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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44화 (344/649)

〈 344화 〉 5. 빵과 비수(42)

* * *

뿔나팔 소리가 두개골을 웅웅 울리고 지나간다.

곳곳에서 무장한 병사들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저마다의 병장기가 쥐어져 있었는데, 그 기세가 사뭇 살벌했다.

야음을 탄 기습이었다.

본래 유르디나 가문의 군영 위치는 기밀이었다. 엘프들이 그 위치를 알아내기는 힘들었다. 전력면에서 너무나 열세였던 탓이었다.

정찰병을 보내더라도 금세 감시망에 걸리기 일쑤였다.

도리어 유르디나 가문의 군대가 침엽수림을 수색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 수많은 장애물을 넘어 군영에 도달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그러지 않아도 엘프들은 전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살시도나 다름없는 선택지를 고려할 만한 여유는 없었다.

그러니 유르디나 측에서는 실로 오랜만에 겪는 야습이었다.

누구라도 당황해서 우왕좌왕할 만도 했다. 마음의 준비조차 마치지 못하고 적과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하지만 수백에 이르는 병사 중 놀라서 넋을 놓고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올 것이 왔다는 듯 담담히 무기를 꼬나쥐었을 따름이었다.

과연 최전선이었다.

언제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살아간다는 곳, 침엽수림의 경계를 지키는 병사들은 이미 싸울 각오가 끝나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베네타의 목숨을 살린 것은 나의 오판이었다. 만일 야습으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가 났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터였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던 차.

익숙한 목소리가 내 고막을 흔들었다.

“……도련님.”

전투가 코앞인데도 묘하게 태연한 어조였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중무장을 한 노기사가 하나 서 있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충신이자 노련한 장수인 알렉스 경이었다.

그는 침착한 낯빛으로 내게 말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 옆으로 병사가 몇 명인가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엘프들이 야습을 해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가 조기에 발견했으나, 규모가 조금 큽니다.”

“얼마나 되죠?”

“이 군영에 있는 병사만큼은 돼 보이더군요.”

전력은 호각.

내 입에서 끄응, 하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수백이나 되는 엘프들이 단숨에 전쟁 채비를 마쳤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준비된 습격이군요.”

“네, 어떻게 이곳의 위치를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으나…….”

“베네타.”

담백한 고백이었다.

나는 그 말을 내뱉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느꼈으나, 알렉스 경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내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새였다.

그래서 나는 재차 덧붙여야 했다.

“포로로 잡아두었던 그 엘프 여인 말입니다. 그녀한테 추적 장치가 달려 있더군요.”

“아, 그 엘프… 흠, 특이하군요. 분명 우리 측 마법사가 검사했을 때는 특이한 동향이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신체 개조를 받은 모양입니다.”

아직 추론의 단계에 불과하기는 했다.

그러나 베네타의 입속에서 나타난 흉측한 살덩이는, 아무리 보아도 아비앙의 몸에 심어져 있던 그것과 비슷했다.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베네타는 아비앙처럼 초월적인 재생 능력이 없었다는 점일까.

아마 살덩이마다 각각의 고유한 능력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몸을 개조하더라도 그 한계는 존재할 테니까 말이다.

다소 충격적인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알렉스 경은 딱히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럴 만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엘프들은 본래 믿어선 안 될 족속들이라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이는 편이 낫습니다.”

“……참고하지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지 않나 싶은 조언이었으나, 지은 죄가 있는 나로서는 반박이 불가능했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

내 울적해 보이는 인상에, 알렉스 경은 혀를 차며 나를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가 동일해도 질적인 차이는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우리 유르디나의 군병들은 하나하나가 정예입니다. 그리고 또…….”

노기사의 시선이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에 담긴 함의를 읽어내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이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합세하겠습니다. 저와 제 일행들도.”

“그럼 무난히 우리가 이기겠군요. 제가 알던 ‘엘프’들이라면 말입니다.”

불길한 여운을 남기는 덧붙임이었다.

나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으나, 알렉스 경은 그 말을 끝으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불빛이 점점이 박힌 침엽수림을 향해서.

엘프들은 더 이상의 은신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준비해 두었던 횃불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나무 사이에 가려져 있어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었으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빛들이 형형했다.

살의를 가득 담은 시선이었다.

나는 내 옆에 말없이 시립해 있던 네리스 선배에게 말했다.

“네리스 선배, 우선은 후방에서 병사들을 지원해 주세요. 그리고 아비앙도 챙기시고요.”

“네, 이안 님.”

네리스 선배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대외적으로 그녀의 신분은 비밀이었다. 익스퍼트에 이른 그 실력조차도 숨기고 있던 차였다.

차라리 몰래몰래 뒤에서 지원해 주는 편이 나았다.

또 네리스 선배도 굳이 최전선에서 싸우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을 터였다.

지시를 내린 직후 나는 알렉스 경의 뒤를 따라 걸었다. 지휘부로 추측되는 천막 앞에는 이미 일행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엘시 선배부터 시작해서, 성녀와 유렌 그리고 엠마와 황녀까지.

엠마를 제외하면 다들 당장 기용이 가능한 전력들이었다.

나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성녀였다.

“이안! 지금 엘프들이 야습을 해왔다고…….”

“이곳은 전장입니다.”

나는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제야 다소 어수선하던 일행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일행을 이끄는 사람은 나였다. 내가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면 곤란했다.

“언제든 습격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는 유르디나 가문을 지원하러 왔고, 따라서 이곳에서 유르디나 군을 돕겠습니다.”

“어, 어떻게요?”

불쑥 흘러나온 질문이었다.

나와 일행의 눈동자가 그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는 황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그렁그렁했다.

울상을 짓는 소녀를 보고,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황궁에서 오냐오냐 하며 자라왔던 여인이었다.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유렌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의 표정에서 은근한 거부감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엘프는 인격체였다.

지금껏 죽여 왔던 명백한 괴물들과는 달랐다. 그보다 더 살인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

천부적인 살인마가 아니라면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곳은 전장이었다.

“……죽여야죠.”

그 한 마디에 일행의 분위기가 움푹 가라앉았다.

황녀는 무어라 입을 열라다가, 이내 꾹 다물었다. 내 말이 논리적으로 옳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던 탓이었다.

나는 애써 그 쳐진 눈망울을 무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엠마, 너는 일단 안전한 곳에 있어. 성녀님도 우선은 후방에서 부상자 치료에 전념해 주세요. 엘시 선배, 유르디나 가문의 마법사들과 요격에 나서 주시고… 유렌?”

“엘프의 검술은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걸.”

유렌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제 검을 쓰다듬었다.

언제 봐도 이상한 녀석이었다.

검만 들지 않으면 사회성도 좋고 멀쩡한 친구인데, 왜 이럴까.

하여튼 내겐 잘 된 일이었다.

살인에 대한 후유증은 전방이 가장 극심했다. 제 손으로 살인의 감각을 온전히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렌은 마치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 거세된 듯했다.

내 옆자리를 맡기기에 훌륭한 동료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팍, 하고 땅을 박차는 동시에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공간이 실선으로 도해되고, 북부의 찬바람이 뺨을 찢을 듯 나를 후려쳤다.

그에 질세라 내 뒤를 쫓는 유렌의 기척이 느껴졌다.

일정 수준 이상 거리를 좁힌 엘프들은 그곳에 정지해 있었다. 그리고 전방에 가까워질수록, 그들 사이에 알알이 박혀 있던 불빛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횃불뿐만이 아니었다.

불화살.

그러한 전략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방패를 든 유르디나의 군병들이 제일 앞에 나서 있었다.

“발사!”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엘프들을 이끌고 있는 지휘관일 터였다. 그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하늘을 뒤덮는 불화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밤하늘의 불꽃은 마치 별과 같았다.

그것이 시시각각 가까워질 때마다 죽음이 다가온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었다. 숲 안에서 쏜 화살임에도 그 궤적은 절묘하게 나무를 피해가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엘프들의 활 솜씨였다.

정령을 써서 궤적마저 틀어버린다고 했던가.

그러나 불화살의 비마저 나를 멈추지는 못했다.

나는 내달리던 자세 그대로 검과 손도끼를 뽑아들었다. 급히 발검한 탓에 챙, 하고 날카로운 마찰음이 허공으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걸음을 하나 내딛을 때마다, 몇 개씩 부러져 땅바닥에 내리꽂히는 화살들.

내 검과 손도끼가 고속으로 교차했다. 마치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두 날붙이 아래서, 화살들은 토막 난 채 운동량을 상실했다.

그렇게 내 곁을 스치는 불화살이 모조리 땅에 처박히기까지, 단 네 걸음.

춤을 추듯 설원을 즈려밟듯 내 몸이 지체 없이 쏘아졌다. 이러니 당황한 쪽은 엘프들이었다.

설마 불화살의 비를 정면으로 뚫고 오는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겠지.

나는 두어 번의 도약으로 쿵, 하고 엘프들의 전열 위로 내려앉았다. 화살을 메기고 있던 엘프들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무, 뭐야……?”

“인간.”

짤막한 대답과 함께 검이 허공을 그었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엘프의 머리가 하나.

끝까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왈칵, 하고 핏물이 터져 나오며 더운 비를 흩뿌렸다. 주위에 있던 엘프들이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익스퍼트다!”

“익스퍼트가 참전했다! 칼잡이들을 불러!”

아무래도 엘프들에게 있어 ‘익스퍼트’는 공포의 대명사인 듯했다.

나 말고도 몇 명 더 있는데.

그 슬픈 소식을 칼날과 같이 속으로 감추며, 나는 검에 묻은 핏물을 털어냈다.

기분이 더러웠다.

무척이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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