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5화 〉 5. 빵과 비수(23)
* * *
델핀 선배의 침실로 향하는 길은 지난했다.
그 까닭은 몇 가지가 있었는데, 우선 유르디나 성이 너무 넓었다.
최근 출세가도를 걷고 있으나, 나는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했다. 인맥부터 시작해서, 어딜 가나 내 수준에 맞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다녔던 기억밖에 없었다.
여태껏 귀족들이 사는 곳이라 하면 ‘저택’ 정도밖에 보지 못했던 삶이었다.
느닷없이 ‘성’에 도착하니 그 규모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하급 귀족의 슬픈 한계였다.
애초에 나는 고위 귀족에게 초대를 받은 경험이 전무했으니까.
그러던 차에 델핀 선배의 편지를 받은 참이었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몇 단계나 건너뛴 셈이었다.
유르디나 가문은 북부에 오롯한 맹주였다. 심지어 제국의 5대 귀족 가문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 그 권세는 여타의 고위 귀족들과 비교가 불가능했다.
그 주인이 머무는 곳 또한 크고 웅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아카데미에서 적응한 기간이 있어 다행이었다.
물론 아카데미에도 ‘성’이라고 부를 만한 건물은 없었으나, 몇몇 연구동은 ‘저택’을 한참 넘어선 넓이를 자랑했다. 그래서 신입생 때 길을 찾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났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설픈 직감에 의존해서 기나긴 복도를 헤매야 했다.
더불어 나와 델핀 선배의 만남은 기밀 사항에 속했다.
가문의 배신자를 색출하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배신자가 누구든 간에 그 칼날의 행방을 깨닫지 못하는 편이 유리했다.
델핀 선배가 쥔 칼이 무엇인지도 알려지지 않는 쪽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실을 조심해야 할 까닭은 따로 있었다.
바로 나와 델핀 선배가 한창 때의 남녀라는 점이었다.
야심한 시각에, 결혼적령기의 남녀가 침실에서 단 둘이 밀회를 가진다?
어떠한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한 불상사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일전의 페르쿠스 저택에서 있었던 장면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탓이었다.
성녀와 묘한 분위기가 되었을 때, 식칼을 들고 찾아왔던 엘시 선배.
그때 그 새파랗게 타던 눈빛은 일말의 여지도 없이 진심으로 보였다.
구경꾼들이 몰려오지 않았다면 사달이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덧붙여 최근 들어 내게 알쏭달쏭한 거리감을 보이는 성녀까지 성에 머무르고 있는 판이었다.
결코 델핀 선배와 단 둘이 침실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괜히 엠마가 신경 쓰이기도 했고.
그래서 나는 빛을 피하는 그림자처럼 복도에 스며들어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갈팡질팡하다 도착한 곳이 델핀 선배의 침실이었다.
몇 번이고 명패를 확인한 나는 똑똑, 하고 문을 두드렸다.
까닭 없이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지금껏 델핀 선배의 침실에 쳐들어 간 적이 얼마든지 있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유르디나 성이 아직 내게 낯선 장소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노크를 한 이후에도, 방 안에서 들어오라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문이 저절로 열렸을 따름이었다.
짧은 식견으로는 이 또한 마법의 일종이 아닐까 싶었다.
하다못해 침실의 문마저 마법을 부여해 놓다니.
재력과 권력의 상징인 5대 귀족 가문이 아니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중 하나가 내 편이라니 한편으로는 든든하기도 했지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서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찰나의 평온이었다.
침실의 풍광을 눈에 담자마자, 나는 기겁해서 펄쩍 뛰고 말았다.
“아니, 델핀 선배. 무슨 차림이……!”
“쉿.”
델핀 선배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대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문은 열릴 때처럼 저절로 닫혔다. 은은한 조명이 비치는 방 안은 온전한 밀실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뒷걸음질조차 칠 수 없었다.
델핀 선배의 차림새는 색정적이었다.
그야 옷을 반쯤 벗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델핀 선배는 붉은 속옷으로 중요부위만 겨우 가리고 있었다.
새하얀 나신이 드러나자 눈 둘 곳을 찾기 힘들었다.
심지어 속옷은 얇은 재질이라 그 굴곡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더불어 은은한 조명 너머로 그 안쪽마저 슬쩍 비치는 듯했다.
남성의 음심을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다시 한 번 작게 소리를 내질렀다.
“옷, 옷 입어요! 아니, 외간남자 무서운 줄 모르고…….”
“주인님이 왜 외간남자야?”
그러나 정작 살결을 드러낸 당사자인 델핀 선배는 태연했다.
새하얀 손이 붉은 포도주를 담은 잔을 쥐었다. 다리를 꼰 채, 술을 홀짝이는 그 행위조차 뇌쇄적으로 보였다.
델핀 선배는 유혹하듯 슬쩍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당신 소유물이잖아? 그러니까 잘 봐 둬, 당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그래야만 하거든.”
물론 나로서는 어이가 없는 주장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델핀 선배의 반나체로부터 눈을 돌린 채, 허탈한 목소리를 중얼거렸다.
“델핀 선배를 가지겠다고 한 기억은 없는데요.”
“날 패배시켰잖아, 그리고 또 굴복시켰고.”
델핀 선배는 마치 당연한 진리를 설파하듯 담백한 어조로 말했다.
탁, 하고 어느덧 텅 비어버린 술잔이 식탁 위로 떨어졌다.
“그러니 가져야지. 나만하면 멋진 전리품 아니야?”
군데군데 구멍이 난 논리였다.
마음 같아서는 몇 마디를 더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우선 본론이 중요했으니 참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춤주춤 델핀 선배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델핀 선배는 자연스레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쪼르륵, 하고 잔이 채워지며 향긋한 주향이 퍼져 나갔다.
나신의 여인과 단 둘이 대작한다라.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했다. 오늘 밤 거사를 치를지도 모르겠다는, 본능적인 위기감이 뇌리를 치고 지나갔다.
아니, 위기감이 아니라 기대감일지도.
내 눈이 흘깃 델핀 선배의 몸을 훑었다. 언제 보아도 매력적인 여인이긴 했다.
물론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나는 탁, 하고 낯짝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해이해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벌써부터 흔들리면 앞으로가 더 큰일이었다.
델핀 선배는 그러는 내 모습을 보고 풋, 하고 살포시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다소 즐거워 보이는 눈빛이었다.
생글거리는 표정을 보아하니 나를 놀리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어쩌다 선배의 장난감으로 전락했는지, 내 신세가 처량했다.
답답한 마음에 나는 포도주를 쭉 들이켰다.
델핀 선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몇 마디를 던졌다.
“멋진데? 북부에서는 잔에 따른 술을 한 번에 마셔야 하거든… 그래야 남자답다는 말을 들어. 북부의 사윗감으로 나쁘지 않겠네.”
“그만 놀리시죠.”
탁, 하고 술잔을 내려놓으며 던진 말이었다.
나는 얼근히 올라오는 포도주의 주향을 느꼈다.
식도를 타고 올라와, 코끝으로 뻗치는 그 향긋한 증기.
좋은 술이었다. 델핀 선배가 즐기는 것이었으니 당연하겠지만.
나는 최대한 그 감각에 집중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야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델핀 선배의 나신이 지워질 것만 같았다.
“그보다 ‘배신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델핀 선배는 재미없다는 듯 흐응, 하고 콧소리를 흘렸다.
잔에 담긴 술을 빙빙 돌고 있었다. 아직 고민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인내심 있게 델핀 선배의 말을 기다렸다.
그 시간이 보답 받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최전선으로 향해 줘.”
예상하고 있던 내용이었다.
나는 기나긴 숨을 내뱉었다.
또 온갖 고생을 할 생각을 하니 술이 고팠다. 나는 술병을 낚아채 술잔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위장으로 쏟아지는 술.
델핀 선배는 나른한 목소리를 이어갔다.
“최근 침엽수림에서 엘프들이 빠져나오는 일이 잦아지고 있어. 그리고 마을을 습격하는 빈도도… 유르디나 가문이 막아야 해. 작은 영지들은 여력이 없어.”
“배신자 색출 작업은 어떻게 진행하면 됩니까?”
“정보가 끊기는 지점은 대개 엘프들의 마을에 대해서야. 아직까지 자세한 동향이 파악되지 않았어, 최근 제국 첩보부가 움직이긴 했는데…….”
델핀 선배의 진홍빛 눈동자가 슬쩍 나를 향했다.
잔잔하고 깊은 눈빛이었다.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눈동자였다.
“혹시 내게 전해줄 정보 없어?”
또 어디서 정보가 새어나간 걸까.
일순 네리스 선배를 향한 의심이 꿈틀거렸으나, 자세히 되짚어 보니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델핀 선배가 내게 굳이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델핀 선배는 북부 사람이었다. 쓸데없는 확인 과정을 좋아하지 않았다.
네리스 선배에게 제국 첩보부의 연락망을 가동하라고 했었는데, 아마 그때 낌새를 눈치 챈 모양이었다.
북부의 첩보원들도 엘프들의 사교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을 테니.
나는 순순히 델핀 선배에게 아비앙으로부터 들은 정보를 털어놓았다.
어차피 새로운 사실도 아닐 듯했다. 엘프들 사이에 퍼진 사교의 규모는 무시하지 못할 수준으로 보였으니까.
내 짐작대로 델핀 선배는 딱히 극적인 반응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우리가 수집한 정보랑 비슷하네… 그런데 정작 엘프들이 어디에 모여 살고 있는지, 그리고 사교가 어디에서 번성하고 있는지는 정보가 없어.”
“단순히 엘프들의 입이 무거울 가능성은요?”
“수백이나 되는 엘프들이?”
타당한 반론이었다.
나는 곧장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하기야 델핀 선배는 이미 엘프들의 습격 빈도가 잦아졌다고 말한 바 있었다.
습격이 잦아진다는 뜻은, 그만큼 침엽수림을 벗어나는 엘프도 많아진다는 뜻이었다.
유르디나 가문이 생포한 엘프들의 수도 그에 따라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백이나 되는 엘프 전원이 비밀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법 같은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정답은 하나뿐이었다.
“……결국 믿을 만한 사람이 정탐을 가야 한다?”
“위험한 임무이기는 해.”
엘프들의 동향을 살피는 임무였다.
당연히 적진의 한복판으로 침투해야 했다. 위험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럼에도 델핀 선배는 조금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주인님밖에 맡길 사람이 없는 거지만.”
나름대로 고민을 거친 인사일 터였다.
델핀 선배의 낯빛에 어린 피로가 이를 증언하고 있었다. 믿고 있던 가신들을 의심해야 하는 이 상황, 델핀 선배가 가장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 또한 고향에서 내 가족들을 의심해야 했다. 그날의 경험이 뼈아프게 새겨져, 나는 델핀 선배의 나약한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암흑교단은 어차피 내 적이었으니까.
델핀 선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물론 그에 합당한 보상은 할게. 내가 곧 당신의 소유물이니, 뭘 가져가도 할 말은 없겠지만…….”
“필요 없습니다.”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핏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델핀 선배는 반쯤 식탁에 엎어져 있는 상태였다. 내 앞에서 이토록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델핀 선배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없었다.
단지 그녀의 편이 세상에 하나쯤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델핀 선배 일이잖아요.”
짧고 명료한 언어였다.
사실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하지 않기도 했다.
델핀 선배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잠깐 떨구었다.
그리고 잠시 후.
델핀 선배는 취기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돼?”
그 음색이 애달프게 느껴져,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델핀 선배가 다시금 고개를 든 것은 그때였다.
슬픈 미소를 머금은 델핀 선배의 낯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멎으며 모든 감각이 눈앞의 여인에게 집중되는 그 느낌.
여인은 지금 제 연약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사실이 어떠한 말과 행동보다도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오늘, 함께 자자.”
예전부터 리아에게 자주 듣던 말이었다.
다만 델핀 선배는 그처럼 귀여운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겠지.
어설픈 착각이 아니라면, 그 함의는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잠자리를 갖자는 뜻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나는 여인에게 그러한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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