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3화 〉 5. 빵과 비수(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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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는 차고 어두운 곳이었다.
내리쬐는 새하얀 햇빛마저도 차가웠다. 태양을 시리다고 느낄 수 있는 곳은 온 대륙을 통틀어서 이곳이 유일했다.
한때 척박한 벌판이었을 공터에는 온갖 문명의 총화가 늘어서 있었다. 각종 건축물들과 길거리를 가득 채운 인파가 유르디나 가문의 권세를 증명했다.
북부 유일의 대도시이자 명실상부한 중심.
'유르디나 시'라 불리는 장소였다.
이 건조한 동토에 번화가를 일구어 낸 유르디나 가문의 저력이 놀라웠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업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본래 북부는 고작해야 마을 단위의 공동체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르디나 가문이 이주하며, 북부는 비로소 체계를 갖춘 행정 구역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그러니 유르디나 가문이 북부에 가진 영향력은 말해 입만 아플 뿐이었다.
내게 초청장을 보낸 이 또한 그 유르디나 가문의 일원이었다.
제국의 5대 귀족 가문이자, 군권을 관장하는 유르디나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내게 직접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 이름은 델핀 유르디나, 흔히 '북부의 태양'이라 불리는 여인이었다.
'태양'은 대개의 지역에서 신화적인 의미를 지닌다.
대지를 풍요롭게 하는 장본인이자, 세상에 빛과 열을 가져다주는 근원이었다. 신적인 존재로 숭상하는 지역도 적지 않았다.
당장 천신교만 하더라도 태양을 아루스 신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던가.
먼 옛날 천신 아루스와 악신 오메로스가 내기를 했는데, 비열한 속임수에 넘어간 아루스 신이 간과 눈을 빼다 하늘에 박아 넣었다는 이야기였다.
그중 간은 태양이 되었고, 눈은 달이 되었다.
그래서 세상의 삿된 존재들은 햇빛 아래 녹아내리고 만다나.
이처럼 태양을 숭상하는 것은 북부도 마찬가지였다.
도리어 북부는 그 어느 곳보다도 태양이 소중한 장소였다. 태양마저 없으면 영원한 눈과 얼음의 땅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태초부터 델피렘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땅이었다.
대자연의 은혜에 기대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니 북부에서도 '태양'이 함의하는 바는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북부인들의 지도자이자, 제국의 황제 다음 가는 절대자.
불패의 업적을 쌓아온 유르디나의 유일무이한 후계자에게 어울리는 별칭이었다.
다만 북부의 척박한 조건 탓인지, 북부인들의 미적 감각은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다.
멋보다는 실용, 논리보다는 힘을 중시해 왔던 탓이었다.
예술에 투자할 자원이 있다면, 차라리 굶주린 전사들을 먹이는 쪽을 택하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유르디나 가문의 영주성조차 황량한 느낌을 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도리어 말하자면 설비 자체는 호화스러울 정도였다. 자재나 기구는 하나같이 고급품으로 보였으니까.
그럼에도 유르디나 성은 무언가 삭막한 느낌을 주었다. 대귀족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화려한 기품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까.
나는 그처럼 거무칙칙한 복도를 따라 걸었다.
내 앞에서는 안내인으로 붙은 노기사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미 면식이 있는 인물이었다.
'알렉스 경'이었던가, 일전에 페르쿠스 영지에서 신세를 진 바가 있었다.
시체 거인과의 혈전에서 일천에 달하는 유르디나의 사병을 통솔하던 기사였다. 그만큼 가문의 신임을 받는다는 뜻이었는데, 그새 유르디나 시로 귀환한 모양이었다.
정작 나를 초대한 델핀 선배는 잠시 일을 처리하러 떠난 뒤였다.
워프 게이트를 나서다 마주친 것도 순전한 우연에 불과했다. 애초에 언제 도착한다고 언질이 없었던 만큼, 델핀 선배쯤 되는 인물이 한가롭게 시간을 죽이고 있을 틈은 없었다.
그렇게 유르디나 성에 도착해, 한숨 돌리고 있던 차에 다시 기별이 온 것이다.
델핀 선배가 나를 찾고 있다고.
응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나는 그 길로 곧장 알렉스 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새삼 깨닫는 사실이 있었다.
델핀 선배의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벌써 몇 분째 걷고 있는데 성내의 복도가 끝이 없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도 애매했다.
적막에 잠기는 것도 잠깐뿐이지, 아무 말도 없이 걷고만 있다 보니 지루한 마음을 이겨내기 힘들었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나는 알렉스 경에게 말을 건네고 말았다.
"저, 알렉스 경?"
그러나 알렉스 경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언제 보아도 참 석상 같은 사내였다.
페르쿠스 영지에서는 보다 여유로운 인상이긴 했는데.
나는 그 냉대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지난 전투에서는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궁지에 몰렸던 수많은 영지민들이 구명……."
"누구를 위한 전투도 아니었습니다."
단칼에 자르고 들어온 말이었다.
알렉스 경의 단호한 어조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인사치레에 이토록 쌀쌀맞은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북부란 참 차가운 곳이구나.
내가 그렇게 실감하는 사이, 알렉스 경은 메마른 목소리로 덧붙였다.
"오로지 명예를 위한 전투였죠. 북부의 병사는 결코 적을 앞에 두고 등을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딱히 고마워하실 필요도, 빚을 지셨다 느끼실 필요도 없습니다."
너무나 담백한 단언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헷갈렸다.
알렉스 경이 단순히 진심을 읊었을 뿐인지, 혹은 나를 배려해서 한 말인지.
고향에서 보았을 때와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때는 보다 호방한 성미로 보였는데, 지금은 닿으면 칼에 베일 듯한 북부 기사의 전형이었다.
혹은 최근의 전황이 그다지 좋지 않은지도 몰랐다.
나는 워프 게이트 앞에서 마주쳤던 델핀 선배의 낯빛을 떠올렸다. 드물게도 다소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
델핀 선배가 그럴 정도라면, 알렉스 경은 그보다 더 예민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며 얼마쯤 더 걸음을 옮겼을까.
알렉스 경이 묵직한 문 앞에서 멈추더니, 이내 나지막한 어조로 안내했다.
"이 앞에서 소가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가주'라,
간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귀족 사회에서 드문 표현은 아니었다. 후계자 경쟁이 끝난 가문 내에서는 이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소가주’라는 별칭과 함께 꼬박꼬박 존대를 붙이곤 했다.
이는 하급 귀족보다 고위 귀족의 문화에 가까웠다.
하급 귀족은 보다 널널한 분위기에서 자라나는 반면, 고위 귀족은 어린 시절부터 후계자 경쟁에 매몰된다. 그러다 보니 그 후의 대응도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고위 귀족의 사회는 일견 야생의 생태계를 닮아 있었다.
승자독식.
후계자가 결정되면, 그 이전의 관계가 어찌되었든 가문의 모든 이들이 그 앞에 무릎 꿇어야 했다. ‘소가주’라는 호칭 또한 그러한 의미였다.
아직 가주는 아니지만, 가주에 준하는 위치로 대우하라는 말이었다.
새삼 그 사실을 상기한 내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처럼 가신들의 충성을 한 몸에 받는 델핀 선배였다. 혹여 그녀가 내게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발각이라도 되면?
가문의 불명예를 지우기 위해 내 존재를 제거한다는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었다.
물론 내 불안이 실현될 확률은 높지 않았다.
내 배후에는 황제와 제국 첩보부가 버티고 있었고, 나는 제국의 떠오르는 신성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참이었다. 아무리 유르디나 가문이라도 내게 손을 대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 말 그대로 쉽지 않았다.
바꾸어 말하자면 불가능하지도 않다는 뜻이었다.
북부인들은 본래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에 나설 때가 많았으니까.
그렇게 일말의 걱정을 미처 지우지 못한 채,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등지고 있었다.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강렬한 진홍빛의 눈동자, 그리고 금괴를 녹여 짜낸 듯한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까지.
늘씬한 팔다리와 고혹적인 여체의 곡선이 갑옷 너머로도 두드러졌다. 얼핏 보기에는 너무나 완벽해서, 도리어 조각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누구든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깨닫는다.
이글거리는 야망과 열망, 승리에 대한 집착이 뒤섞인 그 눈빛에 권태가 깃들어 있었다. 꿀처럼 뚝뚝 떨어지는 뇌쇄적인 매력.
그것이 그 완벽한 육신에 놀라울 정도의 생동감을 부여했다.
다소 피로한 안색이었으나, 그마저도 태양과 같은 그녀의 미모를 가릴 수는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무심코 입을 열고 말았다.
“델핀 선배……!”
“기다리고 있었어, 주인님.”
오늘만 벌써 두 번째 듣는 말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곧장 델핀 선배에게로 다가섰다.
그러면서 다시금 확신한 사실이 있었다.
델핀 선배는 조금 울적해 보였다.
그 원인은 알 수 없었으나, 델핀 선배의 마음이 좋지 않다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그렇지 않다면 벌써 나를 놀리려 들었을 터였다.
슬쩍 가슴골을 보인다든가, 아니면 은근슬쩍 엉덩이를 강조한다든가.
오늘은 그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델핀 선배는 장난을 걸 여유조차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래서 나는 살짝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늘 당당하고 도도하던 델핀 선배가 아니던가.
기운이 없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게 내가 무어라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려던 그때.
델핀 선배가 몸을 일으키더니, 곧장 팔을 내 목에 감아버렸다.
어어, 하는 사이 델핀 선배의 얼굴이 바로 내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힘없이 웃으며 내게 속삭였다.
"……잠깐만 침실로 올래?"
참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여러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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