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0화 〉 5. 빵과 비수(38)
* * *
알렉스 경의 검에 튕겨나간 손도끼는 허공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체공시간은 길지 않았다. 내 손도끼가 이내 내 손으로 되돌아온 덕이었다.
나는 또 다시 후우,하고 고심에 젖은 숨결을 내뱉어야 했다.
“알렉스 경,우리는 정보를 수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잠시 머리채를 쥐고 있던 엘프 여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얼떨떨한 눈빛으로 엘프 사내와 알렉스 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나는 내던지듯 그녀의 머리채를 팽개쳐 버렸다.
내 몸이 서서히 일으켜졌다.
“그러려면 입은 많을수록 좋죠…상식 아닙니까.”
흐음,하고 알렉스 경은 침음을 삼키며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그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거두었다.
“아직 온정이 남아계시군요,도련님.그러나 곧 도련님께서도 아시게 되실 겁니다.”
스륵,하고 납검을 하며 알렉스 경은 발걸음을 돌렸다.
남은 엘프들의 처우는 내게 전적으로 일임하겠다는 뜻이었다.
예상 외로 순순한 태도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북부는,동부만큼 따뜻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있나.
들숨과 날숨이 전부 새하얗게 얼어 흩어지는 이곳.
눈물과 핏물마저 양분이 되어,식물과 이끼가 적색을 띠는 이 생지옥에서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이제 남은 것은 포로들을 압송하는 일뿐이었다.
심문은 군영에서 진행될 터였다.공식적인 유르디나 군의 심문뿐만 아니라,네리스 선배가 동석하는 비밀 심문 또한 이루어지겠지.
나는 신음을 흘리는 엘프 여인을 뒤로 하고,손도끼를 허리춤에 매달았다.그리고 아직도 넋을 놓고 서 있는 아비앙에게 속삭였다.
“……아비앙.”
흠칫,하고 놀라 나를 바라보는 엘프 소녀.
그 눈동자에는 너무나 많은 감정이 일렁이고 있어서,속내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픈 말만을 남겼다.
“나대지 마라.”
최선의 조언이었다.
약해빠진 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고.
한때 내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한 마디를 끝으로,우리의 귀로는 결정되었다.
살아있는 엘프를 셋이나 잡았으니,첫 정찰의 성과치고는 훌륭했다.
참고로 내가 처음으로 제압했던 엘프는 죽기 직전이었다.
힘이 조금 과했던 모양이었다.
대신 이후 힐링 포션으로 치료해 주었으니,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힐링 포션은 델핀 선배한테 무료 제공받을 수 있었으니까.
엘프와의 첫 조우였다.
북부의 하늘은 여전히 흐리기만 했다.그 햇살조차 안개처럼 흐트러질 만큼.
**
“아카데미 예비 시험을 보러 왔다고?”
맑은 하늘,아직은 부담스러운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이른 오후였다.
어딜 가나 눈에 띌 외모를 지닌 여인 셋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아카데미의 중앙대로 앞,찻집이 제공하는 그늘 아래의 식탁이었다.
막 의문을 던진 여인은 황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빨대를 쪽쪽 빨고 있던 참이었다.
그 색조만으로는 묻는 이와 듣는 이를 구분하기가 애매했다.왜냐하면 둘 다 검은 머리카락에,황색 계열의 동공을 지니고 있었던 탓이었다.
다만 그 분위기만큼은 상이했다.
질문을 던진 여인은 목덜미를 시원하게 드러내고 있었다.등 뒤로 단정히 정리한 머리카락이 말총처럼 찰랑였다.
얼핏 보기에도 활달한 인상이었다.
반면,질문을 받은 여인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그 창백한 피부가 보는 이로 하여금 병약한 인상을 가지도록 유도했다.
두 사람의 이름은 각각‘셀린 하스터’와‘리아 페르쿠스’였다.
셀린의 물음에 리아는 다소 지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정확히 말하자면 입학시험의 준비 과정이에요.아카데미의 상학부는 온갖 기괴한 과제를 내주기로 유명하거든요.그래서 몇 달 전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는 이들도 드물지는 않죠.”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너희 상단 망했다며.”
“익명의 독지가께서 자금을 지원해 주신 덕에…….”
다소곳이 내놓은 대답이었으나,셀린은 조금도 납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셀린의 떨떠름한 눈빛이 리아를 향했다.
물론 리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도리어 그녀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제 사랑하는 오라버니께서는 어디 계신지?”
“북부.”
숨길 이야기도 아니라 생각했는지,셀린은 툭 내던지듯 그렇게 말했다.
리아의 눈동자에 의문이 차올랐다.
대외적으로 이안이 북부로 떠난 것은 비밀로 하고 있었다.일단은 첩보 활동인데,굳이 공표할 이유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다만 아는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을 정보이기는 했다.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고,유르디나 시의 한복판을 지나,유르디나 성에서 하룻밤을 머무른 일행이었다.
그에 대한 소문이 퍼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지 공개적으로 이를 언급하지만 않고 있을 뿐이었다.
리아도 아마 며칠만 더 고생했다면,금세 정보를 접할 수 있었을 터였다.
오빠를 보고 싶은 마음에 너무 급히 아카데미로 온 것이 실책이었다.
셀린은 슬쩍 주위의 눈치를 살피더니,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아는 대로 사정을 설명했다.
“유르디나 선배…그러니까 유르디나 가문의 차기 가주 알지?세리아의 언니 말이야.그 선배가 이안 오빠한테 도움을 요청했거든.요즘 엘프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나.”
나름 최선을 다한 설명이었으나,리아는 조금도 납득하지 못한 모양새였다.
오히려 더욱 짙어진 의문을 담아 반문할 정도였다.
“아니,죽을 뻔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음,한 달 됐나?”
의외로 평온한 음색이었다.
아니,포기한 자의 모습이라 봐야 할지도 몰랐다.이를 방증하듯,그렇게 말하는 셀린의 낯빛은 허탈하기만 했다.
이미 몇 번이고 겪은 일이었다.
슬슬 이안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그리고 그 이상으로 짊어져야 할 의무의 크기도 크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던 참이었다.
도리어 셀린은 그 사실을 실감할 때마다 속이 쓰리기만 했다.
제 무능이 칼날처럼 뱃속을 찌르는 것만 같아서.
그 짐을 나누어 짊어지고 싶어도,그럴 수 없다.최근 셀린이 밤낮없이 수련에 몰두하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어떻게든 다시 이안의 곁에 서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셀린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이안만 엮이면 이성을 잃어버리는 리아였다.고작 그 정도로 납득하고 넘어갈 리가 없었다.
소녀가 벌컥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너무 양심 없잖아?!우리 오빠가 얼마나 고생했는데…죽을 뻔한 사람을 다시 전장으로 보내?!그걸 셀린 언니는 또 두고 봤고?!”
“야,야.진정해라.나라고 뭐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유르디나 가문에 공식으로 항의하겠어요.”
분을 이기지 못하고,몸을 부들부들 떨던 리아가 내뱉은 말이었다.
어느덧 그 황금빛 눈동자에서 매서운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볼 때는,모종의 강요나 협박이 있었던 것이 분명해!그야,우리 오빠잖아?그렇게 위험한 곳을 자진해서 갈 리가 없어!혹시 그 유르디나의 차기 가주란 분이 순진한 오빠를 꼬시기라도 했다면…….”
“네,우리 언니께서.”
한기가 풀풀 풍기는 목소리였다.
어찌나 차가운 음색이었는지,길길이 날뛰던 리아가 몸을 흠칫 떨 정도였다.동그랗게 뜨인 황금빛 눈동자가 한파의 근원을 향했다.
회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세리아였다.
그녀는 싱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세리아로서는 드문 일이었다.다만 그것이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어째서일까.
리아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한 줄기의 식은땀을 느꼈다.
“우리 언니께서 그러셨으리라 말씀하시는 건가요,아가씨?영민과 가신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합리적이고 적절한 판단으로 늘 승리가도를 달려오던 우리 언니가 무슨 짓을 했다고요?”
“그,그게…꼭 그랬다는 게 아니라요…….”
리아는 천직이 상인이었다.
지금껏 진짜배기 검사의 살의를 받아본 적은 얼마 존재하지 않았다.하물며 어울리지 않게도 무례한 말까지 일삼은 뒤였다.
한없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리아는 한 가닥 미련을 놓지 못했다.
“그,그럴 가능성을 마냥 부정할 수는 없다는…….”
물론 그 반항은 길지 못했다.
세리아의 등 뒤로 그늘이 지는 착시가 일었던 탓이었다.리아는 스스로의 동물적인 감각을 신뢰했다.
소녀의 머리가 곧장 식탁에 처박혔다.
“죄송합니다!너무 흥분해서 실언했어요!”
“네,이안 선배의 동생이니 참을게요.”
세리아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답했다.
그 망설임 없는 답변에,리아는 옅은 신음을 흘려야 했다.
페르쿠스 저택에서는 몰랐는데,이 여자는 위험했다.
얼핏 보기엔 얌전해도 특정 화제에 유독 예민한 인물이었다.조심하지 않으면 난데없는 화를 입을지도 몰랐다.
셀린은 그 몰골을 보며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태도였다.
능숙한 화제 전환이 이어졌다.
“그래서,너는 무슨 장사를 하려고?”
그 기회를 놓칠 리아가 아니었다.그녀는 곧장 고개를 치켜들고 설명을 시작했다.
“아,아아!그러니까,그…마수 관련 상품을 다루려고 하는데,요즘 제도부터 시작해서 인기가 많잖아?마수에 대한 거부감을 차차 줄여가면서,일종의 유행 품목으로…….”
“마,마수?!”
마수 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셀린의 눈이 단박에 반짝였다.
리아는 그 호응에 우쭐해서 제 계획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사실 이전부터 계획하고 있다가,실현 직전에 상단이 파산하고 말았다는 둥.
그래서 유통망이나 여타 필요한 인맥들은 전부 챙겨두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세리아로서는 약간의 흥미조차 가지 않는 정보들뿐이었다.
단지 차를 홀짝이면서, 턱을 괸 채 속으로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언니께서,이안 선배를 몸으로 유혹해?
푸흐,소녀의 입에서 조그마한 조소가 흘러나왔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두 사람인데.
절대로 그따위 참사는 벌어질 수 없었다.
만일,벌어진다면?
그 가정조차도 역겨워서,세리아는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었다.
절대로.
**
한편,이안은 엘프를 군영으로 압송한 뒤 천막으로 향했다.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엘프는 치료가 필요했다.성녀의 허가가 떨어진 뒤에야 본격적인 심문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안은 부스럭거리는 기척에 눈을 떴다. 워낙 혼곤히 자고 있던 탓에, 누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눈치는 챘어야 하는데.
이안은 익스퍼트에 이른 무인이었다. 아주 사소한 신호조차도 놓치지 않고 눈을 떴어야 했다.
그런데 눈을 뜨니, 이안의 시야에 수상한 그림자가 띄었다. 이미 이안의 허리춤을 깔고 앉은 채였다.
그 보드라운 탄력으로 보아 여성이 분명했다.
이안은 어렴풋한 불빛으로 그 정체를 추론해낼 수 있었다.
하늘거리는 갈색 머리카락과, 블루사파이어를 닮은 눈동자.
'엘시 라이넬라'였다.
사내가 기겁해서 소리를 높였다.
"아니, 엘시 선배! 지금 이게 무슨 짓……!"
"조, 조용히 해!"
그러나 엘시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덜덜 떨리는 손이 이안의 상체를 더듬거리고 있었다. 옷을 벗기려는 시도로 보였는데, 남성 경험이 없다 보니 그 손길은 한없이 미숙하기만 했다.
가만히 두었다간 다음날 아침에나 옷을 벗길 기세였다.
엘시의 눈동자는 이미 빙빙 회전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당황했다는 뜻이었다.
"저, 전부 네 잘못이야… 왜, 왜 나만 안 되는데!"
그리고 그 숨결에서 느껴지는 옅은 술냄새를 맡으며, 이안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 빌어먹을 술버릇이여.
그는 북부에 있는 동안 일행에게 금주령을 내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일단 이 위기를 넘긴 다음에 말이다.
아니, 기회인가?
이안은 조금 헷갈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