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9화 〉 5. 빵과 비수(37)
* * *
칼은 늘 솔직하다.
혀와 달리 거짓으로 휘둘러지는 법이 없었다. 발검을 하고, 검이 궤적을 그리기 시작하면 무언의 선포가 이루어진다.
생사결의 신호였다.
죽고 죽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고려할 필요가 없는 합의였다. 자비 따위는 불필요했다. 어설픈 동정은 실수를 낳을 뿐이었으니까.
적어도 북부에서는 그랬다.
알렉스 경은 그 진리를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한 듯했다. 묵직한 갑주를 걸치고 있음에도 눈 위를 내달리는 걸음걸이가 표홀했다.
쿵쿵거리는 발소리는 몇 번 이어지지도 않았다.
무시무시한 속력의 쇄도였다. 그는 어느덧 두터운 침엽수 하나를 앞두고 있었다.
직후 당연하다는 듯 휘둘러지는 일격.
정밀하지도, 절묘하지도 않은 야성적인 궤적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콰직, 하고 파열음과 함께 나무 밑동이 통째로 터져 나간다.
연한 황색의 섬유질이 제 살갗을 드러냈다. 지탱할 힘을 잃은 나무의 붕괴는 필연적이었다.
나무 위에서 새된 비명 소리가 새어 나왔다.
침엽수 위에 숨어있던 엘프 정찰병 하나가 떨어져 내린 것이다.
알렉스 경은 그를 향해 시선조차 던지지 않았다.
단지 남은 손을 하나 이용해, 엘프의 골통을 쥐었을 뿐.
그후, 또 한 번의 파열음이 들려오고 끝이었다.
곧장 땅 위로 내리꽂힌 엘프의 안면이 형편없이 으깨졌다. 단말마를 내지를 여유조차 없는, 깔끔한 즉사였다.
새하얀 눈 위로 쏟아져 내리는 핏물과 뇌수만이 그의 사망을 증언했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이대로 알렉스 경에게 엘프의 상대를 일임한다면, 살아남는 엘프는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는 안 됐다.
아비앙의 면전이기도 했으나,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정보였다.
엘프의 수급 따위는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미 전공이라면 수도 없이 세워 봤다. 이름을 가진 마수부터 시작해서, 고아원에 숨은 마인과 최근에는 마신의 권속까지.
엘프 따위를 물리친다고 해서 내게 돌아올 명예는 없었다.
오히려 성녀한테 아쉬운 소리나 한 번 듣지 않을까.
그럴 바에는 엘프를 생포하는 편이 옳았다.
알렉스 경만큼이나 나의 질주는 재빨랐다.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의 틈새로 몇몇 기척들이 전해졌다. 워낙 희미했던 터라, 얼핏 보기에는 자연물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숨결들.
그러고 보면 아비앙도 그랬었다.
아무리 적의가 없다지만, 나는 나무 뒤에 숨은 아비앙의 기척을 제대로 눈치 채지 못했었다. 이는 벽돌로 이루어진 아카데미 내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혹시 엘프는 자연물 사이에 있을 때 기척이 희미해지는 걸까.
나는 그러한 가설을 세우며 땅을 거칠게 박찼다.
팍, 하고 내딛은 지반으로부터 강한 반탄력이 느껴진 직후.
나는 어느덧 침엽수 위에 숨어있던 엘프 하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여리여리한 인상의 엘프 여인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그 불신이 어린 눈빛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통상적인 인간의 각력이 아니다.
불가능하다.
잘못 걸렸다.
틀린 감상은 아니었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수 미터에 달하는 높이를 치솟았다. 익스퍼트에 달한 검사들이란 예외 없이 이만한 힘을 지닌 괴물들이었다.
대륙을 통틀어도 수백이나 있을까 한다는 초인들.
하필이면 그중 둘을 마주친 엘프들의 일진이 최악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엘프는 뒤늦은 발악을 시도했으나, 나와 눈을 마주친 순간 끝이었다.
그녀는 활시위를 당기려다가,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자 시선을 옮겼다.
팔이 자리해야 할 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울컥, 하고 터져 나오는 핏물만이 보였을 뿐.
“으, 극……!”
콱, 하고 칼자루가 엘프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가해진 일격이었다.
소리를 내지르면 침엽수림을 배회하는 마수들이 몰려올 수 있었다. 그런다고 위기에 빠질 가능성은 적었으나, 최대한 조심할수록 좋았다.
엘프 하나가 힘없이 쓰러져 나무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지반에는 눈도 쌓여 있을 뿐만 아니라 푹신한 이끼도 자라 있었다. 메마른 체형의 엘프가 떨어진다고 죽음에 이르지는 않을 터였다.
만약 죽는다면 어쩔 수 없고.
그와 동시에 나는 탁, 하고 날아드는 화살을 잡아챘다.
뒤늦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에밀리!”
또 다시 엘프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문 채, 나를 증오를 담아 노려보았다. 맹렬한 살의를 담은 화살촉이 겨누고 있었다.
그 수는 무려 셋.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 활로 어떻게 셋이나 되는 화살을…….”
그때 내 감각에 묘한 기류가 잡혔다.
살랑이며 불어오는 바람.
이 북풍의 땅에, 이토록 상냥한 바람이 불어올 수 있다고?
나는 다급히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고, 하늘로 쏘아진 세 발의 화살은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내게로 쇄도했다.
우선 쥐고 있던 화살로 하나를 격추.
남은 화살 중 하나를 손으로 채서 나머지 하나를 쳐낸 뒤, 역으로 엘프에게 내던졌다.
엘프는 당황한 듯했으나 곧 침착한 대응을 보여주었다.
휘익, 하고 휘파람이 불자마자 쏘아지던 화살이 탁, 하고 허공에서 튕겨 나갔다.
만일 내가 평범한 검사였다면 다소 난감한 처지에 처했을 터였다.
최소한 땅으로 한 번 내려가거나 했겠지.
그러나 엘프로선 불행하게도, 나는 정석적인 싸움을 하는 검사가 아니었다.
도리어 내가 제일 자신 있는 투척 무기는 따로 있었다.
텅, 하고 공기를 박차고 내달리는 은빛의 궤적.
속도와 질량 모두 화살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우월했다. 눈치 챈 찰나에는 이미 둔탁한 충격이 어깨에 가해진 뒤였다.
팍, 하고 축포처럼 핏물이 허공으로 비산했다.
엘프 여인이 채 반응을 하기도 전에, 나는 정중동의 묘리로 손도끼를 되돌렸다. 수축한 근육이 도끼를 놓아주지 않았던 탓에, 엘프 여인의 몸이 다소 기울었다.
그리고 그대로 추락.
나는 땅 위로 뛰어내리며 되돌아온 손도끼를 낚아챘다.
이후 저벅저벅 걸어, 엘프의 앞으로.
얼핏 보니 엘프의 정찰조는 넷으로 이루어진 듯했다. 그중 둘은 다소 실력이 떨어지는 듯했고, 나머지 둘이 선임조원이 아닐까 싶었다.
그나마 저항이라도 할 수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나와 알렉스 경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알렉스 경 또한 남은 엘프 정찰조를 처리하기 직전으로 보였다. 나는 후우, 하고 새하얗게 흩어지는 숨결을 보며 물었다.
북부에 어울리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살고 싶나?”
“닥쳐……!”
생존욕구가 유독 강한 엘프임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눈동자에서는 증오가 줄기줄기 뻗치고 있었다.
제 어깨를 감싼 채 꿈틀거리는 몸짓에서 끔찍한 고통이 여실히 전해졌다.
악문 잇새로 흘러나오는 음색은 절절이 달아올라 있었다.
그 열기에 눈이 녹아내릴 만큼.
“너희, 너희 따위한테 목숨을 구걸할 것 같아?! 너희만 아니었어도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았어……!”
“그쪽이 이겼으면 우리가 그렇게 됐을 테고.”
나는 후우, 하고 살짝 거칠어지려던 숨을 몰아쉬며 몸을 낮췄다.
엘프 여인과 눈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감정의 동요가 극심하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날 만나서 다행이야, 나는 북부 출신이 아니거든. 필요한 정보만 얻는다면 너희와 원한관계는 없어… 무사히 풀어주겠다고.”
“쿨럭, 퉤!”
핏물 섞인 침이 내뱉어졌다.
내 얼굴로 뱉고 싶었던 듯했으나, 정작 힘이 딸려 내게는 미치지 못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팍, 하고 지반 위로 엘프의 안면이 처박혔다. 어느덧 내 손이 엘프의 머리를 쥔 채 땅바닥에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푹신한 이끼 아래에는 꽁꽁 얼은 지반이 기다린다.
일단 코뼈가 으깨지는 감각이 느껴졌을 테고, 그 이상으로 숨을 쉬기 괴롭겠지.
그 증거로 엘프는 억눌린 비명을 흘리며 팔과 다리를 바둥거리고 있었다. 더듬거리며 남은 손으로 비수를 꺼내긴 했으나, 그뿐.
나는 어린애 손목을 비틀 듯 간단히 엘프의 비수를 빼앗았다.
우득, 하고 그 과정에서 엘프의 손목이 부러지자 더욱 처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흐으, 으으으으윽! 으으으으으으으응!”
땅에 파묻혀 허공에 울려 퍼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다시 엘프의 머리채를 붙잡고 들었다.
엘프의 눈동자에는 이제 선명한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저항하지 않으면 폭력은 쓰지 않아. 약속하지… 대신, 더 반항적으로 굴면 나도 널 어떻게 할지 몰라.”
엘프는 너 하나뿐만이 아니니까.
생략되긴 했으나, 내가 내뱉은 맥락 속에는 그러한 경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엘프 여인은 다소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일개 정찰조조차 이럴 정도라면, 인류와 엘프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의 골이 상상 이상인 듯했다.
슬슬 다시 한 번 엘프의 얼굴을 지면 위에 처박을까,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크악!”
짧은 저음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와 엘프 여인의 눈길이 곧바로 그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어느덧 피를 잔뜩 흘린 채 쓰러진 엘프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앞에 당당히 선 자는 알렉스 경.
그의 손에는 무기가 들려있지 않았다. 싸우던 도중 검을 땅에 떨어트린 모양인데, 어쩌면 일부러일지도 몰랐다.
그의 건틀릿에는 피가 흥건했다.
군데군데 부은 엘프 사내의 얼굴을 보니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 모양이었다. 알렉스 경은 그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려 들자, 그제야 땅에 떨어진 검을 다시 쥐었다.
그 이후에 이어질 행동은 명확했다.
엘프 여인의 입에서 처량한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마, 마티스……!”
꽤 애절한 음색이었다.
그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 알렉스 경조차 일순 그녀를 돌아보았을 정도였다. 엘프 여인은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을 때보다 더욱 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이를 신경이나 쓸 알렉스 경이 아니었다.
그는 사형집행인이 단두대의 고삐를 풀 듯 검을 내려치려고 했다.
일순 망설이던 내 눈에, 누군가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아비앙.
그 자그마한 소녀가, 필사적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 결사적인 낯빛에는 어떻게든 알렉스 경을 막아야 한다는 일념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봐야 한참이나 늦을 텐데도.
마법 따위는 쓸 수 없었다. 구속구에 묶여, 아비앙은 나나 네리스 선배가 시동어를 외우면 그대로 머리가 터져나갈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내달리는 그 모습이, 글쎄.
검극이 참수의 궤적을 그리고, 엘프 여인과 아비앙이 절망적인 눈빛을 한 그때.
캉, 하고 날카로운 금속의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맞부딪친 운동량이 꽤 컸던 탓인지 자그마한 불꽃이 튀어올랐을 정도였다. 알렉스 경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일순 휘청였다가, 곧장 자세를 바로잡았다.
의이하다는 듯한 노기사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를 막아선 것은 나였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날린 손도끼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