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22화 (322/649)

〈 322화 〉 5. 빵과 비수(20)

* * *

엘시 선배의 시비에 엠마는 지체 없이 고개를 숙였다.

공손한 태도였다. 평민이 마땅히 귀족에게 취해야 하는 예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배알은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엠마는 내 소중한 친구였다.

귀족과 평민이란 신분의 벽이 있긴 했으나, 아카데미의 동기로 함께한 세월이 한참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엠마를 내 아래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아카데미의 재학생들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아무리 아카데미 바깥이라고 해도 이처럼 상하관계를 확립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었다.

참다못한내가 한 마디를 던지려던 찰나, 엠마가 슬쩍 내게 눈짓을 보냈다.

잠시만 참아보라는 뜻이었다.

차마 엠마의 말을 무시할 수 없던 나는 불편한 침음을 삼키며 눈을 돌려야 했다.

하기야 엠마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내가 무작정 엠마의 편을 들어봤자 엘시 선배의 반감만 살 뿐이었다.

특히 엘시 선배는 얼마 전부터 내게 거침없이 호의를 표하고 있던 차였다.

언제 질투심에 눈이 멀어 이상한 짓을 저지르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 '엘시 라이넬라' 앞에서 불가능이란 없었다.

내가 조용히 신경을 끄는 체하기로 한 이유였다.

물론 이는 겉치레에 불과하긴 했다.

내 시야는 여전히 흘깃흘깃 엘시 선배와 엠마를 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몰래.

못마땅하다는 듯 팔짱을 낀 채로, 엘시 선배는 계속해서 엠마를 도발했다.

"왜 자꾸 거슬리게 주인님 옆에서 알짱거려? 아, 그랬지… 너가 걔구나. 주인님이 1만 골드나 들여서 살렸다는 평민 계집애."

코웃음을 치면서, 엘시 선배는 몸을 엠마에게 바짝 붙였다.

그 푸른 눈동자가 살벌한 빛을 품고 있었다. 엘시 선배의 앙다문 잇새로 차가운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착각하지 마, 너 따위 평민 계집애 특별취급 하는 이유는 주인님이 착해서일 뿐이니까. 동정과 연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알겠어?"

내 입에서 짜증스러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벌써 성녀나 황녀는 내 눈치를 열심히 살피고 있던 참이었다.

오직 엘시 선배만이 엠마를 견제하겠다고 약이 바짝 올라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더는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엠마만큼이나 엘시 선배도 소중한 나였다. 두 사람이 서로 건전한 관계를 쌓아가기를 바랐다.

그렇게 내가 엘시 선배에게 한 소리 하려던 찰나.

"라이넬라 아가씨……."

엠마는 다소 슬픈 눈을 한 채로, 까치발을 든 엘시 선배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자그맣게 울려 퍼지는 속삭임.

"어차피, 저는 첩으로도 만족해요."

잘못 들었나?

나는 예민해진 청각이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귀를 탁탁 두드렸다. 너무 느닷없는 이야기라 사고가 따라가지 못했다.

이는 엘시 선배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엘시 선배는 어안이 벙벙해져 멍청한 반문을 되돌릴 뿐이었다.

"……으, 응? 뭐라고?"

"굳이 저까지 견제하실 필요는 없다고요, 라이넬라 아가씨. 제 주제는 제가 가장 잘 알아요."

그러면서 엠마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평민 출신에, 가진 바 능력이라고는 물약 좀 만드는 정도… 제가 어떻게 감히 욕심을 부리겠어요? 그러니 이안의 옆에만 있게 해주세요… 라이넬라 아가씨도 함께 잘 보필할게요."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니 도리어 당황한 쪽은 엘시 선배였다.

성녀와 황녀는 마치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으로 엘시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엘시 선배는 곧바로 펄쩍 뛰며 얼굴을 붉혔다.

무척이나 억울하다는 반응이었다.

"무, 뭐! 왜! 너, 너희도 나랑 같은 마음이었잖아?!"

그러나 성녀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고, 황녀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할 따름이었다.

그 누구도 엘시 선배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나조차도 엠마의 연이은 선언에 넋이 나간 마당이었다.

결국 엘시 선배는 울상을 지으며 패배를 자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만큼 여론에서 밀렸으면 물러나는 것이 상례였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엘시 선배는 짐짓 대범한 척을 하며 말했다.

"그, 그래! 뭐… 그, 그 정도면 잘 알고 있네? 그 마음 잊지 말도록 해… 그, 그리고 내 말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아예 옆에 있지 말란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면서 엘시 선배는 괜히 멋쩍은 듯 엠마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나름대로 엠마의 존재를 인정해 주겠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귀족들의 문화를 고려하면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귀족들의 사회에서 정실이 평민출신 첩을 견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통하곤 했다.

애초에 급이 맞지 않는데, 너른 마음으로 보듬어 귀족으로서의 아량을 보여야 한다는 논리였다.

오래 전부터 내려온 훌륭한 부인의 조건 중 하나였다.

여성 측에게 대단히 불리한 윤리가 아닐 수 없었으나, 귀족들의 전통은 그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법이었다.

지금 그 성질 더러운 엘시 선배가 엠마를 받아들이는 모습만 보더라도 그랬다.

엘시 선배는 내게 고백까지 한 입장이었다. 당연히 내게 훌륭한 신붓감임을 뽐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터였다.

그러니 엘시 선배로서는 '첩'을 자처하는 엠마를 함부로 건드리기 난감했다.

애초에 귀족이 평민과 남자를 두고 다투는 꼴도 우습거니와, 먼저 평민 쪽에서 굽히기까지 했다면 할 말이 없었다.

속이 좁은 여자가 되거나, 받아들이거나.

두 가지 선택지만이 남아있을 뿐.

엠마는 그 모든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리고 이를 이용하기 위해 마음에 있지도 않은 '첩'이라는 소리를 꺼낸 것이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의 첩을 자처하는 그 각오가 놀라웠다.

엠마는 내 상상 이상으로 처세의 고수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감탄을 이기지 못하고 몰래 내 추론을 유렌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유렌은 감탄하기보다 머저리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드물게도 그의 입에서 경멸에 찬 비난이 새어나왔다.

“……바보냐?”

난데없는 비난이었다.

나는 울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바보'라니, 성국 출신치고 말이 험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레토를 데려오는 건데.

그라면 분명 내게 보다 실전적인 조언을 해주었을 터였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었다. 이미 레토는 단칼에 내 동행 요청을 거절한 뒤였다.

위험한 곳에 굳이 가고 싶지 않다나.

무척이나 합리적인 이유라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근시일 내에 레토에게 서신을 보내리라 다짐했다. 북부에서 조사를 진행하다 보면 분명 레토의 두뇌가 필요할 때가 있을 터였다.

도서관에서 온갖 서적을 섭렵한 레토는 박학다식했으니까.

북부와 엘프의 관계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있으리라.

그렇게 워프 게이트를 통과하러 가는 동안, 여인들 사이에서는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엘시 선배는 직전의 대화 이후 묘하게 엠마에게 호의적이었다. 나란히 걷는 두 여인의 사이로 끝없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개는 엘시 선배가 엠마를 설득하는 내용이었다.

"야, 평민. 너 혹시 줄 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냐?"

"……그, 글쎄요?"

엠마는 그럴 때마다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릴 뿐이었다. 그러나 엠마의 기분은 딱히 엘시 선배의 관심사가 아닌 듯 보였다.

엘시 선배는 포기하지 않고 엠마를 재차 채근했다.

"너도 이제 귀족 사회에 들어오면 알게 될 거야, 줄을 잘 잡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러니까 잘해."

엠마는 엘시 선배의 은근한 제안이 부담스러운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러든 말든 엘시 선배는 우쭐한 표정으로 엠마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지금 가장 앞서 있는 건 나거든. 나머지는 출발선도 제대로 못 섰어."

"……듣자듣자 하니까 애완견이 버릇 없이 자꾸 쫑알쫑알."

느닷없이 성녀가 참전한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순간 울컥하는 감정을 참지 못했는지, 내숭을 떠는 것조차 잊은 채 본심을 말하고 말았다.

물론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나나 유렌은 물론이고, 엘시 선배나 황녀 또한 성녀의 진면목을 한 번쯤은 보았던 인물들이었다. 이제 와서 놀랄 까닭은 없었다.

오직 엠마만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성녀는 내친김이라는 듯 매섭게 엘시 선배를 쏘아붙였다.

"자꾸 헛소리 좀 하지 말래요? 지, 지난번에 한 말도 이안한테 물어보니까 별 것 아니라더만! 그렇게 비열하게 구니까 좋아요?!"

지난번 엘시 선배에게 속아넘어간 것이 무척 분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유렌의 증언에 따르면 성녀가 울기까지 했다니, 화가 나지 않으면 이상했다.

불행한 사실이 있다면, 엘시 선배는 그런다고 눈 하나 깜짝할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엘시 선배는 더욱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응, 너무 좋던데? 그러게 누가 한 발 늦으래? 아, 맞다… 천신의 가장 사랑받는 처녀인데, '처녀'가 아니면 안 되지."

그 말이 정곡을 찌른 듯 성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반박이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땅한 반론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천신교의 성녀라는 지위는 그토록 막중했다.

성녀로 살기 위해 고아로서의 삶마저 저버린 그녀였다.

함부로 성녀의 직무를 내팽겨칠 수는 없을 터였다.

엘시 선배는 간만에 맛보는 일방적인 승리에 도취되었다.

"그런데 왜 하는 짓만 보면 처녀가 아니라 '치녀' 같지? 응?"

"조, 조용히 하세요……."

나는 언제나 그렇듯 다투는 두 사람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엘시 선배와 사이가 나쁘기로는 델핀 선배가 원조였다. 북부에 도착하면 또 어떤 전선이 형성될지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왔다.

한 술 더 떠, 성녀와 엘시 선배가 다투는 틈을 노려 황녀는 슬그머니 엠마에게 접근했다.

"저, 엠마 선배?"

"네, 네?!"

라이넬라 가문의 영애와 성국의 성녀에 이어 제국의 황녀까지 끼어든 마당이었다.

평민에 불과한 엠마는 어느덧 혼이 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황녀는 잠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저, 저 돈 많아요!"

"……?"

뜬금없는 선언에 엠마의 눈빛이 멍해졌다.

그러든 말든 눈치 없는 황녀는 눈을 꼭 감은 채 주먹을 불끈 쥐고 있을 뿐이었다.

"그, 그리고 권력도 있어요… 참고하세요, 그. 줄 서는 거……."

그 말이 끝으로 황녀는 부끄러워졌는지 후다닥 등을 돌려 거리를 벌렸다.

도대체 내 첩실이 되겠다는 선언이 뭐라고 저리도 쟁탈전을 벌이는 걸까.

나는 어이가 없었으나, 이미 여인들의 생태에 대해서는 이해를 포기한 지 오래였으므로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나마 투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시간이 빨리 가기는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워프 게이트를 통과한 직후.

나는 말로만 듣던 북부의 쌀쌀한 기후를 온몸으로 맞이했다.

살이 에일 듯한 칼바람이 불었다. 메마른 대기는 들이마실 때마다 폐부에 쨍한 통증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 너머로, 태양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이 서 있었다.

"오랜만이야, 주인… 아니, 이안."

늘 그렇듯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델핀 선배와의 재회였다.

예전보다 조금 수척해진 모습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