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48화 (348/649)

〈 348화 〉 5. 빵과 비수(46)

* * *

바로 설표 마인에게 엘프를 던질 틈을 주지 않는 것.

내 다급한 도약이 이어졌다. 나와 마인의 거리는 어느덧 간격을 재야 할 정도.

설표 마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했다.

그의 손에는,또 한 명의 엘프가 들려 있었다.

한 톨의 생기마저 잃어버린 눈동자를 마주한 내 몸이 으스스 떨렸다.

최악의 전투였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나는 손도끼를 내던졌다. 그리고설표 마인이 들고 있는 엘프의 두개골을 으스러트리며 꽂히는 도끼날.

마인은 이를 피할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엘프의 몸이 기묘한 형태로 뒤틀리더니,이내 한 줌의 핏물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그 핏물을 뒤집어 쓴 설표 마인의 눈동자가 맹렬한 핏빛으로 불타올랐다.

크허엉!

그리고 도약,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쏘아진 몸통박치기였다.

나는 그 듬직한 어깨에 턱,하고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내 입에서 절로 숨 막히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광폭화 마법인가?

마인의 근육은 부담스러울 만큼 부풀어 있었다.스스로도 제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했다.나는 멈춘 시간 속에서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이미 한 대 치였는데.

팡,하고 쏘아지듯 밀려난 내 몸이 땅 위를 몇 바퀴나 굴렀다.나는 헐떡이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시야가 아직 흐릿했다.

그리고 내 말간 초점 사이를 찢고 들어오는 손톱.

“이안!”

팍,하고 검 한 자루가 날아와 설표 마인의 손등을 관통했다.

그러나 광폭화는 통각마저 앗아가 버린다.

설표 마인의 손톱은 여전히 나를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유렌의 노력이 아무런 의미도 없지는 않았다.

아무리 통각이 없더라도 물리력은 이겨낼 수 없다.

찰나의 움찔거림,나는 그 사이에 전력으로 뒷구르기를 했다.

팍,하고 손톱이 얼어붙은 지반을 관통했다.설표 마인은 그대로 나를 압박하려 했으나,어디선가 단검이 날아들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파바박,하고 마인이 있던 자리를 차례로 찌르고 들어가는 날붙이들.

네리스 선배의 솜씨였다.

얼음송곳 사이를 뛰어넘던 그녀가 다시 전장으로 복귀한 것이다.다소 지쳤는지 헐떡이고는 있었으나,그 눈빛은 여전히 형형했다.

전위 셋 중 유일하게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이었다.

당연히 우리 중에 가장 멀쩡해야 정상이었다.

물론 전위에는 아비앙도 포함되어 있었으나,실상 멀리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밖에 역할이 없는 신세였다.

그리고 유렌은 한창 웅덩이를 빠져나오는 중이었고.

마인은 어느덧 네리스 선배의 단검을 피해 훌쩍 뒤로 물러나 있었다.손등이 관통되는 와중에도 피하지 않던 괴물이었다.

그저 물러날 때,귀찮다는 듯 손등을 관통한 검을 내동댕이 쳤을 뿐.

그토록 거칠어진 그가 물러날 만한 까닭은 하나뿐이었다.

그의 어깨에 데롱데롱 매달려 있는 엘프들.

이제 셋 정도 남았나.

네리스 선배는 눈치껏 그 엘프들을 노렸고,제정신이 아닐 텐데도 설표 마인은 제 동족을 끔찍이 아꼈다.

비장의 수로 쓰기 위해서겠지만.

여러모로 불쾌한 전투가 아닐 수 없었다.

다만 설표 마인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광폭화를 한 탓인진 모르겠으나,그가 상대해야 할 적은 고작 셋이 아니었다.

“……빛의 심판!”

낭랑한 외침과 함께,하늘에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설표 마인은 당황한 낯빛으로 도주를 하려 들었다.하지만 나와 네리스 선배는 이미 준비를 끝마친 뒤였다.

나는 땅에 떨어진 유렌의 검을 쥐었고,네리스 선배는 단검을 흩뿌렸다.

마인이 단검을 피하는 사이 내 검이 그 발등을 관통했다.얼어붙은 지반에 단단히 틀어박힌 칼날과,부상에 자연히 수반되는 근육의 수축.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빛의 심판이 땅 위로 떨어져 내렸다.

쾅,하고 신의 폭력이 지상에 강림했다.일순 지축이 뒤흔들린다는 느낌이 일 만큼 무시무시한 위력, 5서클의 마법사가 공을 들여 완성한 주문이었다.

통해야 했다.

그래,통해야 하는데.

폭음을 일으킨 이후,파직거리는 전하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목이 꺾여 죽은 엘프를 중심으로,반투명한 막이 형성되어 있었다.

원리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결과는 현상으로서 드러날 따름이었다.

내리꽂히던 전하의 창이 급격히 솟구치더니,이내 특정 방향을 노리고 쏘아졌다.그 착점은 엘시 선배가 있는 쪽이었다.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엘시 선배!”

비명 소리가 후방에서 울려 퍼졌다.그나마 마지막 순간,새하얀 빛이 터져 나온 걸로 보아 성녀가 수를 쓰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주문이 역류한 상황이었다.

엘시 선배의 혈도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설표 마인을 노려보았다.

무려5서클의 고위 마법이었다. ‘대마법’이라 불리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지만,그 위력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그런데 반사해 냈다.

남은 두 엘프가 희생하면 어떠한 사태가 벌어질지,짐작조차 가지 않았다.나와 네리스 선배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설표 마인이 노린 틈새는 그때였다.

마인은 애지중지하던 엘프 하나를 느닷없이 던져버렸다.유렌이 어떻게든 웅덩이를 빠져나오려 애쓰고 있는 방향이었다.

이동반경이 제한된 그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쾅,하고 폭음이 터져 나오며 유렌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그의 몸이 땅 위로 엎어졌다.신음을 흘리는 꼴을 보니,유렌이 전장에 복귀하려면 시간이 걸릴 듯했다.

차라리 폭발력이 강해서 다행이었다.

웅덩이 바깥으로 확실히 밀려날 수 있었으니까.

아니었다면 유렌은 저 검은 액체에 침식되어 서서히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저러지 않도록 미리 견제를 했어야 하는데.

분한 마음에,나는 무작정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네리스 선배 또한 금세 내 뒤를 따랐다.

그 이후는 공방의 연속이었다.

네리스 선배가 단검을 날려 견제하면,그 사이에 내가 마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검으로 베고,찍고,찌르고.

그 도중에 몇 번이고 튕겨나가면서,나는 네리스 선배와 교대로 마인에게 달려들었다.그럼에도 광폭화를 마친 마인을 압도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남은 엘프가 거슬렸던 탓이었다.

저 엘프가 무슨 마법을 품고 있을지 모르니,대응이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결국 그 난제를 해결한 쪽은 네리스 선배였다.

내가 품 안을 파고든 사이에,또 다시 쏘아지는 날붙이.

마인은 늘 그렇듯 슬쩍 몸을 비틀어 피하려고 했다.

그 날붙이가 교차된 철십자의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않았다면.

퍽,하고 엘프의 두개골을 날붙이가 아슬아슬하게 찍고 지나갔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네리스 선배의 날붙이는 공간 확장 주머니 안에 있었다.오직 단검만 보관하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네리스 선배의 낯빛 또한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이제야 길었던 전투가 끝을 맺을 모양이었다.여인이 살포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아니,내딛으려고 했다.

난데없이 그림자가 팔을 뻗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터였다.그 흐물거리는 팔과 다리가 네리스 선배의 전신을 조이며,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땅바닥에 고정시켰다.

때마침 나는 당황한 설표 마인의 복부에 칼침을 놓아주던 참이었다.

내 몸이 재빨리 설표 마인의 공격권을 탈출했다.설표 마인도 복부를 찔린 상처는 무시할 수 없었는지,비틀거리며 두어 걸음을 물러났다.

나는 걱정스러운 음색으로 외쳤다.

“네리스 선배,괜찮아요?!”

“괘,괜차…흐으,윽?!”

그러나 네리스 선배가 버둥거릴수록 그림자는 더더욱 조여 올 뿐이었다.

내가 초조한 마음으로 다시 시선을 설표 마인에게 향했을 때.

“축복은 소망을 반영하네.”

담담한 목소리로,설표 마인은 어느덧 차가워진 숨결을 갈무리했다.급격히 근육이 줄어들며 김이 풀풀 날리고 있었다.

광폭화가 끝난 것이다.

복부에 난 관통상에서는 끝없이 피가 울컥이며 새어나왔다.승패는 명확했다.

다행이었다.네리스 선배의 마지막 한 수가 먹혀서.

그럼에도 전투가 끝나기 전까지 방심은 금물이었다.

나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설표 마인을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지?”

그러자 마인은 큭큭,하고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최후를 앞둔 그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짜증이 날 만큼.

“우리는 레오릭 님께 축복을 받았네…목숨을 대가로 바쳐,평생의 소원을 힘으로 만들었지.평생을 추위에 떨던 녀석은 불꽃을 터트리고,굶주림에 시달리던 녀석은 세상을 먹어치우는 맹독이 되었네.어떤가,우리가 목숨을 바쳐 벼려낸 비수는?”

“최악이었어.”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설표 마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가 서서히 몸을 웅크렸다.

마지막 공방이다.

이를 직감한 나는 배후를 바라보았다.마력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수습을 마무리한 황녀의 마법이 시전되기 직전이었다.

그래도 무인과의 생사결이 아닌가.

최후의 순간에는 단 둘이서 겨루어 볼까 하다가,나는 이내 그만두었다.

전장에서 낭만을 찾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느낄 정도의 마력이었다.설표 마인이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 또한 각오를 끝마친 것이다.

나는 조용히 검극으로 그를 겨누었다.

“덤벼,그 한 많은 삶을 끝내줄 테니.”

그 말과 함께 터져 나오는 양천대소.

“푸흐,하하하하하!”

실컷 웃음을 터트리던 설표 마인은,이내 자세를 낮추며 나를 노려보았고.

쾅,하고 지반이 들썩이며 돌진이 시작되었다.

나는 말없이 자세를 가다듬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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