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24화 (324/649)

〈 324화 〉 5. 빵과 비수(22)

* * *

델핀 선배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향긋한 체향에 정신이 아찔했다. 어느덧 내 목전에 놓인 델핀 선배의 오뚝한 콧날과 루비를 닮은 눈동자, 그리고 고혹적인 곡선을 그리는 입술까지.

이대로 두면 입을 맞출 것만 같았다.

델핀 선배는 그만큼 매력적인 여인이었으니까.

내가 이까지 악물어 가며 초인적인 인내심을 짜낸 이유였다.

“……안 됩니다.”

그럼에도 델핀 선배는 나를 지긋이 응시할 뿐이었다.

납득할 만한 사유를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언제는 ‘암노예’라더니, 시건방지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문 밖에 사용인과 가신들이 많습니다. 침실로 가는 도중에 누구 눈에 띄기라도 하면요?”

“으음, 내 약혼자라 소개할까?”

그 뻔뻔스러운 대답에 나는 결국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엘시 선배와 사생결단을 내고 싶으시다면야…….”

“응, 들었어. 그 계집애가 먼저 고백했다며? 아, 더더욱 끌리는데…….”

훗, 하고 델핀 선배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은 참을게. 당장 도움을 요청한 쪽은 나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보고 싶은걸? 소중한 사람을 뺏긴 그 애완견의 낯짝이.”

하여간 취향 한 번 독특한 여자였다.

내가 항복의 표시로 고개를 내젓자, 델핀 선배는 그제야 만족한 듯 서서히 내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과정에서 문득 깨달은 점이 있는데, 델핀 선배는 지금 갑옷을 입고 있었다.

물론 이는 처음 볼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기는 했다. 그러나 서로의 몸을 밀착시키다 보니 새삼스레 실감하는 점이 있었다.

그 탄력 있던 몸의 감촉이 조금도 전해지지 않았다. 단단한 촉감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차가운 금속이 여체를 감싼 탓이겠지.

나는 이에 옅은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델핀 선배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아카데미에서는 항상 제복만 입고 있던 델핀 선배였다. 그 때문인지 갑옷을 입은 모습이 유독 색다르게 다가왔다.

델핀 선배의 갑옷 차림은 수렵제 때 이후로 처음이었던가.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당시의 나는 워낙 무아지경에 빠져 있어서, 갑옷이고 뭐고 일단 박살내고 말았으니까.

델핀 선배의 손이 응접용 테이블을 향한 것은 그때였다.

잠시 추억에 잠겨 있던 나였으나, 그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 만큼 넋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의 제안에 응해 응접용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았다. 델핀 선배는 애초에 이러한 전개를 예상하고 있었던 듯했다.

쪼르륵, 하고 내 앞에 놓인 찻잔에 따스한 찻물이 가득 차는 것이 그 증거였다.

미리 차를 만들어 두었다는 뜻이 아닌가.

결국 나는 또 델핀 선배의 장난에 놀아난 셈이었다. 그 눈빛이 요염해 보이긴 했는데, 진심은 아니었을 터다.

델핀 선배가 내게 가진 감정은 연심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계산적이고 음습한 동경에 가까웠다.

서운하지는 않았다.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니까.

내 손이 자연스레 찻잔을 들었다. 향긋한 다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고급품이었다.

델핀 선배가 아니라면, 나는 구경도 못할 찻잎일 터였다. 최근 들어 수입이 급증하긴 했어도 사치품 따위에 거금을 지출할 각오는 없었다.

그럴 바에는 멋진 손도끼를 하나 마련하고 마리라.

그렇게 잡생각을 정리하며, 나는 델핀 선배에게 물었다.

“찻물은 하녀를 시켜도 되지 않습니까?”

“내가 주인님의 하녀잖아? 덤으로 노예기도 하고.”

느긋한 어조였다.

그리고 장난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음색이기도 했다. 델핀 선배는 진심으로 스스로를 나의 노예라 여기고 있었다.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 소리였다.

이 강건한 성채의 주인이 일개 시골 자작가의 차남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니.

세상에 알려저선 안 될 비밀이었다.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델핀 선배… 유르디나의 소가주로서 체면이 있지 않습니까.”

정론이었다.

백 번 양보해서 아카데미는 타지라 치더라도, 이곳은 유르디나가 군림하는 도시였다. 귀족이라면 제 영지에서 함부로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됐다.

이는 영지 전체의 명예와 직결되는 문제였으니까.

내가 아는 델핀 선배라면, 이쯤에서 적당한 타협을 보았을 터였다.

그녀는 귀족으로서의 자긍심이 무척 강했으니까.

단 둘이 있을 때만 ‘주인님’이라고 부르겠다거나, 혹은 다시 짓궂은 장난을 치면서 나와 맞먹으려 든다거나.

하지만 델핀 선배가 택한 전술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단지 사뭇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후후, 체면이라…….”

그녀가 힘없이 웃으며 찻물을 들이켰다.

델핀 선배답지 않았다. 이처럼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예전에 한창 나와 델핀 선배의 관계가 좋지 않았을 때가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때도 내 눈치를 살피며 몸을 덜덜 떨기 일쑤였는데.

당시보다는 멀쩡해 보이긴 했으나, 델핀 선배가 정상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했다.

아니라면 기운이 없을 턱이 없었다.

내가 걱정을 담아 바라보자, 델핀 선배는 내게 눈웃음을 돌려주었다.

요염하게 휘어지는 그 눈꼬리가 매력적이었다. 일순 심장이 두근거릴 뻔했지만, 나는 어떻게든 참아냈다.

그 눈빛이 어딘가 처연해 보였던 탓이었다.

“……그래서, 유르디나 시는 어땠어? 북부 최고의 대도시인데.”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말을 돌리고 싶은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의도가 숨어있는 건지.

나는 일단 델핀 선배의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그래봐야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흔해빠진 감상에 불과했지만.

“멋지던데요. 유르디나의 저력을 비로소 실감했습니다. 이 추운 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줄은 처음 알았거든요.”

“그래? 나는 잘 모르겠어, 사실… 어린 시절부터 이곳에서 지냈으니까.”

그와 동시에 델핀 선배의 눈이 자연스레 감겼다.

오래 전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고위 귀족이라도 즐거운 추억 하나나 둘쯤은 있을 터였다.

북부는 춥고 척박한 장소였으나, 델핀 선배의 고향이었다.

가진 바 애정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나는 참 말괄량이였지. 남의 말은 죽어도 듣지 않았거든, 그렇게 날마다 몰래 이곳저곳을 쏘다녔는데……”

“고생하는 가신들의 모습이 훤하네요.”

“맞아, 그때 알렉스가 나를 찾느라 고생 좀 했어… 한창 아버지의 신임을 듬뿍 받던 시절이었거든. 알다시피, 유르디나의 적통은 나 하나뿐이니까. 소중한 금지옥엽을 찾으려고 종일 내 이름을 부르짖고 다녔지.”

그 알렉스 경이 말인가.

나름대로 그림이 될지도 몰랐다.

그 단단한 육체의 소유자가, 목이 터져라 꼬마 영애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모습이라니.

물론 알렉스 경은 흑역사로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추억에 잠긴 델핀 선배가 몽롱한 고백을 이어갔다.

“되짚어 보면, 가문에 내 가출을 용인해 주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아.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유르디나 시의 주인이 될 운명이었으니까, 그 사정을 속속들이 알수록 좋잖아?”

“그래서, 그 덕은 잘 보고 계십니까?”

“응, 그랬지…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어.”

의미심장한 고백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곧 본론이 나오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말없이 찻잔을 기울이자, 뜨끈한 찻물이 식도를 달구었다.

델핀 선배는 그제야 다시 눈을 떴다.

그 핏빛 눈동자는 어느덧 서늘한 빛을 품고 있었다.

“최전선의 전황이 수상해.”

북부의 최전선.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두 세력의 정체는 뻔했다.

내 입에서 한숨 섞인 반문이 새어나왔다.

“……엘프 말입니까?”

“응, 그리고 유르디나의 문제이기도 하지.”

탁, 하고 델핀 선배가 찻잔을 탁자 위로 떨구었다.

진지한 어조가 이어졌다.

“정보가 너무 부족해… 엘프들의 공세가 너무 치열해졌어. 또 전력도 너무 늘었고, 무엇보다 유르디나 가문에 배신자가 숨어있을지도 몰라.”

‘배신자’.

그 세 음절이 지닌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나는 델핀 선배가 어째서 우울한 낯빛을 하고 있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가신들을 의심해야 할 판이었다.

피와 강철로 빚은 여인이 아닌 이상 마음이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안쓰럽다는 눈으로 델핀 선배를 바라보았다.

다만 의문점은 아직 남아있었다.

“너무 나간 추론 아닙니까? 단순히 엘프의 내부 사정으로 전황이 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어딘가에서 자꾸 정보가 새. 아니… 내게 오는 정보가 차단되고 있어.”

톡, 톡,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는 델핀 선배는 짜증마저 어린 눈빛이었다.

나로서는 더더욱 의문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르디나 가문은 군벌 아닙니까? 당연히 보고 체계도 명확할 텐데요. 정보가 차단되면 바로 그 원인이 걸러져야…….”

“관련자가 사라진다면?”

나는 입을 다물었다.

도주로 치부하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관련된 이들이 모조리 실종되었다면 이는 고의의 영역으로 보아야 했다.

내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았다.

“……내부 소행입니까?”

“정황상 그래. 그리고 나는 지금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고.”

후후, 하고 델핀 선배는 제 꼴이 우습다는 듯 자조를 흘렸다.

그녀의 몸이 푹신한 등받이를 파고들었다.

“바보인가, 나? 아카데미로 떠난 동안 가문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게 두다니… 아아, 수렵제에서 우승만 했더라도.”

불현듯 가슴을 푹, 찌르고 들어오는 말이었다.

그래, 그랬었지.

수렵제의 우승은 유르디나의 후계자들이 늘 거쳐 가던 위업이었다. 델핀 선배의 빛나는 정통성을 더욱 강화시켜 줄 트로피라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델핀 선배는 실패했다.

따지자면 델핀 선배가 모자란 탓이겠으나, 그 주된 원인이 나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옅은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노리고 한 말이 분명했다. 델핀 선배가 내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도와 달라?”

“주인님이 날 배신할 리는 없잖아? 그리고 남은 애들은 주인님을 배신할 리 없고.”

결론적으로 누구도 델핀 선배를 배신할 수 없는 연쇄의 완성이었다.

한참을 끙끙거려도 출구는 없었다.

어차피 미래에서 편지가 도착한 이상, 내가 이 사건에서 발을 빼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델핀 선배가 마음에 걸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체 해도 티가 났다.

델핀 선배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잠자코 델핀 선배의 안색을 살피던 나는, 이내 항복이라는 듯 두 손을 들었다.

“좋습니다. 도와드리죠, 대신…….”

델핀 선배의 핏빛 눈동자가 흘깃 나를 향했다.

또 무슨 말을 하나 지켜보겠다는 듯.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델핀 선배에게 말했다.

“기분 좀 푸시죠. 델핀 선배는 당당한 모습이 더 어울려요.”

그리고 침묵.

델핀 선배는 말없이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일순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난 뒤에야, 델핀 선배는 무어라 반응을 보여주었다.

“……풉.”

입을 가리면서,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나는 괜히 멋쩍어져서 헛기침을 했다. 어울리지 않은 위로를 한 탓인지 델핀 선배의 웃음소리가 조소처럼 들렸다.

그러나 다시금 나를 향하는 델핀 선배의 눈빛은, 옅은 즐거움을 담고 있었다.

“그건 힘들겠는데? 우리 주인님은, 아직 여자 꼬시는 실력이 부족한가 봐. 좀 더 마음에 드는 제안은 없…….”

“엉덩이 때려드릴까요?”

무심코 던진 제안이었다.

너무 노골적인 말에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델핀 선배도 내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멍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적이 이어질수록 괴로워지는 건 나였다.

결국 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 쥐며 말했다.

“아니, 싫으면 말…….”

“……아래쪽만?”

그 한 마디에, 나는 호흡을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내가 멍청한 시선을 보낼 차례였다.

델핀 선배의 눈동자는 어느덧 어떠한 욕망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탁, 하고 델핀 선배의 몸에서 갑옷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갑옷을 입고 벗기 위해서는 타인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값비싼 갑옷에는 탈착이 자유롭도록 마법이 부여되어 있기도 했다.

델핀 선배의 갑옷이 그 예였다.

갑옷이 탁, 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델핀 선배가 입고 있는 옷은, 얇은 내의뿐.

델핀 선배는 착 달라붙은 내의의 옷깃을 당겨 바람을 통하게 했다.

얼핏 보면 더위를 피하기 위한 행동처럼 보였으나, 그 고혹적인 미소와 가슴을 받쳐 한껏 가슴골을 강조시키는 모습을 보면 그 의도는 명확했다.

둔부를 슬쩍 뒤로 내빼며 델핀 선배는 제 도드라진 가슴 어림을 강조했다.

그리고 눈읏음을 지으며, 한 마디.

“주인님, 제 바보 같이 큰 젖가슴도 벌을 원해요… 오늘을 위해열심히 관리해서 때리는 맛이 있을 텐데. 부디 이 암노예의 소원을 들어주시겠어요?”

애원인지, 아양인지 모를 말이었다.

달뜬 숨결이 달콤한 소리를 흘렸다. 델핀 선배의 눈동자 또한 달구어져 애절한 빛을 품은 지 오래였다.

결국 나는 후우, 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어쩔 수 없었다. 델핀 선배를 위로해 주기로 했으니까.

그래, 결코 내 의지는 아니었다.

아마도.

그리고 나는 이후 델핀 선배의 침실을 찾아가기로 약속했다.

별다른 뜻은 아니었고, 자세한 사정을 듣기 위해서였다.

집무실보다는 심야의 침실이 더욱 밀회에 적합할 테니까.

그날 밤.

"안녕, 주인님."

심야의 침실, 나와 단 둘이 마주한 델핀 선배는 속옷 차림이었다.

나는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말았다.

그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며 새삼 깨달았다.

델핀 선배는 그대로구나.

아무래도 오늘 밤은 조금 길어질 것 같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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