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1화 〉 5. 빵과 비수(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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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는 어딜 가나 척박한 땅이었다.
그나마 유르디나 시의 남부에서나 밀 농사가 지어지는 정도였다. 이를 제외한 대개의 장소에선 구황작물만을 가까스로 수확했다.
풍족한 곳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삶이었다.
내 고향은 대륙 동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기후가 온난하고 강수량이 많은 동부는 예로부터 대륙의 곡창지대로 유명했다.
가혹한 영주를 만나지 않는다면 양민도 끼니를 굶지는 않았다. 유일한 걱정거리는, 인구가 많은 만큼 고아도 많다는 점뿐이었다.
물론 나 또한 동부의 귀족으로서 고아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동부의 식량 사정이 안정적이긴 하나, 버림받은 아이들까지 먹일 여력은 없었다. 수많은 아이의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귀족으로서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북부의 침엽수림을 앞에 둔 이후, 나의 비좁은 세계관은 중대한 수정을 거쳐야만 했다. 내 오랜 고민거리는 북부에서 문제조차 되지 못했다.
북부에는 고아 자체가 얼마 존재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 까닭은 명쾌했다.
“모두 죽거든요.”
내게 군영을 안내하던 병사가 농담이라도 되는 양 던진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나와 일행은 침묵을 택해야 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가늠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정과 연민을 표해야 할지, 혹은 웃어 넘겨야 할지.
정답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부모를 잃은 아이는 죽는다.
이는 북부에서 상식이나 다름없는 명제라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내뱉을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특별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단지 병사는 담담히 북부에서의 삶을 늘어놓았다.
“북부는 인구가 많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주인 없는 땅이 지천에 널려 있다는 뜻이죠. 아무도 그곳을 관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수밖에요.”
나는 그제야 병사의 의도를 이해했다.
이어질 말도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맞장구 삼아 조심스레 되물었다.
“예컨대, 마수나 도적 같은?”
“네, 그리고 엘프까지.”
병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추론이 대체로 옳다는 의미였다.
병사가 굳이 지목한 ‘엘프’라는 적까지 포함해서, 북부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나도 많았다. 보호자를 잃은 아이가 홀로 생존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심지어 북부에는 식량조차 부족했다.
그러니 고아가 문제가 될 턱이 없었다.
굶어죽거나, 얼어죽거나, 살해당하거나.
부모가 있는 아이마저 태반이 죽어나가는 땅이었다. 지극히 운이 좋은 몇몇 아이를 제외하면 고아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병사는 특히 최전선에서 아이들의 시체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눈동자에 흐릿한 살기가 어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대개는 엘프들의 소행입니다. 그 괴물들은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거든요… 북부에서 살아가다 보면, 글자보다 먼저 엘프를 향한 증오를 깨우치곤 합니다.”
“최전선이 아닌 곳도 그렇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북부에는 빈 땅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병사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군영의 너머, 북부 중에서도 최북단으로 나아가는 길.
그곳에는 광활한 나무의 대지가 위치하고 있었다. 이끼마저 뿌리를 내리기 저어하는 곳에 우뚝 선, 수만에 이르는 나무의 행렬들.
대륙을 통틀어 이토록 나무가 많은 곳은 단 두 곳뿐이었다.
남부의 대수림과 북부의 침엽수림.
그리고 이곳은 북부였으므로, 내 시야를 압도하는 이 숲의 정체는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침엽수림. 영원한 동토로 향하는 길목을 가로막는 마지막 장애물이었다.
시야를 가득 메운 이 나무들조차 그 자그마한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북부의 숲은 많은 것을 감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숲을 들여다 볼 수 없고, 단지 숲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목도할 뿐이죠.”
그리고 그 모든 경계를 지키기엔 침엽수림이 너무나 넓었다.
수만에 이르는 정병을 동원한다 한들 이곳을 빈틈없이 통제할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이를 깨달은 내 입에서 한숨 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애초에 봉쇄가 불가능한 곳이군요.”
“그렇다고 숲을 모조리 불태울 수도 없는 노릇이죠.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괴물들이 단번에 쏟아져 나올 테니.”
나는 병사의 설명을 들으며 묵묵히 침엽수림을 바라보았다.
아비앙도 이 나무 그림자 속에 숨어 빠져나왔으리라.
숨소리조차 흐트러트리지 못했을 터였다. 그랬다가는 마수에게 들켜, 비명횡사할 위험이 있었으니까.
참 역설적인 이야기였다.
병사는 엘프와 마수를 통틀어 ‘괴물’이라 통칭하고 있는데, 정작 그 괴물 중 하나는 또 다른 괴물을 무서워하고 있다니.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병사에게는 그럴 터였다.
마수나 엘프나 그들의 목숨을 위협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했으니까.
하지만 아비앙과 대화를 나누었던 내가 품은 감상은 달랐다.
마수와 엘프는 다르다.
마수는 말이 통하지 않지만, 엘프는 말이 통했다. 그리고 마수와 달리 엘프는 생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의를 표출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침엽수림의 엘프들 또한 마수들과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을 터였다. 그러다 죽어가나는 이들도 수두룩하겠지.
물론 싸구려 동정에 불과했다.
엘프는 제국의 적이었고, 인류와 엘프의 공존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수백 년이나 이어진 전쟁의 여파가 너무 컸다.
이제는 서로를 향한 증오와 살의를 멈출 수 없으리라.
그래서 나는 엘프를 향한 흐릿한 호의라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유념했다. 이미 가족이나 전우를 엘프에게 잃은 이들 앞이었다.
괜히 그들의 빈축을 살 이유는 없었다.
다만 나는 그에게 감사를 담은 악수만을 건넸을 뿐이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머무를 천막은 알아서 찾아갈 테니, 이만 돌아가시죠.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대륙에 위명이 쟁쟁한 이안 경을 뵈어 영광이었습니다. 부디 그 솜씨를 악마 같은 엘프 놈들에게 보여주시기를…….”
그 진심 어린 당부를 끝으로 병사는 떠나갔다.
그는 임시로 나를 수행하러 온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유르디나 가문에서 정식으로 파견한 가신이 찾아온다고 들었다.
침엽수림을 둘러싼 군영은 한둘이 아니었다.
수십에 이르는 군영에는 각각 수백 명의 병사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침엽수림의 통제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였는데, 각 군영의 위치는 비밀이었다.
오직 유르디나 가문의 충직한 가신만이 그 위치를 파악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나는 예외적으로 각 군영의 위치가 필요했다.
정확히 어디에서 정보가 유출되는지 파악할 수 없을뿐더러, 침엽수림에 침투하는 과정에서 군영을 옮겨 다닐 필요가 있을지도 몰랐던 탓이었다.
그러니 델핀 선배는 특별히 나를 보좌할 가신을 파견해 주기로 한 것이다. 유르디나 가문에 오랜 충성을 바친, 각 군영의 위치를 모두 외우고 있는 자로.
그조차도 감시하고 의심해야 하는 내 임무가 통탄스러웠다.
나는 군영의 주요인물들과 인사를 마치고 배정된 천막으로 향했다.
델핀 선배가 미리 군영 측에 언질을 준 덕인지, 천막 안은 아늑하고 따스했다.
얼핏 보기에도 최고급품이었다.
하기야 나와 델핀 선배는 하룻밤을 함께 불태운 사이가 아니던가.
그녀와의 첫 만남을 되짚어 보면, 참 우스운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엘시 선배는 나를 델핀 선배의 ‘정부(??)’인 양 취급했었다.
델핀 선배를 도발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는 이를 빌미 삼아 엘시 선배를 기습했고, 그것이 시작이 되어 나와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맞대는 동료가 되었다.
그 인연이 이어지고 이어져, 결국 나는 델핀 선배와 몸을 겹치는 사이가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엘시 선배의 예언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물론 지금의 엘시 선배는 이를 조금도 바라지 않겠지만 말이다.
나는 문득 의식의 깊은 곳에 파묻어 두었던 의문을 떠올렸다.
누군가 나와 델핀 선배의 관계를 목격했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최전선으로 향하기 전, 나는 일행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얻은 성과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깨달은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까닭은 알 수 없었으나, 유렌을 제외한 일행 전원이 잠을 설친 듯했다.
성녀나 엘시 선배, 심지어는 황녀와 엠마까지도 그랬다.
내가 그 사유를 캐물어도 마땅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개는 꿈자리가 사나워서 그랬다고 답할 뿐이었다.
엠마는 그나마 그럴싸한 이유를 대긴 했다.
“그, 그러니까… 사실, 그렇게 고급스러운 침대는 처음이라서. 아하하…….”
볼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한 고백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금 엠마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더는 엠마의 여린 마음을 건드리지 않으리라, 몇 번이고 다짐하면서.
그러니 엠마는 제외하고, 남은 여인은 셋이었다.
성녀와 엘시 선배, 그리고 황녀까지.
그중 둘이나 내 마음에 걸린다는 점에서 좋지 않은 인선이었다. 성녀와는 야릇한 분위기를 만들었던 적이 있었고, 엘시 선배는 내게 고백까지 하지 않았던가.
어느 쪽이든 들키면 절연까지도 각오해야 했다.
그나마 세리아가 북부에 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만일 세리아에게 델핀 선배와의 관계를 들켰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자살을 검토했을 터였다.
최소한 시체는 온존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내가 끙끙거리며 골몰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주인님?”
천막의 입구를 가린 천을 불쑥 거둬내며, 얼굴을 들이미는 소녀가 하나 있었다.
사실 ‘소녀’라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었다. 상대는 나보다도 연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자그마한 체구와 사랑스러운 이목구비를 본다면, 누구나 그녀를 ‘소녀’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을 터였다.
엘시 선배.
마침 고민하고 있던 인물 중 하나가 찾아오자,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 전까지는 휴식을 위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차였다. 엘시 선배가 찾아왔으니, 짧은 휴식은 이제 끝이었다.
나는 초조한 속내를 숨기기 위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시 선배, 무슨 일이에요?”
그러나 내 질문에도 엘시 선배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한동안 우물쭈물하다가, 머뭇거리며 천막 안으로 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내 의아한 시선이 엘시 선배를 향했다.
그러든 말든, 그녀는 어색한 목소리로 핑계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 그러니까… 그래! 천막 안의 침구가 불편하더라고. 델핀 그 계집애, 내 천막이라고 장난을 쳐놨나 보지?”
“……?”
엘시 선배는 델핀 선배를 돕기 위해 머나먼 타지에서 이곳까지 원정을 왔다.
아무리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더라도, 그럴 리는 없을 텐데.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나는 우선 엘시 선배의 편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요? 그럼 제가 군영 측에 말씀을…….”
“아, 아아! 그, 그럴 필요는 없고!”
엘시 선배가 허둥지둥 나를 만류하는 소리였다.
나는 결국 뜻을 접고 다시 엘시 선배를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나를 찾아온 까닭을 짐작할 수 없어서였다.
엘시 선배의 이상행동은 계속 이어졌다.
그녀는 볼을 발갛게 붉히면서, 내 몫으로 놓인 침대 위에 살포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자, 잠을 설쳐서 그런가? 너무 피곤해서, 침대라도 빌릴까 싶었거든…….”
흠, 하고 나는 침음을 삼키며 볼을 긁적였다.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엘시 선배와 성녀의 사이는 빈말로도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황녀는 부담스러울 테고, 엠마는 평민이라서 싫다고 하겠지.
또 설령 엘시 선배가 괜찮다고 해도 내 쪽에서 사양이었다. 착한 엠마가 엘시 선배 앞에서 종일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그림이 그려졌으니까.
차라리 내 방에서 잠시 낮잠을 자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납득을 끝마친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시죠, 그럼 저는 잠시 정찰이라도…….”
“그, 그럴 필요는 없고!”
엘시 선배는 황급히 나를 만류하며, 새빨개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겉옷을 벗어던지려는 시도까지 보이고 있었다.
“아, 덥다 더워… 난방이 너무 강해서 그런가?”
“이곳은 북부인데요. 천막에서 난방을 돌린다고 더워질 리가…….”
“드, 듣고 보니 그렇네! 너무 추워서 그런데, 주인님이 잠깐만 내 옆에서 자리 좀 덥혀 주면 안 될까?”
그렇게 허둥지둥하면서도, 엘시 선배는 제 겉옷의 단추를 하나둘씩 풀고 있었다.
나는 이제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엘시 선배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방금 전엔 춥다고…….”
“잘 때 꽁꽁 싸매면… 부, 불편하잖아!”
아무리 둔한 나라도 이쯤 되면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엘시 선배는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낯가죽을 쓸어내리면서, 불현듯 떠오른 의심을 붙잡는 수밖에 없었다.
혹시 엘시 선배가 본 건가?
엘프들을 상대하기도 전에, 우선여인들을 상대해야 할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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