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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33화 (333/649)

〈 333화 〉 5. 빵과 비수(31)

* * *

성녀의 자애로운 미소는 대개 가식이었다.

말하자면 오랜 가면이나 다름없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상냥하고 고아한 성녀를 원했다. 마침 ‘천출’이라는 딱지를 떼고 싶었던 성녀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고아 출신이라고 해도, 수많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다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그것이 종교의 본질적인 속성이었다.

아무리 위세가 막강한 천신교라도 성도 없이는 존속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성국은 유독 ‘상징’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도들은 신의 존재가 입증되기를 원한다. ‘신성력’이라 불리는 기적 외에도, 종교 의례에서 수많은 상징들이 동원되는 이유였다.

민중의 자발적인 신앙과 봉사를 이끌어 내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녀’는 얼마나 훌륭한 존재인가.

우선 그 외모부터가 남달랐다.

일말의 오점도 허락하지 않는 그 순결한 은빛 머리카락을 보라.

잡티 하나 없는 투명한 피부와 어여쁜 이목구비는 차라리 예술품에 가까웠다. 만일 신에게도 ‘편애’라는 감정이 존재한다면, 성녀는 그 유력한 증거 중 하나이리라.

또 마주하는 이들의 심장을 사로잡는 연분홍빛 눈동자나, 그 성스러운 분위기와 대비되어 더욱 강조되는 여체의 굴곡까지.

비현실적인 미모였다.

애초에 태어나기를 숭배받기 위해 태어난 여인이었다. 더불어 타고난 신성력도 막대했으며, 타인의 심리를 읽어내는 감각도 우수했다.

‘성녀’로서는 흠 잡을 데 없는 인물이었다.

유일한 단점은 부모조차 알 수 없는 고아 출신이라는 점, 그 하나뿐이었다. 이마저도 앞서 나열한 장점에 비하자면 하잘 것 없는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성녀가 ‘고아’라는 오점을 영리하게 이용할 줄 알았던 덕이었다.

고아 시절의 이름을 버릴 만큼 과거와 단절된 삶을 살면서도, 그녀는 필요할 때마다 ‘고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내세워 동정을 샀다.

그토록 철저히 계산된 일상을 살아오던 여인이었다.

어찌 보면 답답한 인생이기도 했다.

손짓 하나, 몸짓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천신교의 성녀란 그만큼 무거운 자리였다. 그러다 보니 나는 때때로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곤 했다.

성녀는 과연 행복할까.

만약 행복하다면, 그것이 누구의 행복인지도 궁금했다.

그녀? 혹은, ‘성녀’라는 만들어진 껍데기.

처음에는 짜증났지만, 어느덧 성녀가 내 마음속에 스며든 계기 또한 그랬다.

내게만 보여주는 진심이 소중했던 탓이었다.

성녀뿐만이 아니라, 내게도.

성녀는 이제 내 인생에 몇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처럼 서로 막역한 사이다 보니, 나는 때때로 누구도 보지 못하는 성녀의 일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성녀는 벌컥벌컥 술병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나마 백포도주라 다행이었다. 위스키나 보드카보다는 도수가 낮은 편에 속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일말의 걱정을 저버리지 못했다.

성녀의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오른 지 오래였다.

헤롱거리는 눈빛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이 여자, 취했다.

그것도 만취였다.

나는 지금 취객의 주정을 들어주고 있는 셈이었다.

“흐윽, 흑…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성녀는 벌써 몇 분째 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무어라 되묻기라도 하면 일단 술병부터 기울이고, 다시 초기화.

눈물을 뚝뚝 떨구는 모습이 안타깝긴 했다. 그러나 내 인내심에도 한계는 있는 법, 나는 결국 다소 짜증 어린 음색을 내뱉고 말았다.

“아니, 도대체 제가 뭘 했다고 그럽니까, 네? 자꾸 그렇게 제 탓만 하시면…….”

“흐윽, 흑… 나쁜 새끼…….”

물론 성녀는 그러든 말든 술병을 기울일 따름이었다.

나는 후우, 하고 달구어진 숨을 내뱉으며 낯가죽을 두 손으로 훑어 내렸다.

슬슬 맨정신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공간 확장 주머니에 담아두었던 술병을 하나 꺼냈다. 혹시나 싶어 챙겨온 싸구려 위스키였는데, 종종 인생에 회의감이 들 때 마시면 즉효였다.

삶의 염증을 치료하는 상비약이라고 할까.

마침 성녀 또한 술이 바닥난 듯했다.

그녀는 술을 들이키려다가, 몇 방울만이 떨어져 내리자 ‘어라?’하는 눈빛으로 유심히 병 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똑, 하고 술 한 방울이 눈 위로 떨어져 내리자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지르기까지.

상상 이상으로 술버릇이 좋지 않았다.

나는 다시는 성녀와 술을 마시지 않기로 다짐했다.

“술 필요합니까?”

눈을 비비적대며 울상을 짓던 성녀의 맹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제야 협상이 좀 이루어질 듯했다.

나는 유혹하듯 술병을 찰랑여 보였다.

“그럼 우리 거래합시다. 제대로 설명해 주면, 술 한 잔 주는 걸로.”

‘거래’라는 말이 그 계산적인 본성을 건드린 덕일까.

성녀는 다소 취기에서 벗어난 듯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두 입술을 쭉 잡아당기려다 참았다.

“그렇게 치사하게 굴 거예요?”

“네, 그럴 생각인데요.”

애초에 비난을 받는데 그 까닭조차 몰라야 한다니.

너무 불합리한 조건이었다. 나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을 심산이었다.

성녀는 고민하듯 으으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별다른 수가 있을 턱이 없었다. 천신교의 성녀가 술을 얻을 경로를 제한적이었으니 말이다.

취객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술뿐이었다.

결국 성녀는 항복이라는 듯 달구어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그게 뭐,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성녀가 째릿, 하고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헛웃음을 머금던 내 입이 꾹 다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성녀는 그제야 울적한 고백을 이어갔다.

“요즘따라 특히 이상해요. 사소한 일로 행복해졌다가도, 밤마다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해요. 원래는 이렇지 않았는데, 왜 이럴까요?”

“그 원인이 저란 말입니까?”

“네.”

단언이었다.

성녀의 눈동자에는 아직 흐릿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

“들었어요, 요즘 유르디나 자매님과 사이가 좋아 보인다고.”

쿡, 하고 내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였다.

나는 들이키려던 술을 도로 뱉어내려다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의외라는 눈빛이 성녀를 향했다.

그 사실을 성녀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혹시 그날 밤을 목격한 당사자가 성녀인 걸까.

일순 의심이 들었으나, 나는 이내 그 가능성을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그랬다면 성녀가 ‘들었다’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보았다’라고 했겠지.

성녀는 이제 몸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듣기로는 유르디나 자매님이랑 단 둘이 있을 때 살갗을 치는 소리가 들려온다는데, 어찌 그리 부러운… 이 아니라, 불경한! 성추행이에요!”

또 다시 정곡을 쿡, 하고 찌르고 들어오는 지적이었다.

나는 또 다시 술을 역류시킬 뻔했다가, 콜록거리는 기침을 내뱉어야 했다.

진술이 내 예상보다 훨씬 자세했다.

내가 한동안 델핀 선배의 엉덩이를 치기는 했으나, 이는 철저히 비밀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보면 유르디나 가문의 차기 가주로서의 위엄이 흔들릴 수 있는 문제였다.

나는 성녀의 말을 엄중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런 소문이 퍼졌다고요?”

“네.아니면 제가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딴 소문!”

성녀가 나를 쏘아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어느덧 그녀는 분하다는 듯 눈가에 물방울을 맺고 있었다.

“우, 원래는 안 그랬잖아요! 욕구불만이에요?!”

“아니, 뭐… 저는 늘 이랬습니다만.”

그러니까 용감하게도 성녀를 성추행한 전력이 있지 않겠는가.

다만 성녀는 예전의 나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옛날에는 나만 건드렸으면서…….”

그렇게 말하며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슬쩍 눈을 피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할 말은 없었다.

성녀는 순결한 처녀였다. 천신교의 성녀였으니 당연했다.

그 때 묻지 않은 육체를 내 손이 범한 것이다.

솔직히 말해 성녀가 책임지라고 말하면 그대로 들어주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정작 첫날밤은 다른 여인과 보냈으니, 쓰레기라 불려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만 주눅이 들고 말았다.

물론 내게도 핑계는 존재했다.

“그래도 성녀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천벌을 받을 수도 있고…….”

“천벌이 두려운 인간이 그런 짓을 해요?”

나는 항복이라는 듯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술잔에 술을 따라, 그대로 한 잔.

식도가 불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델핀 선배와 무슨 사이냐고요?”

“무, 무슨 사이……?”

“아무 사이도 아니죠.”

최소한 지금은 이렇게 둘러대야 했다.

아니라면 세리아부터 엘시 선배까지 폭탄이 너무 많았다. 내 장난스러운 대답에 성녀는 더욱 울컥한 기색이었지만 말이다.

“그게 말이 돼요?! 단 둘이서 마, 망측한 짓을 하고 다닌다면서요!”

“그것도 소문에 불과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말마따나, 그렇게 따지면 우리 둘도 특별한 관계잖아요.”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니 혀가 점점 유연해지고 있었다.

뻔뻔해진 덕이었다. 술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나는 죄책감에 꺾여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럼 우리는 무슨 사이인데요.”

“우, 우리요?”

“네, 우리.”

성녀는 내 직언직설에 곧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지 않아도 술에 취한 참인데, 내가 곤란한 질문을 일삼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성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더욱 가열찬 공격을 가했다.

"성녀님은 천신교의 성녀 아닙니까. 그동안 제가 너무 무례했던 것뿐이죠. 이제는 성녀님이 소중해진 만큼, 성녀님도 소중히 대하려고 합니다."

성녀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만취한 인간은 대개 그랬다.

논리적으로 사고하려 들수록 어긋나는 법이었다. 결국 마지막에는 파탄된 논리도, 느닷없는 소리를 내뱉게 된다.

수없이 취해 본 경험에 따른 이론이었다.

레토를 비롯한 친구들과도 교차검증을 마쳤으니, 성녀 또한 다르지 않으리라.

그렇게 나는 성녀의 혼을 쏙 빼놓은 뒤 재울 예정이었다.

"그러니 너무 염려 마시고, 나중에 술 깨면 차차 소문의 출처에 대해 대화를……"

그러나 그때.

"……왜, 왜."

울먹이면서, 성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너무 몰아붙였다.

술 취한 사람은 신중히 대해야 했다. 특히 술에 만취한 여인은 그 해의 첫 눈송이와 같아서, 더욱 세심히 대해야 했다.

아니면 눈물처럼 녹아내리고 마니까.

지금의 성녀는 누가 봐도 폭주 직전이었다.

나는 성녀의 흑역사를 막기 위해, 최대한 신중히 언어를 고르며 말했다.

"저, 성녀님? 지금 흥분하신 것 같은데, 조금만 진정하고……."

"왜, 왜 더는 성추행 안 하는데요!"

망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술잔에 술을 따랐다. 부디 다음날 성녀가 저 대사를 잊어버리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성녀는 이제 팔로 제 가슴을 받치며 존재감을 강조하기까지 했다.

"내, 내가 벌써 질렸어요?! 봐요, 당신이 매일 눈을 못 떼던 내 가슴! 만지라고요, 억지로! 얼마든지!"

한숨과 함께 술이 한 잔 내려갔다.

결국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이랬다.

"……그러죠, 뭐."

그리 원한다면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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