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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47화 (347/649)

〈 347화 〉 5. 빵과 비수(45)

* * *

나와 유렌의 도주는 막힘없이 이어졌다.

설표 마인도 전력질주를 할 수 있다면 몰라, 그는 손과 어깨에 엘프들을 수두룩 얹어놓고 있었다. 당연히 네 발로 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질주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목청을 돋우었다.

“퇴각, 퇴각합니다!”

한창 병장기를 마주치고 있던 병사들로서는 어리둥절한 소리였다. 특히 유르디나 군으로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세는 누가 봐도 유르디나 측으로 기울어 있었다.

엘프들의 무장 상태는 좋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후방에는 엘시 선배와 황녀가 버티고 있었다. 또한 성녀의 존재는 유르디나 군의 사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부상을 당하더라도, 어지간하면 살아날 수 있다.

그렇기에 더욱 적극적인 공방을 나누던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프들의 패배가 확정되리란 사실은 명약관화해 보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퇴각을 하라니.

하필 그 발화 주체가 나라서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북부는 강자를 존중했고, 내가 쌓아온 영웅적인 업적들은 곧 권위가 되었다.

다만 엘프들의 반응은 약간 달랐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그들도 이내 굳은 결의가 맺힌 표정을 했다. 그때부터 엘프들의 공세가 더욱 적극적으로 변했다.

제 목숨을 아끼지 않는 모양새.

몇몇 엘프들은 눈이 벌개져서 함성을 내지를 정도였다.

“해방을 위하여!”

그 ‘해방’이 무엇일지는 뻔했다.

나는 전열이 주춤거리는 사이, 최전방에서 적을 도륙하고 있던 알렉스 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갑옷 또한 나처럼 피로 흠뻑 젖은 채였다.

팍, 하고 노기사의 검이 엘프 병사 하나의 몸을 반으로 쪼갰다.

그는 익숙하다는 듯 쏟아져 내리는 핏물을 말없이 감내했다. 단지 후우, 하고 숨을 가다듬으며 피로 물든 이마를 훔쳤을 뿐.

알렉스 경의 노련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또한 내가 일으킨 소란을 들었을 터였다.

“도련님,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왜 우리가 저 엘프 놈들에게 등을 보여야…….”

“암흑교단의 사술입니다.”

내 한 마디에 알렉스 경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사실 엘프가 쓰는 마법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생명을 대가로 바쳐 파괴를 일삼는 곳은 암흑교단 정도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알렉스 경을 설득하는 것이 급선무이기도 했다.

‘사술’이란 표현은 늙고 꼬장꼬장한 기사들이 좋아하는 표현이었다. 주로 우리 측이 상대에게 밀리고 있을 때 쓰는 말이었는데, 이 어감이 중요했다.

우리가 열세다.

정체불명의 힘에 의해 전황이 변했다는 의미였다. 알렉스 경은 용맹한 북부의 기사였으나, 멍청한 지휘관은 아니었다.

그의 망설임은 짧았다.

그가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퇴각한다면, 어디까지?”

“군영까지만 퇴각하면 됩니다. 그곳에서 후방에서 지원 중인 일행과 합류해, 사술을 쓰는 엘프 녀석을 참살하겠습니다.”

“도련님 말씀대로 하지요.”

그 직후 알렉스 경은 조용히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저 멀리에서 뿔피리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병사들이 전열을 가다듬으며 차차 물러나기 시작했다.

알렉스 경은 내게 말했다.

“북부에서 지휘관은 늘 병사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희 일행들로만 해보죠. 어차피 알렉스 경이 중상이라도 입으면, 지휘 체계는 그대로 무너질 테니까.”

익히 숙지하고 있던 내용이었다.

알렉스 경은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로는 떠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나, 우리와 함께 분투하지 못해 서운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젠 불평할 시간마저 남아있지 못했다.

알렉스 경은 곧장 후방으로 돌아가 일행을 소집했다. 병사들이 차근차근 전열을 뒤로 물리는 것에 맞춰, 나와 유렌은 차례차례 엘프 병사들을 쓰러트렸다.

어차피 곧 설표 마인이 오면 협공을 할 이들이었다.

미리 숫자를 줄여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나마 설표 마인보다 일행이 일찍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자세한 사정조차 말해주지 못했다.

“마인이 엘프를 희생시켜서 강력한 마법을 쓰고 있어. 그러니까 엘프가 던져지면 피하고, 후방에서 지원해 줘.”

부족하기만 한 설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나의 최선이기도 했다.

일행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찌나 설표 마인을 경계했던지, 네리스 선배와 아비앙까지 내 옆에 시립해 있을 정도였다.

네리스 선배는 다소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하기야 느닷없이 최전방에 불려 와서, 숨겨두었던 솜씨까지 발휘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했다.

물론 아비앙에게는 별다른 도움을 기대하지 않았다.

애초에 동족과의 전투였고, 이미 피로 물든 전장의 풍경에 새파랗게 질린 지 오래였으므로.

그저 네리스 선배의 뒤나 잘 따라다니길 바랄 뿐이었다.

아비앙의 주위에 나 혹은 네리스 선배가 없으면, 설치된 목걸이가 작동해서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떻게든 교통정리를 끝마친 직후였다.

“인간들이여!”

상처받은 야수의 절규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일행은 그 진원지를 확인하고 안색을 굳혔다. 언어는 지성체의 것인데, 몸뚱아리는 마수의 행색을 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마인, 악신과 계약한 이들.

이로써 엘프와 암흑교단의 관계는 확정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러든 말든 설표 마인은 절절한 외침을 이어갈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대들이 우리를 이곳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죽음을 각오했으나, 너희는 그보다 더 비참한 삶을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바쳐 우리를 해방시키겠다.”

“……가자.”

내가 유렌과 네리스 선배에게 눈짓을 하는 동시에, 세 개의 그림자가 찢어졌다.

각자 갈라져 내달리는 세 사람의 속도가 매서웠다. 특히 유렌은 네리스 선배의 각력을 보고 감탄한 눈빛을 할 정도였다.

그야 네리스 선배는 이미 완숙한 익스퍼트였으니까.

하늘 위로 엘프 두엇이 솟구친 것은 그때였다.

그들은 체념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 포물선으로 볼 때, 떨어지는 각도는 나와 후방에 있는 일행들.

하지만 우리도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벼, 별의 연회!”

아직 첫 살인의 후유증이 지나지 않은 탓인지, 다소 더듬거리는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그 효과는 확실했다.

수십 개의 광탄이 도열하더니, 곧장 허공을 날던 엘프를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처참히 분해되는 엘프의 시체를 보며, 황녀가 다시 입을 가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불쌍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목숨을 잃고 싶지 않다면, 빼앗는 수밖에.

나는 일순 황녀를 이 차가운 북부로 데려온 것을 후회했다. 아무리 미래의 ‘나’에게도 뜻이 있겠다지만, 황녀는 아직 너무 어렸다.

그와 별개로 활약만큼은 눈부셨지만 말이다.

수십 개의 광탄을 연이어 얻어맞은 엘프의 시체가 폭발했다. 그 여파만으로도 내 몸이 일순 휘청였을 정도였다.

저 위력을 정통으로 받아내야 한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두 방?

아니, 단 일격에 끝날지도 몰랐다. 나는 최대한 몸을 사리며 발을 내딛었다.

어느덧 설표 마인과 우리의 거리는 꽤 줄어 있었다.

아직 포기하지 못했다는 듯, 또 다시 허공에 엘프들이 흩뿌려졌다.

또 다시 숫자는 둘이었다. 마인에게 손이 둘밖에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황녀뿐만 아니라, 엘시 선배까지 이미 요격을 위해 대기 중이었다. 아무리 엘프를 빨리 던지더라도 두 사람의 여인이 더 빠를 터였다.

내 예측을 증명하듯, 전하의 창 두 개가 새파란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팍, 팍.

솜씨 좋은 마법사답게 낭비가 없었다. 두 창은 각각 하나씩의 엘프들을 노렸고, 감전당한 엘프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폭발했다.

이제 설표와의 거리는, 도약 두어 번으로 좁혀질 수 있는 수준.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전투가 그토록 쉬울 리가 없었다.

터져나간 엘프의 시체를 중심으로, 무시무시한 양의 액체가 흩뿌려졌다.

하나는 투명했고, 또 하나는 거무죽죽했다.

나는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범위권을 벗어나기 위해 짧은 거리를 몇 번이나 도약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그 범위 한복판에 내가 없어 다행이었다.

네리스 선배와 유렌은 아차, 하는 사이에 그 흩뿌려지는 액체 한복판에 놓이고 말았다. 웅덩이지는 거무죽죽한 액체 사이를, 유렌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피했다.

네리스 선배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액체의 정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투명한 액체 위로, 얼음의 송곳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무수한 숫자였다. 웅덩이를 살짝 비켜간 것만으로도 피해낼 수 있는 수는 아니었다.

네리스 선배는 입술을 짓씹으며 곧장 허공을 박찼다. 미끄러운 얼음송곳 사이를 노니는 그 모습이 마치 백조 같았다.

유렌도 회피에 여념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검은 액체가 치지직, 하고 지반을 녹이고 있었다. 이에 따라 웅덩이가 점점 넓어지며, 유렌이 서 있을 곳을 점차 침식했다.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랬지.

엘프마다 스스로를 희생해서 낼 수 있는 힘이 제각각인 듯했다. 그리고 그 종류는 단순히 폭발에 그치지 않는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해답은 하나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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