 상상 이상의 경험을 하게 될 거야.”

살갑게 아비앙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며,또 다시 이어지는 속삭임.

“색다른 느낌일걸?다시 태어나는 감각일 거야…손끝부터 하나씩 저며지면서,아니.불에 탈지도 몰라.나는 그랬거든.그리고 마침 나는 독을 다룰 줄 알아서…….”

빙글,하고 네리스가 들고 있던 단검이 허공에서 회전했다.그리고 탁,하고 이를 다시 잡아채는 절묘한 손놀림이 이어졌다.

그 직전까지 아비앙의 어깨에 손을 얹어두고 있었던 터라,그 모든 과정은 아비앙의 바로 옆에서 이루어졌다.

뺨에 옅은 생채기를 남기며.

흐릿한 작열감이 그 주위로 퍼져 나갔다.단순한 통증은 아니었다.

독이다.

아비앙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너는,몇 배로 더 아플 거야.어디 한 번 실컷 반항해 봐?우리 이안 님한테 말이야…….”

그러자 아비앙의 뇌리에는 천둥이 쳤다.

그 조소와 협박도 두려웠지만,그 무엇보다 그 이름이 제일 충격이 컸다.

“……이,이안 님?”

“그래,이안 님…어머,몰랐구나.불쌍해라.”

생글거리는 웃음과 함께,네리스는 확인사살을 했다.

“널 이곳으로 데려온 분이 바로 이안 페르쿠스 님이셔.이름은 들어봤지?”

이름은 들어봤냐고?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자금 조달이 주목적이라고는 하나,아비앙은 세작이었다.기본적으로 대중이 떠드는 소문과 소식에 민감했다.

그중에서도‘이안 페르쿠스’에 대한 풍문은 그야말로 최절정이었다.

유르디나의 후계자를 누르고 수렵제의 우승자가 되었다.

그 도중에 이름을 받을 마수를 잡았고,이후에는 마인과 신화 속의 괴물을 토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귀향제에서는 암흑사제와 맞섰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악신의 권속과 대적했다던가?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소리들뿐이었다.

아비앙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인류의 떠오르는 신성이며,신화 속의 괴물과 대적하는 진정한 영웅인 것이다.

고양이처럼 인간들 틈새에 몸을 숨기는 그녀가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이안 페르쿠스 같은 인간에게 아비앙은 말 그대로 길고양이 정도의 존재겠지.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고,놓치면 조금 성가실 뿐인.

아비앙은 더듬거리면서,멍하니 중얼거렸다.

“어,어떻게……?”

고작해야 딱 한 번 사기를 쳤을 뿐이었다.

그100년이라는 유구한 세월 동안 아비앙이 남을 속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그런데 하필 그 관련자 중 하나가 인류의 초신성이고,그에게 정체를 들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영문 모를 곳으로 끌려와 고문을 당할 가능성은?

그 운명적인 악연에 아비앙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그녀의 뺨을 타고 한 줄기의 눈물이 또르륵 굴러 떨어졌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아비앙의 귓가를 간질였다.

마치 유혹하듯이,네리스는 아비앙을 충동질했다.

“자,얼른 가 봐.말했잖아,나는 막지 않아…아직까지는 일말의 자비가 남아있거든.아,아니면 이제 없어져서 이러는 건가?”

아비앙의 몸이 처량하게 떨렸다.

이제 결단을 내릴 시간이었다.

**

내가 다시 취조실로 들어가자,그곳에는 의외의 풍경이 연출되어 있었다.

“제,제 빈약한 몸뚱아리라도…흐윽,도,도움이 되신다면 부디…대,대신 동족들을 배신하는 일만큼은……!”

무릎을 꿇은 채,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하는 엘프 소녀가 하나.

그리고 시치미를 뚝 떼고,공손히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는 네리스 선배가 하나.

나는 황당한 심정이 되어 묻는 수밖에 없었다.

“……얘 왜 이래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네리스 선배는 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쩌면,이안 님의 위명에 감복했는지도요.”

나는 흐음,하고 침음을 삼켰다.

조금 의문이 들기는 했다.너무나 급작스러운 태세 전환이었으니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심문이 편해졌으니 됐다 싶었다.

나는 제자리에 착석하며 말했다.

“일단,네 몸뚱아리에 흥미 없으니까 몸부터 일으켜라.”

내가 아비앙의 몸에 가진 흥미는 학술적인 것에 불과했다.

꼬맹이가 빈약한 몸 운운할 만큼 내가 여자가 고픈 사람은 아니었다.

나를 몸으로 꼬시려면 최소한 성녀쯤은 되어야 했다.

아니라면,리아라든가?

나는 헛된 생각을 하며 흐,하고 되다 만 웃음을 머금었다.

본격적인 심문 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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