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32화 (332/649)

〈 332화 〉 5. 빵과 비수(30)

* * *

북부의 침엽수림은 방대한 면적을 자랑한다.

그 전까지는 기껏해야 이끼 정도나 보이던 땅이었다. 이만한 수의 나무가 자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숲은 생명의 보고였다.

지반의 양분을 흡수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가 식물이었다. 식물이 먹이사슬의 밑바탕을 지탱해 주어야만 생태계가 성립할 수 있었다.

그러니 침엽수림은 북부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북부에서 가장 많은 생명이 살아가는 장소이자, 또 그 이상의 위험을 품고 있는 곳.

나는 그 대자연의 신비를 탐사할 예정이었다.

느닷없이 내게 쳐들어 온 엘시 선배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엘시 선배의 어설픈 유혹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주인님, 그러니까… 음, 조, 조금 덥지? 옷 좀 벗을래?”

“아니요, 괜찮은데요.”

“그, 그러지 말고!”

갖은 노력 끝에 나를 침대 위에 앉게 만든 엘시 선배였다.

어떻게든 이 기회를 틈타 우리 사이의 관계를 진전시키려는 그 노력이 용했다. 이제는 아예 내 옷을 더듬거리며 벗기려 들 정도였다.

물론 엘시 선배의 완력이 아무리 강해봐야 내 상대는 아니었다.

더불어 엘시 선배의 손길이 너무 어설프기도 했다. 남성의 옷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엘시 선배도 처녀였으니까.

고작해야 하룻밤을 치렀을 뿐이나, 나는 무심코 성경험의 유무를 두고 여유를 가지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레토가 본다면 조소를 넘어 기가 찰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엘시 선배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백의 도화지나 다름없었고, 나는 밀도 있는 밤을 보낸 뒤였다. 마음가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또 지금의 엘시 선배는 지나치게 조급해 보이기도 했고.

나는 내 옷을 더듬거리는 엘시 선배의 손을 말없이 잡아 주었다.

그러자 엘시 선배는 놀란 듯 흠칫, 몸을 떨다가 이내 살살 내 눈치를 살폈다.

마치 잘못을 들킨 강아지와 같은 몰골이었다.

나는 엘시 선배를 안심시키기 위해 따스한 말을 건네야 했다.

“엘시 선배, 왜 그래요?”

“왜, 왜요…….”

최근 들어 내게 반존대를 하던 엘시 선배였다.

다시 존댓말을 쓸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는 뜻이었다.

평생 해본 적도 없는 성적 유혹을 하는 와중이었다.

무슨 마음에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불안하고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누구에게나 첫 경험은 선망과 공포의 대상이었으니까.

굳이 여성으로 한정할 필요도 없었다.

남성 중에도 첫 경험 중에 너무 긴장해서 곤란을 겪는 일이 많다고, 예전에 레토가 조언해 준 적이 있었다.

그러니 나는 덜 긴장할 수 있도록 본인이 자세한 경험담을 풀어놓는다고 했던가.

우스운 소리였다.

정작 술에 취한 채 델핀 선배쯤 되는 여자를 앞에 두니, 내 이성이나 자제심 따위는 하잘 것 없는 것에 불과해졌다. 그 점이 못내 속이 쓰렸다.

특히 성녀와 엘시 선배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나와 접점이 많았다. 무심코 두 사람과 함께하는 미래도 종종 떠올린 적이 있을 정도였다.

적어도 성녀나 엘시 선배와 함께 살면 삶이 지루하지는 않을 터였다.

덧붙여 다른 여인들과의 생활도 한 번쯤 그려본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엠마라든지.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자 한다면 최적의 선택이 아닐까.

물론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결혼이란 삶과 삶의 결합이었고, 당사자의 의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했으니.

다만 엘시 선배만은 예외였다.

엘시 선배는 내게 마음을 전했고, 나 또한 진지하게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던 참이었으니까.

따라서 죄는 내게 있었다.

아직 우리 둘이 아무 사이가 아니라도, 내게는 그 진심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엘시 선배를 달랬다.

“오늘따라 이상하잖아요. 자꾸 옷을 벗으라 하지 않나… 엘시 선배는 좀 더 연상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다소의 거짓이 포함된 촌평이었다.

엘시 선배는 연상이라는 느낌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요즘에는 여유를 되찾은 것 같긴 했으나, 그럼에도 그동안 쌓아 온 인식의 벽은 높고 험했다.

단기간에 평가가 뒤집힐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내가 그렇게라도 평가를 꾸민 까닭은, 순전히 엘시 선배가 그러는 쪽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엘시 선배는 묘하게 연상이라는 사실에 고집이 있었다.

나도 최근 들어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리고 내 추측을 증명하듯, 엘시 선배는 곧 헛기침을 하며 어떻게든 여유를 되찾으려 애를 쓰기 시작했다.

“흠, 흠흠… 그, 그랬나?”

네, 무척이나.

나는 목젖을 치고 올라오는 한 마디를 억지로 참으며, 엘시 선배에게 말했다.

“오늘따라 조금 그래 보여서요. 그리고 내일부터 적진 한복판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최고 전력 중 하나의 마음이 불안정하면 큰일이잖아요.”

드물게도 엘시 선배를 띄워주는 말이었다.

본래 엘시 선배 같은 사람은 이러한 칭찬에 약했다. 특히 예전부터 내게 쓰다듬어지는 것을 좋아하던 그녀였다.

내 높은 평가에 더욱 기분이 들뜰 수밖에 없을 터였다.

본래라면 내가 굳이 엘시 선배를 달래 주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겠으나, 지금은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는 슬슬 움찔거리는 엘시 선배의 입꼬리를 보며, 결정타를 날리기로 했다.

“또 엘시 선배가 불안하면 제 마음이 좋지 않기도 하고.”

이는 사실이었다.

단지 낯 뜨거운 이야기라 여태 밝히지 않은 진심일 뿐이었다.

얼마 전 엘시 선배가 괴롭힘을 당할 때 비로소 깨달았다.

엘시 선배와의 관계가 더는 예전 같지는 않으리란 사실을.

그래, 진심은 진심이었는데.

일단 말로 뱉고 보니 꽤 부끄러웠다. 결국 나는 헛기침을 하면서 살짝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귀가 뜨거워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다만 그럴 만한 가치는 충분했던지, 엘시 선배는 히죽거리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가 가슴을 쭉 펴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 그렇지?! 주인님도 내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지, 암. 그렇고 말고!”

지금이다.

나는 동물적인 직감으로 본론을 파고들어 갔다.

“네, 그러니까 말 좀 해주시죠.”

움찔, 하고 떨리는 엘시 선배의 몸.

그러나 나는 엘시 선배에게 고민할 틈을 주지 않았다.

“왜 그렇게 초조해 보여요? 어제는 잠도 못 잤다 그러고.”

“그, 그거언…….”

엘시 선배는 볼을 긁적이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보아, 그녀로서도 부끄러운 고백인 모양이었다.

나는 재차 엘시 선배를 재촉했다.

“엘시 선배, 저도 부끄러움을 참고 말했잖아요. 그러니 선배도 진실을 말해줘야죠.”

“아, 으, 그, 그게 말이죠…….”

끝까지 머뭇거리던 엘시 선배였으나, 그녀가 내 고집을 이겨낼 리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항복 선언을 하고 말았다.

“아아, 진짜! 자꾸 이상한 소문이 돌잖아요!”

나는 흐음, 하고 팔짱을 낀 채 침음을 삼켰다.

‘이상한 소문’이 돈다, 라.

최소한 엘시 선배가 목격자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신경 쓰이는 건 마찬가지라, 나는 엘시 선배에게 되물었다.

“이상한 소문이요?”

“그, 그게… 델핀 그 계집애가, 주인님한테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아니라면 나와 하룻밤을 보낼 리가 없을 테니.

그 고혹적인 미소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사실 엘시 선배의 유혹 앞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던 것도 델핀 선배 덕이었다.

델핀 선배에 비하자면, 엘시 선배의 유혹은 어린애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침묵을 지키자, 엘시 선배는 다소 흥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 계집애,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니에요?! 수렵제 때 뒤통수까지 쳐놓고, 이제 와서 주인님이 마음에 든다고? 푸흐, 아하하… 어이가 없어서 진짜!”

주먹을 불끈 쥐는 모양새로 보아 엘시 선배는 무척 화가 난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러지 않아도 엘시 선배는 내 주변의 여인들을 견제하고 있던 차였다. 그때 델핀 선배가 내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엘시 선배와 델핀 선배의 앙숙 관계를 생각해 보면, 그녀의 분노는 지당했다.

그녀는 내게 협잡질까지 일삼기 시작했다.

“주, 주인님… 그 여자한테 홀랑 넘어가 버리실 건 아니죠? 그 계집애, 모르긴 몰라도 거쳐간 남자가 한둘이 아닐걸요?! 오늘 아침에 소문을 들었는데, 전날 밤에도 교성 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고……!”

절반은 진실이었고 절반은 거짓인 이야기였다.

우선 진실은 전날 밤 델핀 선배가 교성을 내질렀다는 점이었다.

그때 침대에서 함께 뒹굴고 있던 사람이 나였으니까.

그리고 거짓은 델핀 선배의 남자관계가 난잡하다는 사실이었다.

어젯밤 처녀혈을 확인했으니 이는 틀림없는 헛소문이었다. 다만 그 누명을 벗겨줄 수 없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만일 내가 이 자리에서 전날 밤의 진실을 밝힌다면?

나는 혹시나 싶어 엘시 선배에게 물었다.

장난을 가장한 질문이었다.

“혹시 질투하는 거예요? 그러다 제가 델핀 선배의 유혹에 넘어갈까 봐?”

내 웃음 섞인 물음에 엘시 선배는 화들짝 놀라 두 손을 내저었다.

필사적인 부정이었다.

그녀는 우물쭈물 하며 답을 내놓았다.

“아,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주인님을 의심하겠어요, 단지…….”

단지, 그 한 마디가 신호였다.

엘시 선배의 눈동자에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악물어진 잇새로 새어나오는 소리가 서늘했다.

“단지, 진짜로 주인님께 손을 대면… 각오를 해야겠죠?”

누가, 무슨 각오를.

그렇게 단숨에 치솟는 의문들을 나는 가까스로 억눌렀다. 이를 대신해서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어색한 웃음뿐.

“아하, 하하하… 그렇군요, 네.”

엘시 선배는 내 웃음소리를 들으며 생긋 미소를 머금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신뢰가 가득 담긴 미소였다.

그 사랑스러운 얼굴이 내 가슴에 화살촉처럼 쿡쿡 박혔다.

마지막으로 떠나가기 전, 엘시 선배는 내게 의미심장한 경고를 남겼다.

“그리고 참… 그 젖탱이 년도 조심해.”

어느덧 반존대로 돌아온 말투였다.

‘젖탱이 년’이라는 그 모욕적인 호칭에는 서늘한 한기마저 어려 있을 정도였다. 무척이나 실례되는 어휘였으나,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누군가를 떠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성녀’였다.

느닷없이 등장한 그 이름에 내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성녀는 왜요?”

“내기를 했거든.”

다소 불쾌감이 어린 고백이었다.

내가 내기의 내용을 채 묻기도 전에, 엘시 선배는 손을 흔들며 천막을 떠나갔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웃는 낯을 보여주어서 좋았다.

엘시 선배는 그렇게 웃고 있는 낯이 더 어울렸다.

그러니 앞으로도 웃게 하리라.

결코 델핀 선배와의 관계를 들켜서는 안 됐다. 세리아보다는 덜하지만, 엘시 선배도 위험인물에 속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페르쿠스 저택에서 식칼을 들고 온 엘시 선배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남은 의문은 하나.

나와 델핀 선배의 밤을 목격한 여인은 누구일까?

이제 엘시 선배가 후보에서 지워졌으니, 남은 인물은 둘뿐이었다.

성녀, 혹은 황녀.

엠마는 너무 고급진 침실에 놀랐을 뿐이니 제외하고.

다만 내가 노골적으로 나서기에는 애매했다. 그럴수록 목격자가 진실을 감추려 들 가능성이 존재했으니까.

애초에 내게 그 사실을 밝힐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찾아왔을 터였다.

아무래도 전문가의 협조가 필요할 듯 싶었다.

나는 품속에서 자그마한 쪽지를 꺼냈다.

얼마 전 아카데미 측에 보내두었던 편지에 돌아온 답장이었다. 그 안에 적힌 글귀는 짤막하기 그지없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유르디나의 정보망은 믿을 수 없고, 배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모두를 의심해야 하는 판이었다.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나의 사람을 불러오는 수밖에는.

그리고 기왕 협조를 구하는 김에, 자그마한 부탁을 더 얹더라도 문제는 없으리라.

나는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무장을 점검했다.

다음날부터 곧바로 침엽수림에 돌입할 예정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일찍 잠에 드는 편이 좋겠지. 엠마나 황녀가 걱정이었으나, 두 사람도 첫날이니 만큼 개인 정비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을 터였다.

그래, 나는 이제 아무도 만날 계획이 없었다.

그날 밤, 성녀가 내게 찾아오지 않았다면.

"이안……."

울먹이면서, 여인은 휘청이듯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내가 질렸어요?!"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

그러한 감상을 품으면서도, 나는 코끝을 간질이는 향취의 정체를 짐작해 냈다.

술 냄새였다.

성녀도 심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왜, 왜 날 두고… 흐윽, 왜 그랬냐고요!"

나는 말없이 성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 여자는 또 왜 이러는 걸까.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의문이었다.

내 상반신을 꾹꾹 누르는 성녀의 '신성력 주머니' 감촉이 참 좋았으니까.

아무래도 달래줘야 할 여자가 하나 더 늘어난 듯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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