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1화 〉 5. 빵과 비수(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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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시 선배의 방문은 충동적으로 보였다.
숨결에서 묻어나오는 술 냄새와 덜덜 떨리는 손만 보더라도 그랬다. 만일 계획적으로 나를 덮치려 했다면, 이보다는 침착해야 했다.
그러나 엘시 선배는 나를 깔고 앉은 채로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남성복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는 점이 첫 번째 원인이었다.
남성이 여성의 속옷에 무지하듯이, 여성 또한 남성이 주로 입는 복장에 대한 이해도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나도 델핀 선배와 첫 경험을 할 때 고생을 많이 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가슴을 감싼 속옷이 어떻게 고정되어 있는지, 어떻게 벗겨내야 하는지 감이 와야 말이지. 나는 결국 힘으로 뜯어내는 편을 택했다.
물론 마법사인 엘시 선배로서는 택하기 힘든 선택지였다.
마력으로 강화된 근력이라면 불가능은 아니겠으나, 옷을 뜯어낸다는 것은 그만한 각오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처럼 흥분 중의 실수를 가장하지 않는 한, 행동으로 옮기기는 까다로웠다.
그리고 두 번째, 엘시 선배는 명백히 긴장해 있었다.
사실 앞서 나열한 원인은 하의를 벗길 때나 해당하는 소리였다. 벨트를 쓰지 않는 여성들은 이를 벗겨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상의는 이야기가 달랐다.
단추를 벗기거나 하는 작업이 무어가 어렵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시 선배가 내 옷을 전혀 벗기지 못하고 있는 까닭.
그것은 전적으로 엘시 선배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탓이었다.
취기가 오르면 정밀작업에 집중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심지어 도를 넘은 긴장에 손까지 안쓰러울 만큼 떨고 있으니, 내 옷을 벗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 덕에 나는 금세 평정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당혹감이 온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보다 넓은 시야에서 이 사태를 파악할 여유는 확보할 수 있었다.
일단 내 손은 묶여 있었다.
침대의 기둥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굉장히 어설픈 처사였다.
아무리 마력의 끈으로 묶어봐야, 침대는 목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침대를 통째로 접어버린다면 대응이 불가능했다.
물론 나는 그처럼 극단적인 저항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더듬거리는 엘시 선배의 손길이 귀엽기도 했고.
또 허리춤 위에서 움찔거리는 말랑한 살덩이의 감촉이 기분 좋기도 했다.
이처럼 합리적인 사고 끝에, 나는 엘시 선배의 설득에 나섰다.
“엘시 선배, 그만하시죠.”
“네, 네가 잘못한 거야…….”
그러나 엘시 선배는 이미 설득이 통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초점조차 맞지 않는 눈과, 울먹임마저 섞여 있는 한탄에는 강간범의 전형적인 자기합리화가 엿보이고 있었다.
슬슬 제압에 나설까.
엘시 선배는 술에 취했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고작해야 마력의 끈으로 나를 속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심지어 거리를 두고 기습을 당한 것도 아니고, 마법사가 검사 바로 앞까지 찾아왔다?
함정이 없는 한 패배할 리가 없었다.
물론 엘시 선배는 실력 있는 마법사였다. 아무리 취한 상태라고 해도 그 노련한 솜씨가 어딜 가진 않을 터였다.
어중이떠중이 검사쯤은 역으로 제압해 버리겠지.
내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나는 엘시 선배의 엉덩이가 비비적대는 감촉을 느끼며, 다시 한 번 설득을 시도했다.
말랑하고 탄력 있는 느낌이었다.
정작 엘시 선배는 제 엉덩이가 내 몸에 마찰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테지만.
“아니, 엘시 선배… 일단 진정 좀 해요. 왜 갑자기 이러는데요? 그리고 제가 잘못했다는 건 무슨 소리고요.”
내 차분한 목소리에 엘시 선배도 조금이나마 이성이 되돌아온 걸까.
살짝 물기 어린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여인이 보일 모습이라, 나는 조금 속이 쓰렸다.
사실 나와 엘시 선배의 관계는 무척 복잡했으니까.
단순한 친구나 동료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연인은 아닌 애매한 사이.
여자 경험이 전무한 나는 이럴 때마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너, 건드렸다며.”
담백한 물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엘시 선배가 스스로의 맥락 속에 갇혀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체를 하다가, 되물었다.
“뭘요?”
“당연히 성녀, 그 젖탱이 년 말이야!”
흐음, 하고 나는 침음을 삼키며 슬쩍 엘시 선배의 시선을 피했다.
이건 조금 의외였다.
결국 흐지부지되긴 했으나, 그날 밤 있었던 일은 나와 성녀만의 비밀이었다. 이 사실이 널리 퍼져봐야 이익을 볼 사람이 없었다.
나도, 성녀도 그랬다.
나는 일단 엘시 선배한테 시달려야 할 테고, 성녀 또한 순결의 맹세를 어길 뻔한 셈이었으니 더욱 곤란하겠지.
그러나 의외로 성녀는 순순히 엘시 선배에게 그날 밤 있었던 일을 말한 듯했다.
엘시 선배를 그토록 신용하고 있었던 건가.
아니라면 그 이상의 이익을 볼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걸까.
어느 쪽이든 내겐 최악이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돌려보려고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엘시 선배의 눈동자에 눈물이 방울지기 시작했다.
“나는 건들지도 않았잖아! 술 먹고 덮치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런데 왜… 너, 너도 그 젖탱이에 홀린 거야?!”
“아니요, 뭐…….”
정확한 지적이었다.
차마 거짓을 말할 수 없었던 나는 결국 말끝을 흐렸다. 엘시 선배는 그러자 더욱 분하다는 듯 주먹으로 내 가슴을 팍팍 내리쳤다.
그래봐야 간지럽지도 않았다.
엘시 선배도 나를 진심으로 때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단지 내게 분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리라.
“내가 조심하라고 했잖아… 성녀, 그 년이 얼마나 자랑을 해댔는지 알아?!”
“무슨 자랑을 해요?”
“내기였으니까!”
이제야 내 머릿속에서 배후 사정이 점점 그려지기 시작했다.
일전에 엘시 선배가 나를 유혹할 때, 떠나가면서 그러한 경고를 넘긴 적이 있었다. ‘성녀를 조심하라’라고 했던가.
그 이유는 단순했다.
성녀와 내기를 벌였던 탓이었다.
오늘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략적으로 나를 유혹하는 것으로 승부를 보자고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참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러다 내가 둘 다 덮치면 어쩌려고 그랬는지.
아니, 그때는 내가 어째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나.
하여튼 나는 엉성하게나마 지금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의문은 이제 하나뿐이었다.
“아니, 왜 그따위 쓸데없는 내기를 해요?”
“쓰, 쓸데없다니!”
나의 논리적인 지적에도 엘시 선배는 진정하는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벌컥 화를 내기까지 했다.
“네가, 네가 자꾸 델핀 그 년이랑 단 둘이…….”
말하다 보니 분했는지 엘시 선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뺨을 타고 한 방울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짓씹어진 입술에서 엘시 선배의 비참한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놈의 소문 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근본적으로는 내 잘못이긴 했다.
엘시 선배는 제 젖가슴을 팔로 받치며 애써 강조했다. 그런다고 성녀나 델핀 선배에 미칠 리가 없을 텐데도.
엘시 선배와 두 사람 사이에는 근본적인 격차가 있었다.
특히 성녀는 신의 기적을 논해야 할 지경이었다. 엘시 선배도 나름대로 부푼 가슴을 가지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기준에 한했다.
날짐승과 들짐승을 같은 선상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엘시 선배의 자기주장에는 한계가 존재했다.
“자, 봐! 나한테도 있잖아! 나, 나도 너 없을 때 고백 많이 받아본 몸이야… 그런데 내가 친히 고백까지 했는데, 나 대신 다른 년을 건드려? 날 만지면 되잖아!”
“그럼 손부터 풀어주시든가요.”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만지고 싶어도 손을 풀어줘야 만질 수 있지 않겠는가.
내 허리를 깔고 앉은 채 씩씩대던 엘시 선배는 그제야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이내 탁, 하고 풀려나는 두 손.
나는 오랜만에 얻은 자유를 느끼며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정작 판이 이렇게 되니 도리어 긴장한 쪽은 엘시 선배였다.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의 몸이 눈에 띄게 움츠러져 있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서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러자 나와 엘시 선배는 영락없이 마주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것도 엘시 선배가 내 허리를 다리로 휘감고 있었기에, 무척이나 밀착한 구도로.
블루사파이어를 닮은 눈이 살짝 내리깔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내게 조심스레 말했다.
“그, 나 술도 먹었고 아직 덜 씻었는데…….”
“그런데 절 덮치려 그랬어요?”
엘시 선배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그녀가 두 검지를 마주치며 꼼지락거렸다.
마치 벌을 받는 강아지 같은 표정이었다.
“취, 취했으니까 그랬지! 얼마나 내가 조롱을 당했으면 술을 그렇게 마셨겠어?!”
“그럼 조롱당하지 않게 해줄게요.”
그리고 나와 엘시 선배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서로의 숨결이 섞이는, 달콤한 간극.
엘시 선배의 몸이 더욱 뻣뻣이 굳었다. 내가 다가갈수록 더욱 움츠러드는 모양새였다.
“……덮치면 되는 거죠?”
최후통첩처럼 던져진 하나의 질문.
엘시 선배는 더욱 얼굴을 붉히면서,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그러든 말든 이미 내 마음은 기운 뒤였다.
나는 조금 화가 나 있었다.
최근 나를 둘러싼 여인들의 행태에 대해서 말이다.
매일 밤 찾아와 괴롭히거나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했다.
특히 엘시 선배는 나를 무려 두 번이나 찾아왔으니, 본때를 보여주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찾아온 최후의 순간, 엘시 선배는 눈을 질끈 감고 도망치기를 택했다.
“우, 우선 씻고 나서… 꺄아아아아악!”
그러기도 전에, 내 몸이 그녀의 몸 위로 덮치듯 포개어졌지만 말이다.
일렁이는 불 그림자 사이로 두 인형이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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