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화 〉 5. 빵과 비수(18)
* * *
밤을 등지고 나와 소녀가 섰다.
심야의 숲은 고요했다. 밀회를 나누는 연인들이 아닌 이상 찾아오는 이들이 없는 곳이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비밀스러운 속삭임만이 인기척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마저도 우짖는 새소리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지만.
숲의 공터에 가라앉는 것은 결국 침묵뿐이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검에 집중하기에는 훌륭한 조건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쥐는 목검의 감촉을 만끽하고 있었다.
차갑고 반드러운 느낌이었다.
시험 삼아 몇 차례 휘둘러보니 가벼운 무게감이 전해졌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진검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 묵직한 중량감으로부터의 해방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지금껏 내가 치러 온 전투 중에 연습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사투는 실전이었다.
한가롭게 목검을 쥐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내 손에는 언제나 날붙이가 들려 있었고, 피와 살점을 흘려가며 승리를 쟁취해 온 몇 달이었다. 나는 진검으로 생명의 무게를 배웠다.
그래서 간만에 느껴지는 목검의 홀가분한 무게감이 유독 기꺼웠다.
이처럼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고 전투에 임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대련은 귀향제 직전 데렉 교수님의 강의가 마지막이었던가.
그조차도 실전에 준하는 긴장감을 요하는 훈련이었다. 기분 전환 삼아 세리아와 검을 맞대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도였다.
그렇게 나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검극의 위치를 정돈했다.
다소의 여유가 느껴지는 자세였다.
반면 내 대척점에 선 소녀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숨을 몰아쉬고, 내쉴 때마다 소녀의 가슴이 확장과 이완을 반복했다. 심호흡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긴장을 억지로 가라앉히기 위해서로 보였다.
순수하게 실력을 겨루는 대련이었다.
굳이 초조해 하지 않아도 되는 싸움이었으나, 세리아는 이 대련에 필요 이상으로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나야 그 까닭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미래에서 온 ‘나’와의 대련이 영향을 미쳤겠거니 할 따름이었다.
얼마 전 세리아는 미래에서 온 ‘나’에게 도전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예외조차 없이 처참한 패배를 겪어야 했다.
그때 박살난 것은 비단 세리아의 몸뿐만이 아니었을 테지.
검의 천재로 불려오며 자라난 세리아였다.
유르디나 가문의 서녀로, 온갖 설움을 당하면서도 검 하나만을 정진해 왔다. 그녀에게 있어 검은 자존감 그 이상이었다.
어쩌면 이 기회에 다시금 제 실력을 증명 받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나와 호각으로 겨루기만 해도 목표는 달성되는 셈이었다. 미래에서 온 ‘나’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었으니까.
세리아가 더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던, 그 촌평.
그래서 나는 더더욱 기세를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검사 대 검사의 싸움이었다. 괜히 오지랖을 부렸다가는 세리아의 자존심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길 뿐이었다.
그리고 마음을 진정시킨 세리아가 정자세를 취한 찰나.
“……갑니다.”
회색의 질풍이 내달렸다.
흐릿한 어둠 속을 가리고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목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날카로운 찌르기였다.
캉, 하고 전력으로 내려친 검과 검이 마주 튕겨나갔다.
마치 금속이 맞부딪히는 듯한 묵직한 감각, 나와 세리아의 손에 들린 이상 목검은 단순한 연습용 무장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상대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 흉기였다.
이를 증명하듯 세리아의 검격이 연달아 솟구쳤다. 좌하단에서 우상단, 빗금의 궤적 속을 후려치려던 그때.
나는 문득 그 자세가 어딘가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르디나 가문의 비전 절기, 금사검(???).
하늘로 솟구친 검격이 단숨에 세 줄기로 분열해 내리꽂혔다.
그 푸른 빛줄기에 나는 경악성을 토해내며 뒤로 물러났다.
검격이 스치며 앞섬이 살짝 베여나갔다. 몇 방울의 피가 튀기며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
이래서는 목검과 진검의 구분이 의미가 없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대련에 임하던 나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 입에서 다급한 만류가 절로 새어나왔다.
“세리아, 무슨 대련에 가문의 비기까지……!”
“……갑니다!”
그러나 세리아는 이미 각오를 굳힌 뒤로 보였다.
입술을 짓씹은 세리아가 다시 진각을 내딛었다. 그리고 텅, 하고 공간이 압축되며 소녀의 신형이 쏘아졌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째서 세리아가 그토록 긴장하고 있었는지.
애초에 나와 세리아는 대련에 임하는 마음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세리아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진심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진심뿐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온몸에 마력을 돌렸다.
그러자 잠들었던 감각이 일깨워지며 시각이 공간을 도해했다. 세리아는 반듯한 자세로 검을 내려긋고 있었다.
보인다.
가상의 궤적이 세리아의 다음 수를 예고하고 있었다.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은 제한적인 예지 능력이나 다름없었다.
과연 정통파 중의 정통파였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연격은 자그마한 빈틈조차 없어 보였다. 만일 예전의 나였다면 꼼짝없이 당했으리라.
그래, 과거의 나라면.
지금의 나는 아니었다.
내 손이 공간의 실선들을 으스러트렸다. 체내의 마력이 소진되며 묘한 탈력감이 일었으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행동이었다.
세리아의 검격이 연이어 기묘한 궤적을 그렸다.
왜곡된 공간 속에서 목검은 내게 닿지 못했다. 그 틈새를 박차고 뛰쳐나간 내 검이 야수처럼 연격을 내질렀다.
캉, 캉, 캉!
세리아는 급히 태세를 수세로 정비했다. 빠른 대응이었으나, 그 사이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빈틈마저 메꾸지는 못했다.
내리긋는 듯하다가,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동시에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무리한 접근에 세리아가 주춤하며 물러섰다. 당장 수세에 빠진 세리아는 내게 적극적인 대응을 보일 수 없었다.
그리고 콱, 하고 틀어박히는 발길질.
경계하고 있던 탓에 내 일격은 세리아의 검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내가 노리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다시 한 번 전력으로 내리쳐친 검격이 세리아의 검신을 후려쳤다.
세리아는 옅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몇 개월 전의 나라면 결코 거둘 수 없는 성과였다. 당시에는 세리아와 내 격차가 현격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묘한 직감이 들었다.
세리아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확신이.
세리아가 두어 걸음 물러나며 휘청이는 사이, 내 검이 좌하단으로 떨어졌다.
커다란 동작은 그만한 빈틈을 수반하는 법이었다.
세리아는 이 틈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다시금 내게 쇄도했다.
그것이 실책이었다.
좌하단으로 떨어진 검이 하늘 위로 솟구친다.
그제야 세리아의 눈이 부릅떠졌다. 처음에 나누었던 공방이 역전된 구도였다.
아니, 차이점은 있었다.
피하려고 해도 세리아는 이미 늦은 뒤였다.
정점으로부터 분열한 다섯 줄기의 은빛 섬광이 쏟아져 내린다.
세리아는 검면을 세워 이를 막아 세우려 들었다. 허나 빗줄기처럼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검광을 일일이 가로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득, 하는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목검이 파쇄되는 소리였다. 세리아는 내 회심의 일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몇 걸음이나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며, 울컥 토해내는 핏물.
어떻게든 체내의 마력을 써서 충격을 최소화한 모양이었다.
그 과정에서 마력이 과포화된 탓에 목검은 으스러져 버렸고, 세리아의 혈도는 엉망이 되어 피를 토하게 되었다는 결론이었다.
승자는 명확했다.
나는 후우, 하고 거칠어지려던 숨결을 가다듬으며 검을 거두었다.
그 직후 내뱉어진 것은 흐릿한 걱정의 말이었다.
“세리아, 괜찮아?”
오러까지 써가며 승리를 따낸 사람치고는 꽤 뻔뻔한 소리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리아가 진심이면 나도 진심으로 맞서는 수밖에.
슬그머니 다가서려던 내 앞을 새하얀 손이 만류했다.
세리아는 제 가슴을 몇 번 탁탁 두드리더니, 품속에서 힐링 포션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야 그녀는 다소 안정이 되는 기색이었다.
어느덧 그 안색이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세리아가 자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완패입니다, 이안 선배… 이제는 상대도 되지 않네요.”
“운이 좋았지.”
내 겸양에 세리아의 입술에 걸린 호선이 더욱 씁쓸해졌다.
나는 세리아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흔해빠진 위로의 말조차도 없었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은 오로지 세리아의 몫이었다.
단지 나는 그것이 장기적으로 세리아의 성장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었다. 세리아는 이대로 꺾일 만큼 나약한 검사가 아니었으니, 기필코 아픔을 딛고 일어서리라.
그 바람처럼 세리아는 후아, 하고 후련하다는 듯 거친 숨을 내뱉었다.
소녀의 눈가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대단해요, 이안 선배… 어떻게 그렇게 단기간에 성장하셨나요?”
비로소 내 성장이 증명받는 듯했다.
그것도 몇 개월 전,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처참히 패배했던 상대의 인정이었다.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는 어느덧 세리아를 뛰어넘어 있었다.
꽤나 여유를 가지고 승리를 따낼 만큼이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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