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19화 (319/649)

〈 319화 〉 5. 빵과 비수(17)

* * *

메마른 대지는 춥고 어두웠다.

악신의 저주를 받은 땅은 어떠한 생명도 잉태하지 못했다. 그 위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혹한과 굶주림에 적응해야 했다.

침엽수림의 모든 생물들은 악신 오메로스의 규칙을 따랐다.

강자가 약자를 포식하고, 약자는 강자를 기만하며, 삶을 연명하기 위해 폭력과 투쟁을 그치지 않는다.

이 긍휼한 생존의 법칙에는 도덕과 법률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북부의 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도태되고, 그 시체는 또 다른 생명의 한 끼 식사로 전락한다.

그 끝없는 순환에 예외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북방의 패자 유르디나 가문이 북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북부의 법칙을 체화했다.

그것이 인류가 대륙을 지배해 온 방식이었다.

어떤 종보다도 뛰어난 적응력과 가능성을 지닌 종족이었다.

오랜 전쟁 끝에, 엘프들 또한 인류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잔인하고 악했으나 그들은 강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신념과 전통마저 저버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삶의 가파른 절벽까지 몰린 엘프들은 결국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대로 도태될 것인가, 그토록 증오하던 인류를 본받을 것인가.

사실 그들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전자를 택하는 자는 죽고, 후자를 택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테니까.

운명을 개척하는 것은 산 자의 특권이었다.

그리고 질긴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것 또한 산 자들이었다.

침엽수림의 한복판에 횃불들이 나란히 섰다.

횃대처럼 주위를 밝히는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거무죽죽했다. 불그스름한 불 그림자가 스칠 때마다 암울한 눈빛이 허공 속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귀는 전부 뾰족했다.

북부로 쫓겨난 엘프들이었다.

그들이 둘러싼 곳에는 어느 사내가 서 있었다. 흉측하게 녹아내린 화상 자국이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피부가 엉겨 붙어 그 연령대조차 짐작이 불가능했다.

단지 사내는 반쯤 달라붙은 눈꺼풀을 억지로 뜨며 외쳤다.

“오, 여러분… 오늘도 이 괴로운 의식에 동참해 주어 감사합니다. 우리는 불행히도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천신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영혼은 자유로운데, 육신이라는 껍데기에 묶인 우리는 이토록 아프고 괴롭습니다.”

사내는 슬픈 음색으로 그렇게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의 낡고 해진 사제복이 밤바람에 펄럭였다. 북부의 칼바람이 쓰릴 만도 한데, 사내는 조금도 괴로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몰랐다.

전신에 새겨진 화상과 녹아내린 피부는 그를 늘 괴로운 안색으로 만들었다. 어차피 늘 괴롭기 때문에, 새로운 고통을 느껴도 티가 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의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것은 목소리였다.

불에 탄 살점과 피부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가 절망에 젖은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를 지어 육신에 갇혔고,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 고통 받습니다… 우리가 삶을 부지하는 까닭은 천신께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함입니다. 그 죄를 모두 청산하고 나서야 우리는 진정한 영혼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겁니다!”

사내의 연설이 이어질수록 엘프들의 시야는 점점 더 낮아졌다.

고개 숙인 엘프들의 모습은 마치 무덤가의 비석과 같았다. 슬프고 장엄한 의식이 눈보라 속에서 펼쳐졌다.

사내가 손에 든 횃불을 높이 치켜든 것은 그때였다.

그대로 기도라도 올릴 듯한 태세였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때때로 천신의 질서는 칼날과도 같아, 너무나 아픈 시련을 우리에게 내리기도 합니다… 괜찮습니다. 고통은 짧고, 행복은 영원합니다. 살면서 겪을 고통을 모두 겪는다면, 차라리 그 편이 더 행복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형제를 구원해야 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어딘가로 향했다.

그러자 야음에 묻혀 있던 또 하나의 인물이 드러났다.

겁을 먹은 채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엘프였다.

대개 미형으로 생긴 동족들과 달리, 등이 굽고 혹이 나서 꽤 추레한 꼴을 하고 있다는 점이 독특했다. 얼핏 보기에도 거동이 힘들어 보였다.

그 뒤에는 어머니로 추정되는 엘프 하나가 눈을 감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곱사등이 엘프는 지능조차 온전하지 못한 지, 제대로 된 언어조차 토해내지 못했다.

“으, 아… 어, 어마. 나, 나 무서어…….”

결국 여성 엘프는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속절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엘프는 제 가슴을 두드리며 꺽꺽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엘프들의 표정도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사내 또한 가슴이 먹먹한 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단지 여성 엘프의 어깨를 두드리며, 사과와 위로를 건넸을 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아드님은 지금껏 너무나 괴로운 삶을 보내오셨습니다. 앞으로 400년은 더 그렇게 사셔야겠지요. 그 기나긴 세월에 비하자면, 앞으로 있을 몇 분은 찰나와도 같습니다.”

“제발…….”

여성 엘프는 목이 메어 사내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제발, 우리 아들을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부탁인지 포기인지 모를 말이었다.

다만 사내가 그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로 보였다.

그의 뜨거워진 눈시울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엘프들 몇몇도 참지 못하고 옅은 울음을 터트렸다.

사내는 단단한 어조로 약조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저벅저벅 걸어 곱사등이 엘프에게 다가섰다. 곱사등이 엘프는 본능적으로 제 머리를 가르며 히이익, 하고 겁먹은 소리를 흘렸다.

사내는 그 모습을 슬픈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드십시오.”

그가 품을 뒤적이더니, 빵 하나를 건네며 한 말이었다.

북부에는 곡물이 자라지 않는다. 곡물은커녕 제대로 된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엘프들이 수두룩했다.

자립이 불가능한 곱사등이 엘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오랜 굶주림에 지쳐 있던 곱사등이 엘프의 눈에 흐릿한 광망이 어렸다. 그럼에도 사내가 무서운지 머뭇거리기는 했으나, 사내는 인내심 있게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결국 곱사등이 엘프는 본능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는 허겁지겁 빵을 먹어치웠다. 오랜만에 먹는 식사에 목이 막힐 법도 한데도, 곱사등이 엘프의 식사는 순식간에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곱사등이 엘프가 기대에 찬 시선으로 다시 사내를 올려다 본 그 순간.

퍽, 하고 곱사등이 엘프의 턱이 돌아갔다.

곱사등이 엘프는 일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지고 나서야, 곱사등이 엘프는 화끈하게 올라오는 통증을 느꼈다.

불행한 엘프 하나가 울부짖었다.

“우, 아, 으… 아우, 아으, 아아아아아아악!”

그 비명을 들은 주위의 엘프들이 고개를 돌렸다. 곱사등이 엘프의 어머니는 땅바닥에 달라붙다시피 꺽꺽 눈물을 터트리고 있었다.

곱사등이 엘프를 후려친 당사자인 사내는 조용히 성호를 그을 뿐이었다.

“주여, 용서하소서…….”

그 이후에는 일방적인 폭력이 이어졌다.

주먹으로 패고, 발로 차고.

핏물과 살점이 애처로운 괴성과 함께 비산했다. 그러나 몸이 성치 않은 엘프가 수수께끼의 괴력을 발휘하는 사내에게 저항할 수는 없었다.

단 몇 분만에 곱사등이 엘프는 곤죽이 되고 말았다.

흐릿한 신음만이 그의 생존을 입증하고 있을 뿐이었다. 멀거니 뜨인 눈동자에서 고통에 찬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제야 사내는 폭행을 멈추었다.

사제복에는 핏자국이 튀어 새하얀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내의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체였다.

그는 슬픈 눈빛을 하며 품에 손을 넣었다.

빵을 꺼냈던 그 품에서, 비수가 뽑혀 나온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천신께서도 용서하시겠지요… 부디 행복하시기를, 젊은 영혼이여.”

그리고 푹, 하고 비수가 곱사등이 엘프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곱사등이 엘프는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제 목을 움켜쥐었다. 허나 흐르는 피를 주체할 도리는 없었다.

켁, 켁, 거리며 흘러나오는 단말마.

그것이 끝이었다.

바르르 몸을 경련하던 곱사등이 엘프의 머리가 힘없이 떨어졌다.

죽음의 신호였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곱사등이 엘프의 핏물이 고인 자리로 핏빛의 기체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핏물을 빨아들인 기체는 곧 형체를 갖추더니, 나무가 되어 자라났다.

우드득, 빠드득.

곱사등이 엘프의 시체가 우그러지며 양분이 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것이 종 소리라도 되는 양 몇몇 엘프들이 다급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몇 초만에 무럭무럭 자라난 작은 나무는 징그러운 몰골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인체를 비틀어 혐오스러운 예술품을 만든 듯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신경 쓰는 엘프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나무에 맺힌 살점 덩어리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동안 우묵한 눈빛으로 나무를 지켜보던 사내는, 이내 기나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드셔도 됩니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 사내는 떠나갔다.

처음에 엘프들은 조금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동족의 시체를 파먹고 자란 나무에 함부로 손을 뻗기는 힘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꼬르륵, 하고 누군가의 배가 울리는 순간.

엘프들은 한 마리의 굶주린 짐승이 되어 나무로 달려들었다. 그 와중에 아수라장이 벌어져도 상관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곱사등이 엘프의 어머니조차 눈물을 추스르며 몸을 일으켰을 정도였다.

그 한밤의 소란을 뒤로 하며, 사내는 또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려 보냈다.

“임마누엘…….”

북부의 밤은 아직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

아비앙을 심문한 그날 밤, 나는 델핀 선배로부터 서신 한 장을 전해 받았다.

그 내용은 짧고 담백했다.

‘도와줘.’

나는 말없이 그 글귀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방을 나섰다.

아비앙의 눈물 어린 호소가 마음에 걸렸다.

엘프 소녀는 울면서 호소했다.

‘엘프는, 우리 엘프들은 미쳐가고 있어요… 돈을 보내지 않으면 제 동생까지도 죽여 버릴 거라고요! 사교는, 가장 쓸모없는 엘프들부터 희생시키니까…….’

아비앙에게도 동생이 있던 걸까.

괜히 네드의 모습이 겹쳐 보여 마음이 불편했다. 그야말로 쓸데없는 연민이었다.

아비앙은 엘프였고, 제국의 적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곧 나의 적이기도 했다. 섣불리 동정을 품어서는 안 되는 상대였다.

알고는 있었다.

알고는 있는데, 자꾸만 눈에 밟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머리를 비우고 검을 휘둘러 보기로 했다.

어린 시절부터 고된 수련을 반복해 온 나였다.

당연히 기분을 푸는 방법도 몸을 움직이는 법밖에 알지 못했다. 내게 검을 휘두르는 것은 수련이자 취미였다.

다만 방을 나선 나는 의외의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이안 선배.”

아직도 곳곳에 붕대를 감고 있는 소녀였다.

이제는 그 회색 머리카락만 봐도 정체를 눈치 챌 수 있었다. 내가 아끼는 후배이자, 유르디나 가문의 서녀인 세리아였다.

내가 그녀에게 걱정스러운 인사를 건네기도 전.

“한 수, 가르침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세리아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고, 나는 잠시 멈칫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아쿠아마린을 닮은 눈동자에 투지가 어려 있었다.

되짚어 보면, 벌써 그녀와 검을 맞댄 지가 얼마나 됐던가.

일전에는 처참히 패배했던 기억이 났다. 마지막에 어찌저찌 일격을 먹이기는 했으나, 종합적인 성적은 나의 압도적 패배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나는 슬그머니 맺히는 사나운 미소를 주체할 수 없었다.

다친 후배를 앞에 두고 보일 표정은 아니였지만, 나는 새파란 목소리로 답했다.

“……좋아, 한 판 뜨자.”

마침 심란하던 차에 잘 됐다 싶었다.

자고로 전투만큼 검사의 뇌를 깨끗하게 세척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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