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0화 〉 5. 빵과 비수(28)
* * *
여인의 사고가 뒤죽박죽 헝클어졌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직후의 일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 앞을 도망치듯 벗어나고 말았다.
충격의 잔향으로 걸음걸이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걷고 걸어, 비로소 제 침실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그녀는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그 행위는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이해가 불가능했다.
두 남녀가 서로 살을 맞대고, 신음과 교성이 뒤섞이는 그 광경은 상상 이상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태껏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장면이었다.
그래,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생식 본능은 모든 생물이 지니고 있는 욕망이었다. 한창 때의 남녀가 눈이 맞아 하룻밤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 사내가 여인의 짝사랑 상대만 아니었다면.
묵묵하고 무게감 있던 사내였다. 함부로 정조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이는 여인이 사내에게 지닌 신뢰의 크기만큼이나 당연한 진실이었다.
그런데 왜?
왜 그는 유르니다 가문의 차기 가주와 몸을 겹쳤을까.
온갖 가능성이 넝쿨 뿌리처럼 뇌리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하고 고민해도 답이 나올 리는 없었다.
단지 가장 유력한 추론을 하나 도출해냈을 뿐이었다.
이안 페르쿠스와 델핀 유르디나는 연인 관계다.
그 한 문장을 떠올린 순간, 여인은 한동안 호흡을 하지 못했다.
가슴이 꾸욱, 하고 조이며 맹렬한 통증이 뇌리를 찌르고 들어왔다. 눈물이라도 찔끔 짜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럴 리가, 만일 그랬다면 풍문이라도 돌았어야 하는데.
여인은 어쩌다 잠을 설쳤던 과거를 후회했다.
낯선 장소의 적막이 유독 생경하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기분 전환 삼아 침실을 나서니, 바깥은 어둑하고 고요했다.
어떠한 직감이 그녀를 지배한 것은 그때였다.
지나치게 인기척이 없었다.
특정한 복도만이 그랬다. 띄엄띄엄 경비들이 서 있긴 했으나, 그 경계의 수준이 유독 낮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여인은 어느새 그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그 때아닌 열풍이 불어닥치던 방 안의 풍경을.
오래된 얼룩처럼 스며들어 끝없이 반복되는 그 지옥 같은 악몽을.
여인의 숨이 턱턱 막히고, 이불을 뒤집어써도 기억을 잊을 수는 없었다. 괴로운 마음만 더해가며, 그녀는 신음했다.
다만 의문이 하나 들긴 했다.
그렇게 좋았을까.
유르디나의 차기 가주는, 슬쩍 문 밖을 돌아보며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인은 그 잔혹한 호선을 마주하며 깨달았다.
저 암컷이 진정으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노라고.
쾌감에 겨운 교성에서는 한 줌의 가식이나 거짓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인은 누군가가 그토록 흐트러지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감각이었다.
물론 그녀도 여자였다.
사랑하는 사내에게 순결을 바칠 날이 찾아오리란 점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얼핏 그 미래를 구상해 보기도 했으나, 설마 이토록 노골적인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야 할까?
하지만 두 사람의 밀회를 훔쳐보았다고 고백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어째서 말없이 염탐하고 있었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었다.
단지 머리가 새하얬노라고.
아무런 감상조차 품을 수 없었다고 말하면, 믿어줄까.
그날 밤 여인은 밤이 새도록 잠에 들지 못했다.
다만 끝없이 그 괴로운 기억 속을 복기하다가, 저도 모르게 슬쩍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흐읏.”
질척했다.
속옷 너머로도 알 수 있을 만큼.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좆됐다.”
짧고 담백한 한 마디였다.
지금 내 심정을 그보다 잘 요약할 수 있는 표현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지끈거리며 뇌를 파고드는 숙취를 마력으로 태워 버렸다.
슬그머니 눈을 옆으로 돌리니, 그곳에는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미녀가 누워 있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달콤했다. 오똑한 콧날과 갸름한 턱선, 그리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여인의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그 몸의 굴곡은 또 어떤가.
두터운 이불에 가려졌으나, 전날 밤에 보았던 그녀의 나체는 예술품에 가까웠다. 여인의 증언에 따르면, 이를 눈에 담은 이는 내가 유일하다고 했다.
그 탄력 있는 살결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전날 밤 미친 듯이 서로 몸을 겹쳤던 상대였다. 내가 품은 감상은 복합적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잠시 델핀 선배의 얼굴을 감상했다.
그토록 도발적이던 여인인데, 얌전히 잠든 얼굴은 너무나 순결해 보였다.
그 순결을 내가 빼앗은 것이 바로 어젯밤의 일이었지만.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카데미 중하위권에 불과한 시골 자작의 차남이었다. 그 첫 상대가 무려 그 유르디나의 차기 가주라니.
심지어 그 미모도 빼놓을 데가 없었다.
나는 상반신을 일으키며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아직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또 전날 밤 멋대로 델핀 선배의 안에 정을 토해냈던 참이었다.
당연히 책임을 지는 것이 도리였다.
내가 그렇게 마른세수를 하고 있던 그때.
“으응…….”
델핀 선배가 옅은 신음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잠시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던 그녀는, 이내 살풋 미소를 머금었다.
애정 어린 상냥한 미소였다.
“안녕, 주인님.”
어제 몇 번이고 몸을 겹친 사이였는데.
그 미소를 보니 다시금 델핀 선배를 덮치고 싶은 충동이 차올랐다. 물론 술기운을 전부 몰아낸 뒤라, 무심코 그녀를 덮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단지 쑥쓰러운 마음에 시선을 피했을 따름이었다.
델핀 선배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어젯밤이랑 너무 다른데?”
“아니, 그때는 좀 흥분해 가지고…….”
나는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으려다가, 이내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또 무슨 핑계를 댄단 말인가.
결국 나는 진지한 어조로 델핀 선배에게 말해야 했다.
“어찌됐든 간밤의 무례에 대해서는 사죄드립니다. 그, 여인의 순결을 빼앗았으니 당연히 그에 따른 책임도…….”
“괜찮아.”
그러나 각오를 다지던 내 노력이 옹색하게도, 델핀 선배의 반응은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내 눈동자가 의문을 담아 델핀 선배를 향했다. 그러자 델핀 선배는 싱긋 미소를 머금으며, 고혹적인 눈빛을 했다.
하품을 하며 슬쩍 팔을 이불 밖으로 빼는 몸짓마저 교태로웠다. 여인의 젖가슴이 다시금 내 눈에 들어왔다.
어제 저 양감 넘치는 살덩이를 얼마나 만져댔던가.
나는 다시 간밤의 추억에 젖어 멍해졌다.
“말했잖아? 기나긴 인생의, 아주 짧은 하루일 뿐이라고… 또 내 잘못도 있으니까, 하룻밤 가지고 질척거릴 생각은 없어.”
끄응, 하고 내 입에서 고심에 잠긴 신음이 새어나왔다.
델핀 선배는 나를 보며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여인의 입에서 느닷없는 고백이 흘러나온 것은 그 직후였다.
“나 말이야, 줄곧 혼자라고 생각했거든.”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몸이 가까워진 만큼 마음의 거리도 한결 가까워진 덕일까.
델핀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게 꽁꽁 숨겨두었던 본심을 털어놓았다.
“가족조차 이용해야 했던 인생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믿고 지내던 가신들마저 의심해야 하니, 여러모로 울적한 마음이 들더라고… 부하 관리도 못하는 모질이, 그리고 주인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멍청한 계집애.”
“……델핀 선배.”
헛된 걱정이라고.
델핀 선배는 이미 충분히 유능하고 뛰어나다고 말해 주고 싶었으나, 나보다는 여인의 반응이 더 빨랐다.
그녀가 애처로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만해 달라는 의미였다.
나는 차마 그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젯밤은, 난생 처음으로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그래서 고마워, 주인님… 이제 좀 나아졌어.”
그 말처럼 델핀 선배의 기분은 한결 나아 보였다.
응어리진 감정이 풀려 후련해지기라도 한 표정이었다.
나는 얼마쯤 침묵을 지키며 델핀 선배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길 수도 있으니 우선은 책임을…….”
“좋네, 그럼 벌써 유르디나의 다음 후계자도 정해진 건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묻는 나와 달리, 델핀 선배는 여유룝기만 했다.
본래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나는 다소 아리송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델핀 선배는 진심으로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임신이란 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거든, 뭐… 내게도 믿는 구석은 있고. 그리고 또, 어차피 책임이라면 어제 많이 졌으니까.”
나는 흐,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밤이 긴 만큼 내가 많이 애를 쓰기는 했다. 종래에는 그 델핀 선배가 기절했을 정도였다.
“밤새 괴롭히기는 했죠.”
“그리고 술도 한 잔 더 하고, 주인님 입에 있던 술이라 그런가 각별하던데?”
황홀한 시간이었다.
그 이상으로 마음이 무거워서 그렇지, 전날 델핀 선배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간밤의 기쁨이 더 크다고 느끼고 있었다.
델핀 선배가 한 마디를 덧붙이기 전까지는.
“또, 그 주인을 뺏긴 강아지 같은 표정이란…….”
키득거리며 내뱉은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골똘히 회상에 잠겼다.
전날 내가 그랬던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되짚어 봐도 마땅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델핀 선배에게 되물어야 했다.
“……무슨 표정이요?”
“주인 뺏긴 강아지 같은 표정 말이야… 아, 어제 말 안 했던가? 어제 누가 훔쳐보고 갔거든. 설마 대놓고 내 명을 어길 사람은 없으니 유르디나 사람은 아니고, 아마 네가 데려온 일행 중 하나가 아닐까.”
델핀 선배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뱉은 그 말.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망연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고?
결국 나는 울컥거리며 치솟는 의문을 참아내지 못했다.
“아니, 그럼 그때 말을 했어야……!”
“누구 좋으라고?”
그러나 델핀 선배는 코웃음을 치며 내 분노를 일축할 뿐이었다.
“그럼 그만둘 생각이었어? 이미 우리는 몸을 겹쳤고, 상대는 그 광경을 그대로 목격했는데… 그때 말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졌을까.”
논리적인 반박이었다.
그래서 나는 들불처럼 타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델핀 선배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디 한 번 노력해 봐, 정 갈 곳이 없으면 내 곁으로 오고. 내 몸은, 언제나 주인님 거야.”
나는 무어라 말이라도 하고 싶어 입을 열었다가, 결국 다시 다물었다.
델핀 선배의 말이 옳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늦은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 델핀 선배가 나를 달래려는 듯, 아양을 떨기도 했다.
"우리 주인님, 말로는 화가 났다는데……."
더듬거리며, 내 사타구니에 닿은 가녀린 손길.
나는 움찔 몸을 떨었으나, 델핀 선배의 고혹적인 눈빛을 보고 저항을 멈추었다.
이제 와서 몸을 빼기도 우습던 차였다.
"몸은 솔직하네?"
그리고 바짝 내게 몸을 붙이며, 달콤한 살내음과 함께 와닿는 속삭임.
"주인님, 저 아침 식사가 하고 싶은데……,"
내게 거절할 명분은 남아있지 못했다.
"……입으로 해드릴까요?"
그 후 얼마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델핀 선배의 침소를 나설 수 있었다.
마음 한 켠에 새로운 걱정을 담아두고서.
도대체 누가 나와 델핀 선배의 정사를 훔쳐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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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고민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전장이란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생명체와 같았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만큼이나 정보가 중요한 장소라는 뜻이기도 했다.
내가 맡은 임무는 유실된 정보의 재확보와 배신자 색출이었다.
시급을 요하는 일이었으므로, 나와 일행은 지체 없이 최전선으로 향해야 했다.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마음에 품은 채로.
나를 둘러싼 여인들의 태도가 다소 수상해지고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엘시 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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