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26화 (326/649)

〈 326화 〉 5. 빵과 비수(24)

* * *

내 주변에서 여자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레토였다.

그는 잘 생긴 외모와 화려한 언변을 자랑했다. 온갖 여자를 건드리고 다니기엔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래서 레토의 행적에는 설왕설래가 떠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연인의 여동생과 바람을 피웠다든지.

절벽 위의 꽃처럼 여겨지던 교수와 하룻밤을 보냈다든지.

아니라면, 레토를 짝사랑한 여인이 자살소동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대개는 과장이 곁들여진 소문이었지만, 몇몇 풍문만큼은 거짓 하나 보태지지 않은 진실이었다.

참고로 위에 나열했던 이야기들이 이에 해당했다.

내 친구였지만, 레토의 여성 편력만큼은 변호가 불가능했다.

이처럼 난잡한 인간관계는 비극을 불러오는 법이었다.

내 친구 레토도 그 예외는 되지 못했다.

그는 청춘을 멋대로 구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친한 친구와 관계가 끊어지고, 미행을 당하는 것쯤은 예사였다.

칼에 찔릴 뻔한 적도 몇 번인가 있었다.

고학년이 되며, 레토가 대부분의 이성 관계를 정리한 까닭은 그 탓일지도 몰랐다.

물론 말은 학문에 집중하고 싶었을 뿐이라고는 했다. 그것이 허세인지, 혹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레토는 속내를 숨기는 데 능했으니까.

다만 분명한 점은 하나 있었다.

그 이후로 레토가 잠잠해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그 천성이 어디 가지는 않는지, 그는 이따끔씩 여자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놓곤 했다.

그 대부분은 레토의 경험담이었다.

남에게는 함부로 밝히지 못할, 레토의 솔직한 심정들.

그 수많은 이야기 중에는 하룻밤의 불장난에 대한 것도 있었다.

이에 대한 레토의 감상은 담백했다.

“허무하던데.”

높낮이조차 얼마 없는 황량한 음색이었다.

그때 나는 레토의 맞은편에 앉아 음료를 빨대로 빨아먹던 참이었다. 내 시선이 의문을 담아 흘깃 레토를 향했다.

여자를 밝히는 레토치고는 의외의 말이었다.

하룻밤 불장난쯤은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그렇게 고백하는 레토의 안색은 다소 울적해 보였으니까.

나는 친구의 우울한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맞장구를 쳐주기로 했다.

“허무하다니? 언제는 책임 없는 쾌락이 최고라며.”

“당연히 그 신념에는 변함이 없지. 단지 그, 뭐라고 할까…….”

레토는 마땅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는지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그 짜증스러운 손짓에서 그의 불쾌한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레토는 레토였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달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는 말이지, 내가 여자를 도구로 볼 수 있을 줄 알았거든? 마치 쾌락을 위한 일회용품처럼… 그런데 막상 해보니 아니더란 말이지.”

“그래도 너한테 아직 사람의 마음이 남아있긴 하구나.”

그 놀라운 발견에 나는 성호를 긋고 말았다

‘임마누엘’, 내가 그렇게 덧붙이자 레토는 더욱 떨떠름한 낯빛을 했다.

물론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실제로 레토가 무수한 여인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레토도 이에 대해서는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였다. 다만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못 다한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야, 네가 겪어봐야 안다니까? 그 짓거리가 끝나고 옆에 눕는데, 그때 딱 정신이 되돌아오더라고…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이 스쳐. 도대체 내가 얘랑 뭘 하고 있는 거지?”

“그야 욕망에 패배했으니까…….”

“닥치고 들어 봐, 좀.”

레토의 목소리에 슬슬 짜증이 어리고 있었다.

이대로 더 자극하면 진짜로 화를 낼 것 같아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레토는 다소 편안해진 음색으로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래서 내 결론은 이거야. 새 여자도 좋지만, 그 전에 좀 더 밀도 있는 감정의 교류가 있을수록 좋다는 거지. 물론 시간이 촉박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참으로 레토다운 결론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아니, 허무하다며? 그럼 자지 않으면 그만이지…….”

“미쳤냐?”

그러나 내 조언은 곧장 극적인 저항을 맞이해야 했다.

레토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 차려놓은 밥상을 어떻게 안 먹어?”

그때는 욕망에 미친 짐승이 하는 소리라 받아들였는데.

나는 이제야 레토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그는 성욕의 화신 따위가 아니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남성이었을 따름이었다.

지금의 나처럼.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취기가 오른 탓일 수도 있고, 지금껏 참아왔던 욕구가 한계에 달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델핀 선배의 유혹을 견뎌내기는 힘들었으니까.

다만 그 원인이 어찌되었든 결과만큼은 명확했다.

푹신한 침대 위에, 델핀 선배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내가 덮치듯 엎어진 모양새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꼴이었다.

취했나.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너무 컸다. 델핀 선배의 탄력 있는 가슴 위로 내 손이 포개어져 있었다. 코끝을 함뿍 덥히는 달콤한 체향에 나는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델핀 선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만 거칠어진 숨으로, 나를 애절한 눈빛으로 올려다 볼 뿐이었다.

나로서는 그 속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델핀 선배는 나와 자고 싶은 걸까.

너무나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그 이전까지 델핀 선배는 짓궂은 장난을 하는 듯 보였다.

온갖 의문들이 웅웅거리며 머릿속에서 공진을 시작했다. 나는 무어라 묻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려다가, 결국 포기했다.

델핀 선배의 팔이 내 목을 휘감았던 탓이었다.

옅게 헐떡이는 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망설이지 마.”

마치 내 속내를 읽어내기라도 한 듯 던진 말이었다.

나는 우뚝 멎은 손길에 떨림이 이는 것을 느꼈다.

델핀 선배는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작 하룻밤일 뿐이잖아… 기나긴 인생의, 아주 짧은 하루.”

구슬픈 설득이었다.

내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델핀 선배의 젖가슴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며, 부드럽고 탄력 있는 감촉을 전달했다.

델핀 선배는 그제야 작은 신음을 흘렸다.

“나, 잠깐이라도 잊고 싶어. 아무것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주인님이 그렇게 만들어 줄래?”

내 이성의 끈이 다시금 끊어졌다.

내 손이 델핀 선배의 속옷을 헤집었다.

가슴을 가리고 있던 얇은 천이 얼마 지나지 않아 벗겨졌다. 자세한 방법은 알지 못했지만, 나는 익스퍼트에 이른 실력자였다.

힘을 주면 속옷 따위가 견뎌낼 수는 없었다.

그만큼이나 내가 흥분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언제나 보아왔던 새하얀 가슴골을 넘어, 그 풍만한 곡선이 제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나는 찰나의 기억에 감탄하고 말았다.

아직도 뇌리에 인상이 남아 있었다.

델핀 선배와 처음으로 대작을 했던 날, 나와 델핀 선배는 손도끼와 비수를 휘두르며 겨루었다. 그때 나는 잠깐이나마 델핀 선배의 나신을 보았다.

도화지를 닮은 우윳빛의 살결과, 연분홍빛 첨단.

내가 보았던 그대로였다.

차이점이 존재한다면, 당시의 델핀 선배는 손도 댈 수 없는 꽃이었다는 점이었다.

어쩌다 그 탐스러운 육체를 엿보았으나, 감히 건들 엄두조차도 내지 못하던 여인.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도리어 델핀 선배는 내게 애원하고 있었다.

제 육체를 마음껏 희롱해서, 뇌리를 새하얗게 표백시켜 달라고.

그저 암컷이고 싶다고.

이를 거부할 수 있는 사내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를 포함해서.

델핀 선배는 살풋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당신이 처음이야.”

무엇이, 라고 멋없이 되묻지는 않았다.

소중한 첫 경험을 내게 주어도 괜찮겠냐는, 흔해빠진 의문조차도 삭제됐다.

나는 단지 델핀 선배의 애절한 눈빛에 응해 주어야겠다는 생각만을 했다.

꾸욱, 하고 델핀 선배의 젖가슴을 쥐어짜자 달뜬 신음이 새어나왔다.

“흐읏, 으응……!”

델핀 선배가 이토록 연약한 소리를 낼 수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나는 반쯤 넋을 놓은 채 델핀 선배를 감상했다.

손에 힘을 줄 때마다, 그 형태를 뒤바꾸는 탄력 있는 살덩이.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달콤한 신음을 흘리는 여인의 낯.

허벅지를 바짝 붙이고, 자극에 움찔거리는 여체까지.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어설픈 손길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젖가슴부터 시작해서, 그 첨단으로 올라올 때까지 손은 덜덜 떨면서도 강한 압박감을 선사했다.

아파야 정상이었다.

어떠한 여인도 이처럼 은밀하고 내밀한 곳을 단련할 수는 없었다. 그 보드라운 살결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옅은 신음을 흘리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델핀 선배는 통증을 호소하지 않았다.

도리어 기쁨에 젖은 목소리를 돌려줄 정도였다.

“읏, 흐윽! 조, 좀 더어…….”

달구어진 애원이 진홍빛 눈동자에 어려 있었다.

눈동자의 색마저 선정적인 여인이었다.

들끓는 감정이 욕망으로 토해진다.

“좀 더, 좀 더 나를 망가트려 주… 흐으윽?!”

꾸욱, 하고 힘을 주며 첨단을 비틀자 델핀 선배의 등이 휘어졌다.

지금껏 보아온 반응 중에서는 가장 극적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델핀 선배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서로의 숨결과 숨결이 뒤섞이는 거리.

숨소리마저도 달콤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일말의 망설임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하는 것이 옳은가?

문득 성녀와 함께했던 나날이 떠올랐다.

그 온화한 미소와 까칠한 태도, 우쭐거리다가도 금세 얼굴을 붉히던 그녀.

나는 그 순결한 육체에 손을 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엘시 선배가 떠올랐다.

내게 진심을 털어놓으며 고백하던 사랑스러운 선배, 난생 처음이었다.

그 외에도 떠오르는 이들이 너무나 많아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내가 머뭇거리고 있을 찰나.

“말했잖아.”

훅, 하고 달콤한 음색이 코끝에 끼친다.

델핀 선배는 닿을 듯 내게 입술을 가까이 한 채 말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자고…….”

그리고 스르륵 여인의 눈이 감기고.

입술이 겹치고.

혀가 뒤섞이며, 말초적인 자극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을 무렵.

신기하게도, 델핀 선배가 옳았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직 밤은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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