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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21화 (321/649)

〈 321화 〉 5. 빵과 비수(19)

* * *

승리는 달콤하고 성장은 보람찼다.

그러나 이를 아끼는 후배 앞에서 뽐낼 만큼 나는 못난 인간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애써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지금은 선배로서 성숙한 태도를 보여야 할 때였다.

내 입에서 허세 없는 솔직한 고백이 새어나왔다.

“뭐,운이 좋았지……?”

그야말로 운이 좋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쩌다 미래에서 온 편지를 받고,미래에서 온‘나’의 기억을 들추어 보며 단기간에 성장한 나였다.이를 순전히 내 공으로 돌리는 것은 양심이 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세리아는 이를 또 다른 겸양의 말로 받아들였는지,후후 하고 옅은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고개 숙인 소녀의 낯빛에 쓸쓸한 그림자가 어렸다.

“……이래서는,반박할 수가 없겠네요. 아직 저는 한참이나 모자라다는 걸.”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연속된 패배는 맹렬한 투지조차 사그라트린다. 한때 범재에 불과했던 나는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기대를 내려놓고 주제에 맞는 일상을 누리는 삶.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으나, 아직 내게는 세리아가 필요했다.

무심코 한 마디를 던진 것은 그래서였다.

"얼른 와."

"……?"

세리아가 멀거니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후배의 멍청한 눈빛에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서 오라고. 그 기술만 익히면 와도 된다며."

"아……."

그제야 세리아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옅은 탄성을 터트렸다.

일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미래에서 온 '나'는 특정 기술만 사용해서 세리아를 제압했고, 최소한 그 묘리를 깨우친 후에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했다고.

이는 반대로 말하면 그 기술을 익히기만 하면 따라와도 좋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내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할 수도 있겠으나, 어쩌겠는가.

억울하면 애초에 애매하게 말하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화를 자초한 쪽은 그 사내였다.

맑은 하늘에 구름이 걷히듯 세리아의 안색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 그래도 될까요? 혹시 제가 선배의 걸림돌이라도 되면……."

"넌 한 번도 내 걸림돌이었던 적이 없어."

두어 걸음 걸어서, 나는 세리아의 앞에 섰다. 내 손이 세리아의 어깨 위로 얹어진 것도 그때였다.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와. 델핀 선배도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리고 나는 품속에서 델핀 선배로부터 받은 쪽지를 꺼내들었다.

세리아는 그곳에 적힌 짤막한 글귀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러기를 얼마쯤, 세리아는 의지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배… 반드시 따라갈게요. 선배와 언니를 위해서도."

세리아가 가장 존경하는 두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 넘치는 재능을 고려하면, 세리아가 나를 뒤따라 올 날이 머지않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2주 이내에는 쫓아오지 않을까.

참 무시무시한 재능이었다.

배우지도 못한 기술을 훔쳐내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제대로 전수받는 것에 비하면 난이도가 무척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세리아는 일말의 불안감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 또한 그녀가 실패하리란 가능성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세리아는 해낼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나는 대견한 마음에 세리아의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었다.

평소 셀린과 리아에게 하던 버릇이었다.

내 마음속에서 세리아는 그 둘과 함께 여동생의 위치에 있었던 탓이었다.

물론 과년한 처녀에게 하기에는 부적절한 면이 있는 접촉이었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내 손이 흠칫 떨렸다.

혹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을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머리를 함부로 내주는 여인은 드물었다. 기껏 정리한 머리카락이 헝클어질뿐더러, 남녀 간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행위로 여기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세리아는 딱히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감고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일 정도였다. 그 연유는 알 수 없었으나, 세리아가 즐겁다면 나도 좋았다.

내 쓰다듬기는 한동안 이어졌다.

다만 세리아는 아직도 내게 볼일이 남아있는 듯했다.

푸른 눈동자가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폈다. 소녀의 입에서 조심스러운 질문이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그런데 선배……."

"응?"

나는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얼굴로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리아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마음을 정한 듯 눈을 질끈 감고 물어왔다.

"혹시 그 금사검(???), 어디서 배우셨어요?"

금사검을 어디서 배웠냐, 라.

그야 나도 몰랐다. 미래에서 온 내 기억을 훔쳐보다 보니 어쩌다 배운 기술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의문이었다.

미래에서 온 '나'는 어떻게 그 수많은 비전들을 익힐 수 있었을까?

문득 떠오른 의문에 돌려줄 마땅한 해답은 없었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은근슬쩍 세리아를 떠 보기로 했다.

"……왜?"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한 질문을 던지냐는, 어찌 보면 당연한 반문.

그 한 마디에 세리아는 다시 우물쭈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참, 소녀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게… 금사검은 유르디나 가문의 비전이잖아요?"

"그렇지."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니 세리아로서는 그 출처가 궁금할 수밖에 없긴 했다. 유르디나 가문의 일원으로서 당연한 권리였다.

다만 내가 의문이었던 부분은, 그 질문이 굳이 이처럼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냐는 점이었다.

세리아는 마치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캐묻는 듯 머뭇거리고 있었다.

필시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 '사정'이 밝혀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니께서도 별 말씀이 없으시고, 그렇다면 언니께서 선배를 금사검의 전수자로 인정하셨단 소리인데……."

사실 그 이야기에는 숨겨진 전말이 존재했다.

애초에 나와 델핀 선배의 인연은 출발이 그렇게 좋지 못했다.

미래에서 온 '나'는 델핀 선배를 말 그대로 다진 고기로 만들어 버렸다.

그 과정에서 공포를 느낀 델핀 선배는 차마 '금사검'에 대해서도 물어보지 못했다. 물론 이는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사건을 거치며 델핀 선배는 어느덧 금사검의 존재를 당연하다는 듯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한 마당에 굳이 내게 출처를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일단 델핀 선배는 내 '노예'를 자처하고 있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렇게 내 '금사검'에 얽힌 비밀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최소한 오늘 세리아가 다시 그 문제를 제기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녀는 초조한 기색으로 저만의 추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그러면 혹시 선배를 유르디나 가문의 혈족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인가? 그래서 혹시 선배와 언니께서 약혼을 하신 사이가 아닌가 하고… 그, 그러면 그러면……!"

내가 정체 모를 오한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세리아가 홀로 중얼거릴 때마다 그녀의 눈동자가 칙칙한 빛으로 가라앉았다. 어느새 아쿠아마린을 닮은 동공에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심해를 바라보는 듯한 묵직한 색이었다.

나는 그 서늘한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그러면, 없애 버리는 수밖에 없는데."

누구를, 이라는 의문이 목젖까지 차올랐으나 나는 가까스로 참아냈다.

세리아가 내놓을 대답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단지 나는 속으로 재차 다짐했다.

절대 세리아에게는 델핀 선배와의 관계를 들키지 않으리라.

절대로.

그러든 말든 세리아는 음울한 어조로 읊조리면서, 제 허리춤의 칼을 멍하니 내려다볼 뿐이었다.

**

북부로 향할 인원은 금세 결정되었다.

우선 성녀를 꼬시는 과정은 간단했다. '사교'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성녀가 참전 선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풍만한 젖가슴 위로 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천신교의 사제가 사교를 이끌고 있다면 두고 볼 수 없습니다. 하물며 암흑교단이 얽혀 있는 문제라면요."

그리고 엘시 선배의 동행 또한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엘시 선배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내게 찾아왔다.

의아한 눈빛을 한 나를 두고 엘시 선배는 히죽 미소를 지었다.

"내가 주인님을 두고 어딜 가?"

반대로 말하면, 날 두고 네가 어딜 가냐는 뜻이었다.

일전의 고백 이후 묘하게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쓰기 시작한 엘시 선배였다. 그에 맞추어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다소 변화가 있었다.

당장 은근슬쩍 나를 압박하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그래봐야 내가 정색하면 금방 수그러들겠지만, 나는 굳이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어차피 엘시 선배의 손이 아쉬운 쪽은 나였으니까.

마지막으로 이미 이야기를 나누어 두었던 황녀와 엠마까지 포함해서, 북부로 떠날 일행이 모두 결정되었다.

셀린은 안타깝게도 세리아와 함께 아카데미에 남아 수련을 한다고 했다.

인사를 위해 찾아갔을 당시, 셀린은 낑낑거리며 제 몸집만한 배틀 엑스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 박력이 어마무시했다.

나조차도 셀린이 전력을 다한 일격을 막아낼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박살난 지반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나를 두고, 셀린은 멋쩍은 듯 볼을 긁적였다.

"조, 조금 익숙해졌나? 아하하……."

아무리 봐도 '조금' 익숙해진 수준이 아니었다.

이를 가장 잘 체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셀린일 터였다. 그녀는 오랜만에 찾아온 성장의 기회를 방해받고 싶지 않은 듯했다.

나는 그 의사를 존중해 주기로 했다.

세리아는 어디에 틀어박혀 수련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곧 따라오겠다고 했으니, 북부에 가서 기다리면 찾아오겠지.

그렇게 나는 아카데미에 도착한 지 단 몇 주만에 다시 짐보따리를 싸야 했다.

북부로 향하는 여정은 짧았다.

페르쿠스 영지와 같이 영세한 시골과 달리 유르디나 영지는 북부의 대도시였다.

워프 게이트가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마차를 탈 필요도 없었다.

다만 그 짧은 길목에서도 다소의 다툼이 있었을 뿐이었다.

나와 처음으로 동행하는 엠마는 단연 일행 최고의 관심사였다.

그 노골적인 경계에 의기소침해진 엠마가 내 등 뒤로 숨을 정도였다.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으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일행들이 아니었다.

특히 엘시 선배가 문제였다.

그녀는 내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엠마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다.

"야, 평민. 너 뭐냐?"

"아, 라이넬라 아가씨……."

엠마에게 다가온 첫 번째 시련이었다.

내 눈이 흘깃 두 사람을 향했다.

말없이, 아무도 모르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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