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8화 〉 5. 빵과 비수(36)
* * *
북부로부터 떨어진 아카데미는 평화로웠다.
언제나와 같은 일상, 언제나와 같은 하루.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안정된 일과를 부여했다. 때로는 제한된 자유 속에서 사람은 진정한 안정감을 얻는 법이었다.
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하루가 보다 치열하다는 점 정도였다.
일점집중.
눈을 감고, 숨을 멈춘다. 마력이 혈도를 타고 흐르며 들끓는 힘을 부여했다. 손끝까지 전해지는 그 예리한 감촉.
세리아의 뇌리 속으로는 몇 가지 풍경이 떠돌고 있었다.
미래에서 온 사내가 보여주었던 검술이었다.
반격은커녕 대응조차 불가능했던, 그 초음속의 일격.
세계를 찢어발기던 하나의 실선이 아직도 세리아의 눈앞에 선명했다.
세리아의 목표는 그 기술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검술은 각기 비전이라 불릴 만큼의 묘리를 숨기고 있었다. 특히 미래에서 온 사내가 쓴 기술은 얼핏 보기에도 범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를 몇 번이고 얻어맞은 정도로 재현하려고 들다니.
아무리 천재라도 한계는 있었다. 헛소리라는 생각이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상한 일이었다.
세리아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거나 막막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도리어 마땅히 취해야 할 제 것을 되찾아 가는 감각이었다.
지금도, 보라.
짙푸른 실선이 공간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전조조차 없이 쏘아진, 단 하나의 횡단선.
뒤늦게 잘려나간 대기가 단말마를 터트렸다. 마구잡이로 터져 나온 바람이 세리아의 회색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 일격이었다.
그러나 세리아는 입술을 짓씹으며 한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도리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쪽은, 그녀의 옆에서 함께 수련하고 있던 셀린이었다.
그녀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또 뭐가 문젠데?”
숫제 질렸다는 목소리였다.
이미 수도 없이 반복된 광경이란 뜻이었다. 셀린의 눈빛에서는 이제 허탈한 감정만이 읽힐 뿐이었다.
세리아는 암울한 낯빛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준비동작이 남아있어요. 이 기술의 핵심은, 대응조차 불가능할 만큼 전조 없이 쏘아진다는 점에 있는데…….”
“아, 그래.”
셀린은 이제 됐다는 듯 그렇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더 설명을 이어가 봐야 이해하지도 못할 장광설을 늘어놓을 것이 뻔했다. 지난 몇 달간 세리아와 친해진 결과, 셀린은 이 무렵에서 이야기를 끊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녀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름의 위안을 건넬 따름이었다.
“그래도 말이야, 이제 꽤 괜찮아지지 않았어? 너무 조급해 하지 마. 나는 네 반만 따라가도 소원이 없겠다.”
“그야, 저와 하스터 양은 다르니까요.”
“……뒤진다, 너?”
여전히 사회성이 부족한 면모를 보이는 세리아였다. 그나마 상대가 셀린이라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또 ‘유르디나의 싸가지’라는 호칭을 상기시켰을 터였다.
그렇게 투닥거리던 두 사람은 곧 아카데미의 중앙대로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아무리 단련이 급해도 영양보충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세리아는 그 시간마저 아까운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셀린에게 하소연했다.
“어서 북부로 가야 해요. 언니와 이안 선배가 기다리고 있다고요… 이렇게 낭비하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을 텐데.”
“야, 야. 찐따… 넌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그 델핀 선배랑 이안 오빠잖아. 며칠 늦는다고 큰일이라도 나겠어?”
“그, 그래도 말이에요…….”
시무룩해진 세리아를 보며 셀린은 쯧, 하고 혀를 차고 말았다.
위로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이다.
대신 셀린은 전략을 바꿔보기로 했다. 보다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넌 나중에라도 따라오란 소리라도 들었잖아. 재능이 있어서 다행이지, 네가 그러면 재능 없는 나 같은 애는 어떡하라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와 하스터 양은 다르니까요.”
“야, 너 진짜 뒤질……!”
결국 참다못한 셀린이 울컥하기 직전이었다.
어디선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셀린과 세리아의 예민한 청각이 그 이상사태를 놓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의 눈이 멀거니 그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검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들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호, 혹시 우리 오빠 못 보셨나요?! 그, 멋있고 자상하고 정의로우면서도 여동생을 사랑해 마지않는… 그, 그런 사람인데요!”
아, 하고 셀린의 눈빛이 가장 먼저 차게 식었다.
그 다음은 세리아였다. 얼마 전까지 함께 숙식을 했던 사이니 벌써 잊어버렸을 리가 없었다.
리아 페르쿠스.
페르쿠스 저택에 남아있어야 할 그녀가, 어째서인지 아카데미를 활보하고 있었다.
셀린과 세리아의 두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의문이 담긴 눈빛이었다.
물론 눈을 마주친다고 해서 해결책이 나타날 리는 없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어 곤혹스럽기는 두 사람 다 매한가지였다.
짝사랑하는 사내의 여동생이 왜 이곳에 있는지.
그리고 왜 짝사랑하는 사내를 찾고 있는지, 그 까닭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리아와 대화를 나누는 것.
셀린은 다소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래도 리아와는 오래 전부터 면식이 있던 사이니, 그녀가 나서는 편이 나으리란 판단 덕이었다.
그 판단은 옳았다.
울상을 지으며 주변 사람들을 붙들고 다니던 리아의 눈빛이, 대번에 고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리아는 멍하니 셀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구명줄이라도 발견했다는 듯, 그녀가 더듬더듬 걸음을 옮겼다. 셀린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래도 연상으로서의 여유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최대한 흥분하지 않고, 타일러야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다닥 달려 리아가 셀린의 손을 덥썩 두 손으로 쥐었다.
숫제 울먹이는 투가 되어, 리아는 셀린에게 말했다.
"세, 셀린 언니! 혹시 우리 오빠 어디 갔는지 알아? 흑단 같은 머리카락에, 우수에 찬 금빛 눈동자는 마치 토파즈 같고, 오똑한 콧날과 날렵한 턱선이 멋진데다 탄탄한 어깨가 듬직하고 무엇보다 여동생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나중에 단 둘이 살기로 약속까지 한……."
"이, 이안 오빠가 언제 그랬어!"
의젓하게 리아를 대하겠다는 셀린의 결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지고 말았다.
셀린은 곧장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였고, 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하고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댄 채 고민하기를 얼마쯤.
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어라, 혹시 셀린 언니도 우리 오빠 어디 갔는지 몰라?"
"알긴 아는데… 이안 오빠가 왜 너랑 단 둘이 사냐고!"
그렇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한 둘을 보며, 세리아는 한심하다는 낯빛을 했다.
그녀는 남몰래 생각했다.
둘 다 나중에 처리해 둘까.
**
팍, 하고 은색 털을 지닌 표범의 몸이 둘로 쪼개졌다.
검 한 자루로 이루어낸 업적이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소리마저 나지 않는, 깔끔한 일도양단.
반토막 난 표범의 시체가 양옆으로 쓰러졌다. 그제야 울컥이며 터져 나온 핏물이 새하얀 눈밭 위를 덮었다.
뜨끈한 김이 피어 오르자 이끼 낀 대지가 얼핏 드러났다.
이곳은 침엽수림이었다.
핏물도, 눈물도 얼어붙는다는 대륙의 금역 중 하나.
이곳을 넘어서면 델피렘의 시체 중 하나가 묻혀 있다는 눈과 얼음의 땅이 드러나게 된다. 너무나 추워서, 극한의 환경에 적응한 극소수의 생물을 제외하고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물론 나는 그곳까지 갈 생각이 없었다.
내 목표는 이 침엽수림 안에 위치하고 있었으니까.
내 검격을 본 노기사가 박수를 짝짝 쳤다. 두 건틀릿이 부딪히며 금속성을 흘렸다.
그의 이름은 알렉스, 이미 나와 두 번이나 면식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마수화가 된 눈표범을 일격에 쓰러트린다라… 어느덧 완숙한 경지에 가까워지셨군요."
"그래봐야 오러 특성은 아직 개화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나는 자조의 웃음을 머금으며 그렇게 겸양을 떨었다.
이미 검술이나 마력의 양 자체는 익스퍼트 중위권을 향하던 참이었다.
그럼에도 오러의 특성이 아직 개화하지 않고 있었다. 시체 거인을 쓰러트리던 그때, 어떠한 선에 손이 닿았던 것만도 같은데.
그 이후로 그날의 감각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물론 이 또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 앞에서는 헛된 걱정에 불과했다.
알렉스 경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오러란 심상의 구현입니다. 의지가 극에 달했을 때… 정신이 육체를 초월하여 주위를 왜곡시키죠. 아직 도련님께서는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참고하겠습니다, 알렉스 경."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레 소녀가 건네는 수건을 받아들었다.
내 수발을 들고 있는 이는 하녀복을 입은 아비앙이었다.
어찌 보면 참 특이한 일행이었다.
알렉스 경은 유르디나 가문에서 나를 보좌하기 위해 파견한 가신이었다.
나와 안면도 있을 뿐더러, 가진 바 실력도 출중하고 최전선에서 싸웠기에 침엽수림의 지리에도 밝았다.
델핀 선배가 나름 나를 신경 써 붙여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아비앙은 네리스 선배가 내게 붙여준 종자였다.
비록 엘프 마을의 위치는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침엽수림의 숨겨진 길목은 잘 알고 있을 거라나.
아직 온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워도 제 신세를 잘 알고 있었다.
내 심기를 거스르면 그 끝이 가히 좋지 않으리란 점 정도는 숙지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오늘은 일단 일행끼리 찢어져 침엽수림을 보다 넓게 정찰해 보기로 했다.
일일이 몰려다니면서 대략적인 지리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침엽수림은 좁지 않았다. 그나마 두셋씩 떨어져 훑어보아야 무엇이라도 발견할 가능성이 컸다.
물론 아비앙이 입을 연다면 보다 많은 성과를 낼 수 있겠으나, 이는 너무 잔인한 처사였다.
결국 나는 알렉스 경과 아비앙을 내 일행으로 택했다.
사실 좀 더 친밀한 이들과 조를 짜고 싶었으나, 나를 노려보는 성녀와 엘시 선배의 눈빛이 매서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둘 중 하나를 놓고 간다면 나머지 하나가 가만 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무서웠다.
차라리 알렉스 경에게 여러 조언을 듣는 편이 마음은 편했다.
그렇게 나와 알렉스 경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내 검까지 깨끗이 닦아낸 아비앙이 멍하니 눈표범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 그 눈표범을 단 일격에……."
그 눈빛에는 희미한 공포와 선망이 담겨 있었다.
하기야, 알렉스 경은 눈표범이 침엽수림에서 가장 흔한 맹수 중 하나라고 했었다.
엘프들도 이 마수에게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닐 터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비앙의 머리 위에 손바닥을 턱, 하고 얹었다.
아비앙은 히이익, 하고 겁에 질린 숨소리를 흘렸다.
너무한 취급이었다.
고작해야 내가 한 짓이라곤, 두어 번 정도 아비앙을 기절시킨 적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안심하라는 듯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비앙. 너 하나 지키지 못할 만큼 내가 약하진 않거든."
아비앙은 공포에 젖은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 경은 흐음, 하고 묘한 눈빛으로 나와 아비앙을 바라보았다. 수상하다는 눈빛은 아니었다.
아비앙이 특기인 변신 마법으로 뾰족한 귀를 숨기고 있던 덕이었다.
다만 알렉스 경은 무심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러면 조금 노력하셔야겠군요, 도련님."
그게 무슨 소리냐고, 느긋한 반문을 내던지기 직전.
내 긴장의 끈이 다시 팽팽히 당겨졌다.
일종의 직감이었다. 어디선가 시작된 날카로운 파공성이 귓전에 내리꽂혔다.
내 손이 탁, 하고 아비앙에게 날아들던 무언가를 잡아냈다.
화살이었다.
나무로 만든, 조잡한 화살.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살의는 명백했다.
지금껏 팔짱을 낀 채 내 활약을 감상하던 알렉스 경이 검을 뽑아든 건 그때였다.
"엘프입니다… 소수인 것으로 보아,정찰조 같군요."
어리석게도.
그렇게 덧붙이며, 알렉스 경은 사나운 미소를 지었고.
반면 아비앙의 낯빛은 창백히 질리고 말았다.
방금 전 동족에게 살해당할 뻔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 보였다.
저쪽도 의도하고 쏜 화살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나는 그 위로의 말을 삼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눈 감고 있어라."
동족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는 없었으니까.
나와 알렉스 경이 땅을 박찬 것은 거의 동시였다.
설원에 피를 흩뿌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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