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5화 〉 5. 빵과 비수(43)
* * *
금속과 금속이 춤을 춘다.
불똥이 튀길 때마다 핏물과 비명이 합주를 거들었다. 솟구치는 핏물이 어느덧 시린 설원을 붉게 덥히고 있었다.
엘프 병사들은 도저히 나를 당해내지 못했다.
어찌저찌 내 일격을 쳐내더라도, 뒤따라오는 일격에 당하기 일쑤였다. 오히려 나와 단 한 합조차 나누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무기의 질이 좋지 않았던 탓이었다.
검이 통째로 잘려나가 목숨을 잃는 엘프도 있었다. 금속이 아니라 목재로 이루어진 무장을 쥐고 있는 병사도 수두룩했다.
종족을 대표하는 정규군이라기보다, 민병대에 가까운 무장이었다.
‘군대’라는 표현조차 애매했다. 차라리 도적떼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아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인류에게 노획한 장비는 몇 개 있는 편인지, 나름 실력이 뛰어난 축에 속하는 엘프들이 나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래봐야 단 몇 초에 불과한 지체였지만 말이다.
캉, 캉, 캉!
고속으로 쏘아진 검이 엘프의 검면을 차례로 두들겼다. 단 세 번의 공방에 불과했으나, 엘프는 일격 일격을 견뎌낼 때마다 눈에 띄게 휘청이고 있었다.
그 말로는 명백했다.
팍, 하고 빈틈을 찢고 엘프의 심장이 꿰뚫렸다.
검극이 빠져나오자마자 핏물이 울컥이며 토해졌다. 엘프는 끝끝내 내 검을 붙잡으며 저항하려 했으나, 오러 앞에서 엘프의 피륙은 너무나 나약했다.
벌써 십수 명은 죽인 듯했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훌륭한 전과였다. 나 혼자 이 정도 수준의 전공을 세울 수 있다면, 수백이라는 엘프 습격자들은 금세 정리가 되리라.
무엇보다 일행이 본격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한 것이 컸다.
“빛이여, 범람하라!”
파직, 하고 끓어오르는 새하얀 전하들.
그것이 범람하기 시작하자 엘프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떨어댔다. 뒤늦게 엘프 측 마법사들이 나섰으나, 엘시 선배는 마법사 중에서도 수위권에 속하는 실력자였다.
그들이 마비된 틈을 타 나와 유렌이 전장을 누볐다.
근육이 수축한 엘프들은 도리어 가르기 까다로운 편이 속했다. 단단히 경직되었던 탓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나와 유렌 같은 실력자 앞에서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또 황녀도 착실한 활약을 보이고 있었다.
“별이여, 빛이여, 흐릿한 꿈의 저편에서 오는 진리의 궤적들… 쏟아붓는 폭우가 되어 세계를 두드리라. 별의 연회!”
덜덜 떨리는 목소리였으나, 어떻게든 완성된 주문.
그것이 가져오는 파장은 막대했다.
촛불에 불이 붙듯 하늘에 새파란 마력의 구체가 도열하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하나둘씩 늘어나다가, 종래에는 물경 수십.
몇몇 엘프들이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챘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광탄들이 폭우가 되어 쏟아져 내린다.
구체 하나하나가 작렬할 때마다 폭음이 터져 나왔다. 지반이 뒤집히고, 그 주위에 있던 엘프 두엇이 비명을 내지르며 엎어졌다.
개중에는 사지가 하나나 둘쯤 뜯기는 이들도 있었다.
저 멀리에서, 새파랗게 질린 안색의 황녀가 보였다. 비틀거리다 헛구역질까지 할 정도였다.
스스로 만든 참상이 너무나 끔찍했던 탓이겠지.
그럴 만도 했다.
비산하는 것은 눈과 흙뿐만이 아니다.
살점과, 핏물과, 주인 잃은 팔다리와, 마지막까지 나를 원망하듯 노려보는 머리들.
이곳은 지옥인가?
나는 일순 베네타의 강변을 떠올렸다. 삶이 감옥이라던, 죽음마저 해방이라던 광증에 찬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공감이 갔다.
아주 조금뿐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엘프 전열의 더욱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아예 최전선을 무너트리기 위해서였다.
무언가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그때였다.
내가 한 걸음을 내딛은 순간, 엘프들이 일사불란하게 물러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내 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진공 상태가 되었다. 본래 전열을 사수해야 할 병사들이 자리를 비키니, 나로서는 일단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 멈춰 선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곳으로 다가오는 몇 명의 걸음걸이가 특이했다.
분명히 걷고 있는데, 눈밭 위에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아카데미에서도 본 적 없는 특이한 보법이었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다가오는 네댓 명의 엘프를 마주했다.
어느덧 내 옆에는 유렌이 따라붙어 있었다.
그 또한 나와 같은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엘프 검사의 걸음을 관찰했다.
“어때? 뭔지 알겠어?”
“잘은 모르겠지만,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아. 엘프들과 한창 전면전을 벌였을 때, 물웅덩이 위를 굴어도 파문을 남기지 않는 녀석들이 있었다고.”
얼핏 듣기에도 범상해 보이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는 흐, 하고 되다 만 웃음을 터트렸다.
“상대하기 좀 피곤하겠는데?”
“혼자서는 그렇겠지.”
유렌은 내 어깨를 툭, 하고 두드렸다.
그리고 특유의 호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가 더 많이 죽이나 해볼까?”
“나쁘지 않, 지……!”
인명을 경시하는 불쾌한 발언이었으나, 나는 일부러 이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래야만 마음이 좀 편안해질 것 같았다.
땅을 박차는 즉시, 세상이 쪼개졌다. 그리고 멈춘 시간의 끝에서, 나는 어느덧 검을 들고 엘프 검사의 앞에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엘프 병사들이 그랬는데.
‘칼잡이’들을 불러오라고.
엘프들은 검을 쓰는 이들에게 특별히 ‘칼잡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모양이었다. 과연 따로 부르는 이름이 있을 만큼 특이한 분위이기는 했다.
눈앞에 있는데도 마치 존재가 지워진 듯한 느낌.
안개 같았다.
은빛의 오러가 빛살처럼 그어졌다. 좌상단에서 우하단으로 떨어지는 쾌속의 검격, 통상적인 병사는 반응조차 하지 못했던 속도였다.
그러나 칼잡이들은 달랐다.
그의 몸이 미끄러지듯 자연스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곧장 역으로 내 빈틈을 노리고 날아드는 찌르기.
물론 아무리 빨라도 내 반응 속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가볍게 피해내고, 치명타를 찌르려던 찰나.
나의 감각에 문득 묘한 위화감이 감지되었다.
시각을 초월하여, 경고를 보내오는 어떠한 직감이 존재했다.
내 몸이 멈칫하며 틀어진 것은 그때였다.
멱을 딸 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칼잡이의 찌르기를 한참이나 따돌리는 궤도였다.
칼잡이의 검은 스치지도 않아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스윽, 하고 얇게나마 내 옷을 긋고 지나가는 예기.
나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칼날이 두 개였다.
무슨 원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짓쳐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금 발작적으로 날아드는 칼날.
내가 너무 돌아간 탓에, 엘프에게 자세를 정비할 시간을 주고 만 것이다. 나는 하나의 칼날을 검으로 쳐냈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으스러지고, 내게 날아드는 금속의 칼날.
다만 엘프 칼잡이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내게도 날붙이가 하나 더 있다는 점이었다.
일부러 남겨두었던 한 손이 벼락같이 손도끼를 뽑아냈다.
캉, 하고 불꽃이 튀기며 엘프 칼잡이의 검이 허공을 날았다. 갑작스러운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탓이었다.
시종일관 묵묵하던 칼잡이의 눈이 그제야 크게 뜨였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표정이었다.
콱, 하고 내리꽂힌 손도끼가 두개골을 쪼개고 지나갔다.
나는 남은 칼잡이들을 확인했다.
유렌이 또 하나의 목을 땄고, 남은 것은 셋.
그중 둘이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 기묘한 검술에 일일이 어울려 줄 필요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나는 손도끼를 내던졌다.
텅, 하고 반탄력이 허공에 파문을 일으켰다. 고속으로 날아든 손도끼는 두 엘프 칼잡이의 검을 차례로 두들겼다.
캉, 캉.
그리고 팽그르르 돌며 하늘을 나는 손도끼, 나는 상대들이 엘프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들은 춤추는 손도끼에 대한 소문을 들어보지 못했을 테니까.
팍, 하고 내리꽂힌 손도끼가 장작처럼 엘프 칼잡이 하나를 절단했다.
그 기예에 깜짝 놀라 엘프 칼잡이 하나가 멈칫한 사이, 나는 실로 오랜만에 검을 던졌다.
날붙이가 대기를 찢으며 쇄도했다.
엘프 칼잡이는 이를 기함해서 쳐냈다. 그리고 또 다시 허공에서 기이한 궤적 변화를 보일까 봐, 잠시 눈길이 머무르기까지.
하지만 고수들의 승부에서 한 눈을 파는 것은 금기였다.
팍, 하고 검과 함께 내달린 내 발차기가 칼잡이의 명치에 작렬했다.
칼잡이는 울컥, 핏물을 토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연이어 상반신을 숙이며, 나는 땅을 훑어 꽂혀 있던 손도끼를 쥐었다.
그것이 최후의 공방 직전이었다.
칼잡이가 발악처럼 휘두른 칼을, 나는 몸을 던져 품속을 파고들었다. 손도끼는 검보다 짧아 적과 거리가 가까울수록 유리했다.
바로 지금처럼.
팍, 하고 아래에서 위로 뻗어 오른 손도끼가 깔끔하게 칼잡이의 턱을 박살냈다.
침묵은 짧았다.
풀썩, 하고 엘프 칼잡이가 쓰러지며 일련의 전투는 끝났다.
유렌은 그보다 몇 초 늦게 칼잡이를 처리한 뒤였다.
그는 짜증난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아, 도끼는 반칙이잖아…….”
“꼬우면 너도 하나 장만하든가.”
농을 던지고는 있었으나, 내 기분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이토록 많은 생명을 빼앗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괴물이 아니라, 인격체의 삶을.
마음 같아서는 술이나 진탕 마시고 잠을 자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장은 슬픔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또 다시 다가오는 기척들이 느껴졌다. 엘프 칼잡이들.
도대체 몇이나 있는 걸까.
내가 그렇게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고 있을 찰나였다.
“먼저 가.”
유렌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내게 말했다.
내 눈이 슬쩍 유렌을 향했다. 내 친구는 픽,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내기했잖아? 그러니 내가 저 녀석들을 맡고 있는 사이, 늘 그렇듯이 가장 강한 놈만 쓱삭하고 오라고.”
나는 등 뒤를 돌아보았다.
슬금슬금 나와 유렌에게 다가오는 병사들이 몇몇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좀 더 뒤에, 알렉스 경이 이끄는 유르디나의 병사들이 밀어닥치는 중이었다.
저들도 얼마 가지 않아 그 노도와 같은 기세에 휩쓸리고 마리라.
그러면 유렌은 얼마쯤 버티기만 하면 됐다.
승산이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유렌은 말없이 검을 들고 우두커니 남아 섰다.
이제 땅을 박차고 뛰쳐나갈 시간이었다.
나름대로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덕인지, 나를 가로막는 병사들은 막지 않았다.
궁수들과 마법사들이 귀찮게 굴기는 했다. 그러나 검사가 후열까지 접근하도록 허용한 순간, 전투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인 하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엘프는 영원히 젊은 종족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늙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 노인은 무엇인가.
임종을 앞둔 시체라도 된단 말인가?
굽은 등과 왜소한 체구만 보면 그래 보이긴 했다. 영양 섭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관절 곳곳이 뒤틀려 있었다.
짚고 있는 지팡이가 없으면 거동조차 불가능하리라.
내가 잠시 걸음을 주춤하자, 노인은 새하얀 미소를 지었다.
해맑은 웃음이었다.
“잘 왔네, 젊은이… 만반의 준비를 마쳤는데, 설마 이런 변수가 존재할 줄이야.”
“빵은 빵으로, 비수는 비수로.”
내가 던진 화두에 노인의 눈빛이 오묘해졌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후우, 하고 숨을 가다듬으며 검극을 겨누었다.
“엘프들의 격언이라 들었는데… 아무래도 내 쪽에서 비수를 돌려줄 차례 같지?”
“물론일세.”
그와 동시에 노인은 지팡이를 땅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데구르르 구르는 지팡이가 처량한 소음을 남겼다. 나는 의문을 가득 담아 엘프 노인을 바라보았다.
마법사가 아니었나?
“빵은 빵으로, 비수는 비수로… 우리들의 오랜 격언이지. 그러나 바꾸어 생각해 보게나.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비수를 받았던지를.”
기묘한 광경이 눈에 띈 것은 그때였다.
뚜둑, 하고 노인의 굽었던 등이 다시 펴졌다.
우득, 아득, 으드득.
뼈와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노인의 체구가 점점 커져 갔다. 처음에는 품이 넉넉해 보이던 옷이 비좁아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옷은 이내 펑, 하고 터져 나갔다.
근육이 계속 부풀어 올랐던 탓이었다.
그야말로 끝도 없이, 작고 왜소하던 노인이 2m를 넘는 근육질 거한이 될 때까지는 시간이 얼마 필요하지도 않았다.
나는 언젠가 이와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새하얀 털이 자라나고, 총기를 가지고 있던 노인의 눈이 핏빛 야성으로 물들었을 때.
내 입에서는 자연스레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씹…….”
마인이었다.
나는 무심코 고아원에서의 추억을 되짚고 말았다.
참 빌어먹을 기억들이었는데.
오늘, 그 흉터에 또 하나의 상처가 새겨질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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