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34화 (334/649)

〈 334화 〉 5. 빵과 비수(32)

* * *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곧장 성녀에게로 다가섰다. 취기를 빌린 내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눈앞에 놓여 있지 않은가.

또 다시 레토의 말이 떠올랐다.

다 차려놓은 밥상을 엎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했던가.

과연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술에 취한 와중에도 성녀는 성녀였다.

내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도리어 당황한 쪽은 그녀였다. 내가 성큼성큼 거리를 줄일 때마다 성녀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성녀는 흘깃흘깃 내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 진짜로…… 흐읏?!”

물론 던질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내 손이 지체 없이 성녀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성녀는 곧장 달뜬 신음을 흘려냈다.

나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단지 애태껏 이성의 힘으로 가까스로 억눌러 왔을 뿐이었다.

성녀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매력적인 육체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욕구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죄책감을 느꼈다.

당시의 나와 그녀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하물며 천신교의 성녀를 향해 성욕을 품다니, 천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중죄였다.

그 이후에는 성녀와 인연이 생기긴 했다.

그럼에도 나는 몇 번이고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도리어 나와 성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성녀의 믿음에 보답하지 못하는 내 마음이 한심스러웠다.

감히 그래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부정했으나.

성녀가 내게 달라붙을 때마다 들끓던 감정의 흔적은 온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그동안 이를 두고 성녀에게 얼마나 놀림을 당했던지.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성녀가 간청하고 있었다.

제 순결한 육체를 희롱해 달라고, 마음껏 추행해 달라고.

사내로서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오랜만에 맛보는 탐스러운 살덩이의 감촉을 만끽했다. 여전히 그 부드러운 탄력감이 놀라웠다.

델핀 선배의 가슴도 훌륭했는데, 성녀는 그 이상이었다.

과연 신성력의 원천다웠다.

나는 술에 취해 그따위 헛소리를 하면서, 성녀의 가슴을 꾹꾹 흐트러트렸다. 그럴 때마다 성녀는 달아오른 숨소리를 내뱉었다.

“흐으, 하아… 읏, 흐응…….”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성녀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탓에 그녀의 낯빛을 읽을 수 없었다.

단지 슬슬 섞여오는 달콤한 비음을 들으며, 성녀가 마냥 싫어하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뿐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고작해야 델핀 선배와 하룻밤을 보냈다고, 또 다른 여인의 반응을 분석하고 있는 꼴이라니.

남자는 잘난 척에 미친 동물이 맞았다.

그러던 나는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겨 성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진짜에요?”

“흐읏, 하아… 무, 뭘… 으으응?!”

꾹, 하고 다소 강압적으로 대하자 성녀의 반응이 좀 더 좋아졌다.

중요한 의문이었기에 나는 재차 성녀에게 질문을 던져야 했다.

“억지로, 마음껏 해도 된다면서요.”

흠칫, 하고 성녀는 그제야 제 발언이 떠올랐는지 몸을 떨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의 고개가 치켜들어졌다. 어여쁜 연분홍빛 눈동자가 나를 가득 담고 있었다.

성녀는 어찌나 당황했는지 초점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건! 그, 그러니까아… 흐읏?!”

성녀는 무어라 핑계를 대려고 있으나, 이미 내게 약점이 잡힌 뒤였다.

나는 비로소 틱틱대는 성녀를 완벽히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달았다.

그럴 때마다 성녀의 젖가슴을 움켜쥐면 되는 것이다.

매우 효율적이고, 무엇보다 촉감도 좋았다.

훌륭한 대안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성녀에게 말을 놓았다.

“진짜야, 아니야?”

그러면서 성녀의 가슴을 힘주어 주무르자, 결국 성녀는 항복선언을 하고 말았다.

마침 내 손이 솟아오른 첨단을 꼬집기 직전이었다.

“지, 진짜에요!”

신음을 흘리며 내뱉은 말이었다.

성녀는 헐떡이면서,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제 그녀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술을 그렇게 먹고, 느닷없이 외간남자에게 젖가슴을 주물러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진짜, 진짜로 그래도 되니까…….”

나는 그 애절한 눈빛에 압도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일순 망설이던 내 손이 성녀의 뺨을 향했다.

그곳에는 울고 있던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무심코 나는 그 눈물자국을 닦아 내렸다.

성녀의 낯에 눈길이 머무른 것은 그때였다.

나는 멍하니 성녀의 매혹적인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델핀 선배와의 밤도 이랬던가.

술을 마시고, 어쩌다 흥분하고, 유혹에 넘어가서 입을 맞추고.

혀를 섞고, 그때부터 모든 것이 시작됐는데.

오늘도 나는 누군가와 밤을 함께하는 걸까.

그것도 델핀 선배가 아니라, 또 다른 여인과.

성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내 손가락을 덥석 입에 물었다.

갑작스러운 반응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손가락을 빼려 했으나, 성녀는 정성스레 내 검지를 빨기 시작했다.

쪼옥, 쪽.

내 손가락을 오물거리며 빨아, 입술을 맞추고 혀를 열정적으로 얽어오기까지.

그것이 일종의 본능에 의한 행위라는 사실이 더욱 자극적이었다.

성녀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일렁이는 욕망을 담고 나를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쪽쪽거리며 내 검지를 혀로 청소하던 성녀는, 이내 뜨거운 숨결과 함께 내 손가락을 뱉어냈다.

젖은 손가락에 찬바람이 닿았다.

온도감 있는 점막에 감싸져 있던 시절이 벌써 꿈만 같다는 듯.

“……마음대로 해주세요, 이안.”

내 손이 다급히 성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나는 치미는 욕구를 이겨내지 못하면서도, 가까스로 호흡을 진정시켰다.

그럼에도 나는 떨림이 남은 목소리로 물었다.

“큰일 날 텐데요.”

마지막으로 남은 한 줌의 자제심이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성녀를 고꾸라트리고 싶은 마음을 꾸역꾸역 참아내며, 성녀에게 진지한 낯빛으로 말했다.

“천신교의 성녀잖습니까… 이제 시작하면, 멈출 수 없어요.”

더욱이 나는 멈출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이후의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될지조차 모르는 판이었다.

천신교의 성녀가 순결을 잃는다?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성녀도 여인인 만큼 사랑이 죄가 되지는 않겠으나, 성녀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은 기정사실이겠지.

‘성녀’는 일종의 상징이었다. 그 가치가 훼손되면, 당연히 대체재를 찾아야 했다.

그렇다면 성녀의 꿈은 좌초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아를 비롯한 약자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었던가.

개인의 봉사로 이루어질 수 있는 수준의 꿈이 아니었다. 국가와 사회를 동원하지 않으면, 그 흔해빠진 공상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감히 내가 그 꿈을 꺾어도 되는지.

여인의 지조, 순결, 미래를 전부 다 취하는 결정이었다. 내가 마지막까지 머뭇거린 까닭은 그 중압감 때문이었다.

성녀를 안기 위해서는 그토록 복잡한 계산이 필요했다.

델핀 선배와 불장난을 즐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결정이었다.

제정신이라면 그만두어야 정상이었다.

그럼에도 왜, 우리 둘은 이러고 있는지.

그야말로 술과 밤의 마법이었다.

그리고 아직 마법은 끝나지 않은 듯했다.

성녀는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괜찮아요.”

나는 괜찮다.

이는 말은 두 가지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첫 번째로는, 말 그대로 성녀는 이미 각오를 끝마쳤다는 뜻이었고.

두 번째는 반문이었다.

나는 괜찮은데, 당신은 어떻냐는 생략된 그 의문이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어떻냐고?

나는 대답 대신 성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성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그 둔부의 감촉과 향긋한 체향을 즐겼다.

남은 손이 성녀의 턱을 쥐었다. 그리고 서서히 감기는 연분홍빛 눈동자를 감상하며, 입을 맞추기 직전.

천막 밖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침입자다!”

느닷없는 경고에 내 몸이 튕겨 오르듯 자세를 다잡았다.

이는 성녀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제 옷매무새를 고쳐 맸다. 나는 곧장 주위를 훑어보았다.

짧은 소란이었다.

우르르 몰려나온 병사들이 이곳저곳을 들쑤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내 천막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누가 봐도 수상한 기척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천막을 뛰쳐나갔다. 내 손에는 어느덧 손도끼가 들려 있었다.

어디냐, 어디야.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아직도 남아있는 기척을 따라, 조금만 더 옆으로.

내 출수는 벼락같았다.

팍, 하고 땅바닥에 손도끼가 틀어박혔다. 얼어붙은 지반이 무참히 깨져나가며 흙더미가 비산했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옅은 비명소리.

“꺄, 꺄아아아악!”

나는 검 손잡이에 손을 얹고 땅을 박찼다가, 이내 멈칫하는 수밖에 없었다.

천막과 천막 사이, 어둠 속에 가리어 보이지 않던 그곳.

암청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주저앉아 있었다.

익히 알고 있던 얼굴이었다.

제국의 제5황녀, 시엔.

그녀가 다소 겁을 먹은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황녀 전하?”

얼이 빠져 있던 것도 잠시.

나는 곧바로 황녀에게 달려가 그녀의 몸 상태를 살폈다. 아무리 모자라 보여도 제국 황실의 핏줄, 다치기라도 했다간 그 여파가 만만치 않을 터였다.

다행스럽게도 황녀는 엉덩방아를 찧은 것 빼고는 별 상처가 없어 보였다.

소녀는 울먹이며 내게 칭얼거렸다.

“이, 이안 경… 천막 근처에, 수상한 그림자가 있어서… 너무 무서워서, 이안 경을 찾으러 왔는데. 흐윽, 흑…….”

그래서 나를 찾아온 건가.

그러다 내게 침입자로 오해받아, 손도끼를 맞을 뻔한 것이다. 서러울 만도 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조용히 황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습니다, 전하. 곧 정리될 거에요. 아마도 엘프 측에서 군영을 정찰 온 것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게 한참을 다독인 뒤에야, 상황은 종료되고 황녀도 울음을 뚝 그칠 수 있었다.

내 천막은 어느덧 조명이 꺼져 어둑해진 뒤였다.

성녀도 돌아갔겠지, 내 천막에 있는 모습을 들키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테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짜증스레 벅벅 긁었다.

아, 분위기 좋았었는데.

또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나치게 충동적인 결정을 철회할 수 있어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나는 몰라도, 성녀는 잃을 것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어차피 성녀와는 앞으로도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이 남아있으리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몸을 돌리려던 찰나.

내 눈에 의외의 물건이 들어왔다.

황녀가 주저앉았던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그곳에는 웬 손수건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뻗었다.

자세히 보니 낯이 익은 물건이었다.

"……내 손수건이잖아?"

나는 늘 품에 손수건을 한 장씩 넣어서 가지고 다니곤 했다. 귀족의 소양이라고 해도 좋았다.

다만 의문이었던 점은, 나는 늘 여분의 손수건을 숙소에 보관한다는 점이었다.

오늘만 하더라도 천막 안에 두었을 텐데.

혹시 취중에 손수건을 들고 다니다 흘리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조용히 손수건을 품속에 갈무리하며, 달을 바라보았다.

성녀와 입을 맞추기 직전에, 침입자가 나타나고.

소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압되었으며, 천막에 있어야 할 손수건은 바깥에 나와 있었다.

나는 술기운에 젖어 생전 하지 않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수상한데……."

네리스 선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여러모로.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