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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18화 (318/649)

〈 318화 〉 5. 빵과 비수(16)

* * *

심문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약속대로 나는 아비앙에게 엘프의 핵심 기밀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엘프 정착촌의 위치라든가, 병력의 수 따위도 마찬가지였다.

내 질문은 언제나 담백했다.

단지 아비앙이 신체개조 수술을 받을 때까지의 전말을 물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아비앙에게는 망설이는 기색이 남아있었다.

어리기는 해도 엘프들 사이에서 세작으로 뽑힌 그녀였다.

아무리 엘프들에게 여유가 없더라도 기초적인 교육은 끝마쳤을 터였다. 배신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리는 없으니, 동족애는 특히 강하다고 봐야겠지.

그러니 아비앙으로서는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사소하다고 여긴 정보조차 언제 치명적인 무기로 돌변할지 몰랐다. 그것이 엘프들이 지난 세월 동안 겪어 온 인류의 저력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코 선을 넘지 않았다.

내 물음은 어디까지나 아비앙의 재생 능력을 겨눌 뿐이었다. 그 외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물론 한시적인 유예에 불과했다.

언젠가는 엘프들의 내밀한 사정까지 필요한 날이 올지도 몰랐다. 엘프는 제국의 적이었고, 나는 제국의 일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자제하는 편이 옳았다.

중요한 것은 점차 심리적 저항선을 무너트려 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른바 ‘끓는 물의 개구리’ 작전이었다.

이 정도야, 하면서 하나둘씩 정보를 털어놓기 시작하면 그보다 중요한 정보를 털어놓기도 쉬워진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요원이라면 몰라, 상대는 고작해야 갓 성인이 된 꼬맹이였다.

어벙한 티를 벗지 못한 꼴을 보니 이 전략도 유효할 듯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의외의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아비앙이 자의로 신체개조 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도리어 그녀는 그 시술에 혐오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조화와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다운 사고방식이었다.

암흑교단의 주술은 대개 순리를 비튼다. 이는 신체개조 수술도 예외는 아니었던 듯했다.

아비앙은 성토하듯이 내게 말했다.

“사, 사교에요!”

“……사교?”

느닷없이 등장한 단어였다.

나는 무심코 반문을 돌려주고 말았다.

암흑교단도 일단 ‘사교’라고 불릴 만은 했다. 하지만 정작 아비앙은 암흑교단에 대해 딱히 아는 바가 없어 보였다.

‘암흑교단’이라는 명확한 지칭보다 ‘사교’라고 표현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비앙은 ‘사교’와 ‘암흑교단’을 연결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암흑교단은 무려 수천 년 동안이나 잠행을 이어왔다.

그들의 악행은 이제 신화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암흑교단이 구체적으로 무슨 짓을 저지르고, 또 어떤 수단을 동원하는지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오히려 예외적인 쪽은 나였다.

나는 지금껏 암흑교단과 몇 차례 마찰을 빚어왔고, 그 덕에 그들의 수법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비앙의 몸에 심어진 흉측한 살덩어리를 보자마자 확신한 것이다.

북부에도 암흑교단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으리라고.

이는 이성이 아닌 직관의 영역이었다.

나와 내 동료들이 아닌 이상에야, ‘암흑교단’이라는 가능성을 쉽사리 떠올릴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사교’를 향한 아비앙의 증오는 진짜로 보였다.

그에 대해 증언하는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짓씹은 입술에서는 피라도 새어나올 듯했다.

애초에 ‘사교’라는 표현 자체가 부정적인 인식을 함의하고 있었다. 아비앙이 치밀한 사기꾼이 아닌 이상 그 마음만큼은 진심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고민에 잠겨 침음을 삼키는 사이, 아비앙은 목소리를 높여 열변을 토했다.

“그것도 전부 인간들이 꾸민 짓이에요! 결국에는 마을 어른들까지 넘어가 버리고……!”

몸을 부르르 떠는 아비앙의 낯빛이 처연했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일순 내 존재를 잊고 인간들을 비토했을 정도였다. 물론 나는 그 정도로 아비앙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내가 우선해야 할 것은 정보였다.

인류로서의 자부심을 일일이 들이댈 만큼 융통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 덕에 아비앙은 보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우리 엘프들은, 모든 생명을 존중해요.”

기세가 한 풀 꺾여 내뱉은 말이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침묵했다. 사실 내가 들어온 소문과는 영 딴판인 증언이었다.

엘프들은 침엽수림에서 유격전을 수행한다.

그러지 않아도 척박한 곳이 북부였다. 당연히 느닷없이 찾아온 이주민들에게 주어질 자원은 많지 않았다.

특히 식량 문제가 심각할 터였다.

엘프들이 육식을 시작한 시점도 북부로 이주한 이후라고 들었다. 그들이 종교처럼 믿고 있던 채식을 포기할 정도라면, 그 상황이 어떨지는 대략이나마 짐작이 갔다.

이미 포기한 신념은 얼마든지 다시 버릴 수 있다.

엘프들이 북부의 정착민들을 약탈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유르디나 가문이 지금껏 엘프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까닭이었다.

제 삶을 위해 타인을 죽이는 이들이 모든 생명을 존중한다니.

우스운 선언이었으나, 나는 이를 굳이 언어로 옮겨 담지는 않았다.

다만 잠자코 이어질 아비앙의 말을 기다렸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더니, 별 말이 없자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처음에는 운 없이 전쟁에 휘말린 인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스스로를 천신교의 사제라고 불렀는데, 마을에 잘 적응하는 듯 보였죠.”

“……천신교의 사제라고?”

“네, 천신교의 사제. 아직도 신성력을 쓰고 있으니 분명해요.”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천신교의 사제들은 신앙을 바탕으로 신성력을 사용한다. 이는 계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악신의 힘과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그리고 천신과 악신이 세상의 빛과 어둠을 각각 맡고 있는 만큼, 두 신이 내리는 권능 또한 상이했다.

문외한이 육안으로도 구분이 가능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아직 그 ‘사제’는 천신을 향한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사교’라고?”

“그, 그렇다니까요! 그걸 사교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 부르겠어요.”

내 불신이 담긴 반응에 아비앙은 울컥해서 그렇게 외쳤다.

확실히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아비앙은 어리숙하긴 해도 정상적인 사고 능력을 지닌 듯 보였다. 심지어 그녀는 인간 사회에서 10년 이상 살아온 자가 아닌가.

천신교를 함부로 사교로 매도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을 터였다.

결국 나는 다시금 질문을 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이제는 아비앙이 입을 꾹 다물 차례였다.

내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듣고도 아비앙은 망설임을 떨쳐내지 못했다. 지금껏 서슴없이 사교를 비난하던 모습과는 상반되는 반응이었다.

다만 그 낯빛에 일고 있는 갈등은 무언가 종류가 달라 보였다.

동족을 배신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보다는, 토해내야 할 사실이 너무나 끔찍해 차마 입에 담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강한 의문을 담아 되물어야 했다.

“일단 그 ‘사교’가 네 몸을 개조한 건 맞는 건가? 천신교의 사제가 어떻게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지? 또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기에 ‘사교’라고 확신…….”

“우리 엘프들은 동족들을 사랑해요.”

마치 변명하듯 내뱉어진 선언이었다.

물론 이는 이어질 증언에 대한 자기변호에 지나지 않았다. 아비앙은 동족들이 저지르고 있는 짓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품고 있는 듯했다.

나는 톡, 하고 검지로 탁자 위를 두드렸다.

조금 더 시간을 들인 뒤에야, 아비앙은 비로소 ‘사교’의 실체를 실토했다.

“하지만, 사교는 동족들을 먹어치우죠.”

툭, 하고 다시 한 번 탁자를 두드리려던 내 손가락이 멈칫했다.

잠시 사고가 정지하는 느낌이었다.

가득 찬 물통에 돌멩이가 던져진 듯 사고가 범람했다. 일순 용량을 초과해 버린 뇌가 반사적인 질문을 지시했다.

“……뭐라고?”

“말 그대로에요.”

우울한 음색이었다.

방금 전까지 분기에 차 열변을 토해내던 아비앙의 목소리는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 푸른 눈동자는 슬픈 그림자에 가려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아프고 괴로운 기억을 들추어내고 있단 뜻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망연히 아비앙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라니? 도대체 무엇이?

그 해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되돌아왔다.

잔인할 만큼 명료한 사실관계로.

"엘프들이 엘프를 먹고 있어요. 사교를 믿는 이들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나는 무어라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아비앙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결속을 일으킨다. 특히 오랜 박해의 세월을 지낸 엘프들의 동족애는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폭력과 죽음 앞에서도 동족을 버리지 못하겠다고 울음을 터트리던 아비앙을 보라.

상상조차 하지 못한 참혹한 현실이었다.

뜻 모를 감정이 울컥거리며 목젖을 두드렸다.

"그걸 두고만 보고 있다고? 당연히 말려야……!"

"미친 거죠."

허망한 미소를 지으며, 아비앙은 그렇게 단언했다.

"……미쳐 가고 있어요, 우리 엘프들은."

사무치는 절망을 담아서.

나는 문득 미트람의 말을 떠올렸다.

암흑교단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던가.

그 박해와 차별의 끝에서, 엘프들은 제 동족을 포식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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