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7화 〉 5. 빵과 비수(35)
* * *
네리스 선배의 도착은 일렀다.
침엽수림의 군영에 머무른 지 단 하루밖에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나는 새벽녘부터 네리스 선배의 호출을 받고 천막을 나섰다.
언제나 그렇듯 은밀한 부름이었다.
제국 첩보부는 미세한 음파를 발하는 도구를 상시 휴대했다. 이는 특정한 사물과 공명하는 기능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내 품속에 있는 인장이었다.
용이 그려진 제국 황실의 인장.
내가 황제의 최측근이자, 제국 첩보부의 지부를 할양받았다는 증거물이었다. 사실 나는 이 인장의 입수 경로조차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다만 검공으로부터 대략적인 사정만을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제국 첩보부 본단의 취조실에서 난동을 부렸다지.
당연히 나는 아니고, 미래에서 온 '나'의 소행이었다. 내게는 그럴 실력이 없었으니까.
하여간 재주도 좋은 인간이었다. 미래에서 영웅 노릇을 하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나는 아직 그처럼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모든 것을 하나씩 버려 가며, 세상을 위해 희생했던 그 삶의 궤적을.
지금의 내게는 능력도, 각오도 부족했다.
단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나씩 해나갈 따름이었다.
오늘 네리스 선배와의 만남이 그에 속했다.
침엽수림은 온전히 적지나 다름없었다. 엘프들은 물론이고, 유르디나의 군영조차도 의심의 눈초리로 봐야 할 판이었다.
최악의 상황이라 해도 무방했다.
최전선에서는 정보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신뢰할 만한 정보의 유무가 목숨을 판가름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군의 정보망을 믿지 말라니.
그렇다면 또 다른 아군을 불러내는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네리스 선배가 나를 배신할 리는 없을 터였다.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 내 ‘용혈 문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나와 적대한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네리스 선배는 내게 늘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군영의 외곽에 들어서자마자, 나무 위에서 그림자 하나가 툭 떨어져 내렸다. 곧장 무릎을 꿇은 여인의 입에서 공손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안 님.”
오히려 내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했는데.
미래의 ‘나’에게 어떠한 교육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네리스 선배는 나를 볼 때마다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로서는 다소 억울한 대접이었다. 정작 나는 네리스 선배에게 호의적인 태도만 보여주지 않았던가.
비록 첫 만남에서 물 대신 위스키를 쏟는 불상사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구구절절한 사정까지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씁쓸한 마음을 삼키면서, 네리스 선배에게 온화한 칭찬을 던질 뿐이었다.
“아니요, 오히려 예상보다 일찍 오셨네요. 북부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 치하의 말에 네리스 선배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리고 의아하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는 그 시선.
불신을 담고 있는 눈빛이었다. 네리스 선배의 심중에서 내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이제 익숙해진 취급이라 슬픈 마음도 들지 않았다.
다만 나는 재빨리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네리스 선배, 단도직입적으로 정보 수집을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리스 선배는 아무런 말도 돌려주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내 이어질 지시를 기다릴 따름이었다.
“누군가 델핀 선배에게 향하는 정보를 의도적으로 끊어놓고 있어요. 그 주동자를 색출하고, 엘프들의 사교에 관한 정보도 수집해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대답이었다.
너무나 단호한 어조라서, 이후의 말을 고민하고 있던 내가 바보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정작 네리스 선배는 마땅히 이래야만 한다는 듯 평온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태연히 몇 마디의 말을 더 얹었다.
“다만 허가해 주셨으면 하는 사항이 있습니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임의로 한 명을 동행시켰는데…….”
“뜻대로 하시죠.”
이제는 네리스 선배의 입이 꾹 다물어질 차례였다.
그녀의 숨이 일순 멎더니, 묘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시선이었다.
그러든 말든 나는 네리스 선배에게 신뢰를 보여주었다.
네리스 선배가 나를 믿는 만큼, 나도 네리스 선배를 믿어볼 요량이었다.
무엇보다 ‘용혈 문자’라는 믿음직한 버팀목도 있었고 말이다.
“어차피 네리스 선배가 맡기로 한 일이잖습니까. 또, 네리스 선배를 믿지 않는다면 애초에 이곳으로 부르지도 않았을 테고.”
도리어 네리스 선배는 내 칭찬이 더욱 불편한 듯했다.
한동안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더욱 푹 숙이며 대답했다.
“네, 네…….”
그 볼이 조금 붉어진 것 같이 보였던 건 착각일까.
쓸데없는 생각을 정리하며, 나는 마침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치며 덧붙였다.
“아, 그리고 황녀 전하도 조금만 살펴 주시겠어요?”
내 말에 네리스 선배는 잠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네리스 선배는 아차, 싶었던지 곧장 고개를 숙였다. 황족을 살피라는 명령을 들었음에도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던지, 그녀가 혀로 입술을 축이며 답했다.
“네, 넷! 삼가 받들겠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철저히 감시하라는 뜻은 아니고… 그냥, 요즘 신경이 쓰여서요. 혹시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잖습니까. 용혈이 흐르는 분인 만큼, 간단한 동향 정도만 보고해 주세요.”
다소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핑계였다.
전적으로 꾸며낼 시간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사실 나도 왜 황녀를 감시하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성녀마저 그날 밤의 목격자가 아니라면, 자연스레 남은 용의자는 황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젯밤에 보였던 모습이 조금 이상하기도 했고.
여러모로 나로서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물론 이를 위해 공적인 권력을 동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나는 ‘지시’까지는 아니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로 했다.
그래, ‘부탁’이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 건네는, 자그마한 덤 같은 것이었다고.
그렇게 궤변으로 양심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있던 때였다.
네리스 선배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 이안 님?동행한 인원을 소개시켜 드려도……?”
아, 하고 나는 무심코 옅은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알아서 잘 하리라 생각했던 탓에 잊고 있었는데, 네리스 선배는 동행인을 하나 더 데려왔다고 했었다. 당연히 내게 소개시켜 주는 것이 순리였다.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네. 당연히 그래야죠. 그런데 도대체 누구를…….”
주춤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네리스 선배가 은신하고 있던 나무의 바로 뒤편이었다. 지금껏 경계를 풀고 있어 몰랐는데, 그 뒤에서는 미약한 숨소리가 느껴지고 있었다.
한 줌의 적의조차 없었던 터라 더욱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더불어 상대의 기척이 워낙 희미하기도 했고.
내 눈이 자연스레 소리의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어딘가 낯이 익은 인물이었다.
일순 미간을 좁히며 고민에 빠져 있던 나는, 이내 상대의 정체를 짐작해 냈다.
“……아비앙?”
일전에 나와 짧은 인연을 맺었던 엘프, 아비앙이었다.
치료를 무사히 마쳤는지 흉터가 보이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래도 여자라고 최대한 흉이 나지 않도록 팼었는데, 일부러 관심을 기울인 보람이 있었던 듯했다.
다만 내가 당황했던 부분은, 아비앙이 입고 있는 옷 때문이었다.
귀족이라면 누구나 본 적이 있을 복식이었다.
저택에서 지내든, 성에서 지내든 귀족들은 제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그러한 역할을 대신해 주는 이들이 존재했던 덕이었다.
바로 사용인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비앙이 착용하고 옷은 그중 하녀가 입는 종류에 속했다.
제 복장이 수치스러웠는지, 아비앙의 눈에는 옅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에서 분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비앙은 엘프로서의 자긍심이 강했다. 그만큼 인류를 증오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정작 인간을 섬기는 하녀의 복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니.
악취미였다.
나는 다소 질렸다는 눈으로 네리스 선배를 내려다보았으나, 그녀는 오히려 우쭐한 낯빛을 할 뿐이었다.
여인은 내게 자랑스레 소개했다.
“며칠간 이안 님을 섬길 하녀, 아비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울먹이면서, 내 앞에 무릎을 꿇는 아비앙.
머리까지 조아리는 폼이 완연한 순종의 자세였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다시금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의문 하나만을 떠올렸을 뿐.
도대체 아비앙한테 무슨 짓을 한 걸까.
네리스 선배는 의미심장한 미소만을 머금었다. 그 진녹색 눈동자가 오랜만에 의욕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영락없이, 괴롭힐 후임이 생겨 기뻐하는 선임의 모양새였다.
아비앙의 고생길은 이제부터 시작인 듯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