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43화 (343/649)

〈 343화 〉 5. 빵과 비수(41)

* * *

레, 오, 릭.

그 세 음절이 유독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직감이라고 해야 할지.

어떠한 동물적 감각이 예견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끝에는, 내가 그의 목젖을 겨누고 있으리라고.

그러나 아직 내게는 걱정거리가 남아있었다.

바로 베네타가 지나치게 협조적이라는 점이었다.

패배한 직후, 목숨마저 던질 각오로 반항하던 여인이었다. 이제 와서 정보를 술술 부는 까닭을 알기 힘들었다.

톡, 톡. 내 검지가 탁자를 두어 번 두드리기 시작했다.

혹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베네타의 낯빛에서는 어떠한 균열도 엿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베네타가 특별한 훈련을 거쳤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포로가 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거짓 증언을 섞는다든지.

내 곁에 네리스 선배가 시립하고 있는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첩보원으로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그녀였다.

최소한 나보다는 미세한 조짐을 잡아낼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네리스 선배에게 눈짓을 던졌으나, 결과는 부정.

그녀도 특별한 낌새를 채지는 못했단 뜻이었다.

그렇다면 일단은 베네타의 증언을 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진위를 가리려 해봐야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어차피 베네타의 증언은 황녀의 검수를 거칠 예정이었으니까.

‘용의 눈’은 타인의 심리를 비춘다.

진위를 판별하기 위해 이보다 적합한 능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을 끝마친 내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본격적인 심문을 시작하겠다는 신호였다.

첫 번째로 던질 질문은 간결했다.

“……레오릭 님? 그리고 제물?”

“네, 레오릭 님… 모르셨어요? 그분은 인간 출신이신데. 그것도 유르디나 군에 속해 있던.”

조롱 섞인 답변이었다.

그 내용조차 황당해서, 나는 일순 베네타가 나를 놀리나 싶었을 정도였다.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럼 당신들 적이잖아?”

내 지적에 곧장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단지 베네타는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잠자코 노려보았을 따름이었다.

여전히 증오가 서린 눈빛이었다. 무슨 의도인지 내게 협조는 하고 있으나, 아직은 인류를 향한 앙금이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한때 적이었던 인간을 두고 ‘님’이란 존칭을 쓰다니.

나로서는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우리 엘프들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죠?”

“무고한 북부 민중들을 약탈하고, 괴롭히는 살인마 집단. 그리고 요즘에는 동족을 먹어치우기도 한다지?”

복수라도 하듯 던져진 조롱이었다.

그리고 이는 제국에 널리 퍼진 인식이기도 했다. 오랜 전쟁 속에서 인류와 엘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그 결과 서로를 발견하는 즉시 죽이고 있는 형편이었다.

베네타 또한 이를 모르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다만 내가 두 번째로 던진 조롱은 예상하지 못했던지, 흠칫 몸을 떨었을 뿐.

처음으로 보이는 동요였다.

이내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황급히 내게 변명하려 들었다.

“그, 그건 오해가……!”

“오해고 나발이고 관심 없어. 그 레오릭이란 사람과 제물에 대해 말해 봐.”

물론 나는 그 구구절절한 변명을 들어줄 의사가 없었다.

베네타는 내 까탈스러운 태도에 짐짓 불만스러운 눈빛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불평을 들어줄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결국 엘프 여인은 기나긴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고집이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제야 나는 보다 자세한 사정을 청취할 수 있었다.

“당신들은 우리를 그렇게 보고 싶겠죠. 삶의 터전을 빼앗고 침범하는 더러운 악마들… 하지만 그건 당신들이 우리에게 뒤집어씌운 오명에 불과해요.”

“그 증거가 레오릭이고?”

“네, 처음 기절한 종군사제를 발견했을 땐… 솔직히 죽여 버릴까 싶었죠. 마침 전투 직후라서 다들 날이 서 있었거든요.”

“그런데 죽이지 않았고.”

“빵을 주었으니까요.”

다소 맥락을 이해하기 힘든 대답이었다.

막힘없이 이어지던 내 반문이 멈칫했다. 대신 나는 팔짱을 낀 채 자그마한 침음을 흘렸다.

다행히도 베네타는 나름 눈치가 있어 보였다.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는지, 여인은 느긋한 이야기를 곁들였다.

“우리 엘프들의 오랜 전통이에요… ‘빵은 빵으로, 비수는 비수로.’ 호의는 호의로 갚고, 적의는 적의로 갚으라는 뜻이죠. 그리고 레오릭 님이 기절해 있던 이유는, 우리 엘프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래서 호의로 되갚았다?”

“네, 우리는 엘프니까요.”

묘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나는 무심코 조소를 머금을 뻔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굳이 상대를 도발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대신 나는 궁금했던 점을 캐물었다.

“그런데 그 종군사제가 제물을 바친다고? 주변에 널린 마수의 시체를 써도 될 텐데, 머나먼 남부에서 희귀한 마수를 들여와야 할 필요가…….”

“특수한 의식이거든요.”

‘특수한 의식’이라.

나는 그 정보를 조용히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이에 대해서는 성녀와 엠마에게 조언을 구할 예정이었다.

천신교의 사제도 제물을 바칠 때가 있었다. 주로 능력 밖의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그 산 증인이 바로 나 아니었던가.

지금껏 나는 죽을 위기를 몇 번이고 겪어왔다. 그럴 때마다 번번이 살아날 수 있었던 까닭은, 성녀가 귀한 제물을 바쳐가며 나를 되살려냈던 덕이었다.

그러니 제물이 필요하다는 증언 자체에 문제는 없었다.

다만 특수한 제물을 요구하는 특수한 의식이 존재하는 것인지, 나는 잘 알지 못했다. 이는 성녀에게 물어봐야 할 터였다.

더불어 아비앙의 사례도 신경 쓰였다.

그녀가 당한 생체 개조는 연금술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그렇다면 그 ‘특수한 의식’이 연금술과 관련되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엘시 선배가 쌍두사를 발견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속으로 엘시 선배에게 감사의 말을 올리며, 재차 물었다.

“그 특수한 의식을 행할 수 있는 건 레오릭뿐인가?”

“네, 침엽수림의 엘프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분도 그분이시죠.”

“도대체 왜?”

본질적인 의문.

송곳과도 같이 파고드는 또 하나의 물음에, 베네타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 특수한 의식에 무슨 효능이 있는 거야. 외인에 불과한 인물이 종족의 실질적 지도자로 떠오른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이미 말씀하셨잖아요?”

베네타는 굳이 그렇게 물을 필요가 있냐는 듯,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었다.

일순 여인의 등 뒤에서 뱀의 혀가 날름거리는 환각이 보였다.

내 미간이 자연스레 좁혀졌다.

“동족을 먹는다… 그래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들었어. 장애가 있거나 늙은 엘프들을 제물로 ‘과실’을 따먹는다고… 역겹지 않았나?”

“역겨웠죠.”

후후, 하고 베네타는 힘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눈동자를 흐릿한 광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일렁이는 감정 속에서 비릿한 절망의 파편이 비쳤다.

“배를 곯아본 적이 있나요? 우리 엘프들은 수도 없이 굶주림을 겪어왔죠. 무려 수백 년을 살아가는 동안… 온몸이 무기력해지고, 피가 바짝바짝 마르다가, 종래에는 깜박깜박 정신을 잃어요. 그동안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른 채.”

“그래서 동족을 죽이셨다?”

“죽이다뇨?”

진심으로 의문이라는 표정으로, 여인은 그렇게 말했다.

그 눈빛의 깊숙한 곳에서 어떠한 불꽃이 느껴지고 있었다.

광증이다.

“당신은 몰라요, 수백 년… 수백 년을 그렇게 고통 받아야 한다고요! 우리는 몰랐어요, 사는 것이 마냥 좋다고만 생각했죠. 그것이 세계수가 내린 은혜라고… 그러던 어느 날, 레오릭 님께서 찾아오신 거예요.”

느닷없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목소리였다.

그 열망에 젖은 신앙 고백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점을 찍었다. 쾅, 하고 구속구로 묶인 손이 탁자를 내리찍었다.

네리스 선배가 흠칫 놀라 제압에 나설 뻔했을 정도였다.

나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어느덧 엘프 여인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셨어요. 사실 우리가 오만했다고… 삶이란 축복이 아니었어요. 일종의 감옥이라면 몰라, 우리는 죽기 위해 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죽였다?”

“‘해방’이라고 해주세요.”

옅은 미소를 짓는 베네타는 진심으로 그리 믿는 듯했다.

나는 울컥, 하고 차오르는 감정을 최대한 정제된 언어로 표현했다.

“비약이잖아. 죽음이 그렇게 좋으면 집단자살이라도 하지, 왜 그 모진 삶을 이어가려고 약자들을 희생시키지?”

“말했잖아요, 삶이 곧 형벌이라고… 형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감옥을 탈출하는 죄수는 어떻게 되겠어요?”

비겁한 정당화였다.

약자니까 먼저 구원해야 한다.

그들만의 특수한 의식으로 삶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키고, 남은 이들은 모진 삶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 주장의 골자였다.

군데군데 비약과 과장이 섞여 있는, 누더기 같은 논리.

그러나 신앙은 논리의 영역에 존재하지 않는다.

베네타는 강변했다.

“우리가 비참하고 초라해 보이나요? 그렇다면 우리를 이렇게 만든 당신들은… 당신들이 우리를 비난할 자격이 있나요?!”

“벼랑 끝에 내몰렸다고 모든 이들이 비겁해지진 않아.”

“우리도 처음에 이러진 않았어요.”

후우, 하고 깊은 날숨과 함께 베네타는 바짝 긴장했던 몸에 힘을 뺐다.

그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구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신세를 한탄하듯이.

“레오릭 님은, 좋은 사람이었죠. 구해준 소녀를 수양딸처럼 아꼈어요. 엘프 마을에도 곧 적응해 마을의 유일한 사제가 되었죠.”

“그랬던 사람이 도대체 왜…….”

“그 엘프 소녀가 죽었거든요.”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나와 베네타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엘프는, 허탈하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당신들이 마을을 불태운 탓에, 식량이 없어졌어요. 오랜 시간을 견뎌보았으나 북풍은 늘 가장 연약한 자부터 데려가죠.”

나는 그 말에서 묻어나오는 희미한 원망에 이를 악물었다. 척수반사적인 대응이었다.

내 목을 긁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제국은 선공을 가하지 않아. 마을을 불태우거나 하는 건, 너희가 먼저 우리를 습격했기 때문이겠지.”

“글쎄요?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돼요. 다만… 기억하세요. 빵과 비수를.”

그러면서 베네타는 피로한 낯빛으로 상반신을 기울였다. 흐, 하고 여인의 입에서 무기력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오늘, 당신한테 빵을 준 거예요.”

“무슨 소리지?”

“마티스를 살려줬잖아요. 고마워요, 당신들이 보기엔 구분할 수 없겠지만… 마티스는 아직 한참 젊어요. 아직 살아갈 날이 많죠.”

지독히도 모순적인 말이었다.

죽음은 ‘해방’이라고 하더니, 마티스를 구해줘서 고맙다?

그 파탄된 논리에 내가 울컥하기 직전이었다.

엘프는 구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성실히 답변해 준 거에요. 거짓말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죠. 세계수에 맹세해도 좋아요.”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으나, 그 어조가 묘하게 거슬렸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너스레를 떨었다.

“마지막이라니? 난 아직 묻고 싶은 게 많은데.”

“빵을 받았으면, 이제 비수를 받을 준비도 해야죠.”

침착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는 묘한 확신이 섞여 있어서,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 눈이 우두커니 베네타를 응시했다.

마치 주위의 시간이 멈춘 듯한 감각.

지극히 느려진 둔중한 흐름이, 내 솜털을 차례로 쭈볏 곤두세웠다.

폐를 짓누르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럼, 나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지.”

베네타는 고개를 내저었다. 더는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듯.

여인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마주했다.

“안 돼요, 말했잖아요? 이제 마지막…….”

“뭘 했어.”

우뚝, 하고 엘프 여인의 숨소리가 멎는다.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응시하는 그 연녹빛 눈동자를 보며, 나는 묘한 조급증이 일었다. 내가 재차 그녀에게 캐물으려던 찰나.

“이상하죠? 밤이 되면, 제가 아니게 되는 것만 같아요.”

베에, 하고 베네타가 제 입을 열어 혀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징그러운 살덩이가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점막과 혈관으로 끈끈하게 접합된, 흉측한 눈동자가 하나.

그것은 베네타가 입을 닫는 즉시 목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베네타는 싱긋 웃어 보였다. 미의 종족답게 아름다운 미소였다.

“추적 장치에요. 그러게 진작 죽이지 그랬어요? 그 늙은이 말처럼…….”

여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 전에 팍, 하고 손도끼가 베네타의 골통을 으깨 버렸기 때문이었다.

핏물과 살점이 터져 나와 옷과 가구를 더럽혔다. 그러나 내게는 그까짓 문제를 신경 쓸 여력이 남아있지 못했다.

입술을 짓씹으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네리스 선배 또한 황급히 몸을 돌려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울려 퍼지는 기나긴 뿔피리 소리.

북부에서 전투를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이 출정이든, 습격을 당했든 간에.

“엘프들이 야습해 왔다!”

피와 죽음의 시간이 도래했다.

걷잡을 수 없는 급류가 나를 휩쓸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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