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51화 (351/649)

〈 351화 〉 5. 빵과 비수(49)

* * *

아비앙이 내게 품고 있는 감정은 명료했다.

공포, 그리고 증오.

어느 쪽이든 등을 맡길 동료가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이었다. 특히나 낯선 오지에서 단 둘이 남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내 일방적인 관점에 불과한 이야기였다.

아비앙에게 이곳은 적진이 아니었다. 도리어 말하자면, 못된 악당의 손에서 구출해 줄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라 해야겠지.

한때 내 하녀를 자처하기도 했던 소녀였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으로 얻어낸 협력이 아니었고, 단지 반복된 폭력과 고통에 굴복한 결과물에 불과했다.

굳이 내게 집착할 까닭이 없다는 뜻이었다.

오히려 내게 복수를 하려 든다면 몰라.

그 증거로 아비앙의 낯빛은 어느덧 해맑게 밝아 있었다.

반대로 내 안색은 심각해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흠, 하고 침음을 삼키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사실 딱히 두렵거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구속은 얼마든지 벗어던질 수 있는 수준에, 부상도 많이 호전된 뒤였다. 단신으로 이곳을 탈출할 자신은 있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몇 가지.

우선 첫 번째, 나는 이곳이 어딘지 몰랐다.

그 유르디나 가문마저 찾아내지 못한 장소가 엘프 마을이었다. 위치는커녕 방향조차 제대로 알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그저 침염수립 어딘가에 있겠지, 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

따라서 내가 마을을 탈출한다고 해도, 무사히 유르디나 시로 복귀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침엽수림은 길이 복잡할뿐더러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다.

내게는 길잡이가 필요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전투가 늘 옳은 판단은 아니었다.

이곳은 적진 한복판이었다.

어떤 괴물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예를 들어, 그 설표 마인과 비슷한 급의 적을 둘 이상 마주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기껏해야 도주가 최선이었다.

그보다 강한 적을 마주친다면 말할 것도 없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우회책을 찾아보는 편이 나았다.

문제는 오직 하나였다.

아비앙의 협조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아비앙은 엘프였다. 단지 내 하녀로 변장하기 위해 제 뾰족한 귀를 숨겼을 뿐, 나와 입장 자체가 달랐다.

하물며 나에 대한 감정은 최악이기까지.

협상이 난항을 겪는 미래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증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크흐, 아하… 아하하하하하핫!”

창고 안에서 울려 퍼지는, 통쾌한 웃음소리.

나는 아비앙이 그렇게 웃을 줄 있는지 처음 알았다.

내 눈동자가 물끄러미 엘프 소녀를 향했다. 그러자 나를 마주하는 푸른 동공.

광증마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감히 열등한 인간 주제에 나를 폭행했겠다?”

으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이 아비앙이 가진 증오의 크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소녀는 온몸이 묶인 채로 바둥거리며 외쳤다.

“꼴좋다! 이제 두 손 두 발이 다 묶였는데, 어떻게 할래? 우리 엘프들은 절대 원한을 잊지 않아, 반드시 내가 받은 고통 이상을 돌려줄 테다……!”

그러면서 아비앙은 최대한 입꼬리를 거칠게 말아 올렸다.

어떻게든 나를 위협하고 싶은 모양인데, 내가 볼 땐 귀여워 보일 따름이었다. 엘프라서 생김새도 예쁘고, 체구도 작았으니.

무엇보다 아비앙은 결정적인 착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밧줄에 묶여 있다고 겁이라도 먹을 줄 안 모양이었다.

정작 내 마음은 평온하기만 했는데 말이다.

단지 처음 눈을 떴을 때 조금 당황했을 뿐이었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사선을 넘은 내 정신은 강철처럼 단련되어 있었다.

아비앙의 협박 따위는 우습지도 않았다.

도리어 나는 아비앙의 위협에서 단서를 찾기까지 했다.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열쇠.

아비앙이 내게 협력하기 싫어한다면, 협력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면 됐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내 입꼬리가 히죽, 하고 호선을 그렸다.

“그래? 그거 참 기대되네.”

“흥, 허세는… 곧 인간 따위가 감히 엘프를 건드린 대가를……!”

“마지막 길동무가 엘프라니, 제국의 귀족으로서 영광이야.”

내 말에 아비앙의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그리고 멍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아무래도 흥분한 탓에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린 듯했다.

그래서 나는 이를 굳이 되짚어 주기로 했다.

“네 목걸이, 기억 안 나?”

그제야 아비앙은 아차, 싶은 눈빛으로 제 목 어림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봐야 보이지는 않겠으나, 그 존재만큼은 확실히 자각했겠지.

마치 초커처럼 보이는 장신구였다. 겉으로 보아서는 구분하기 힘들지만, 지 목걸이는 무척 위험한 물건이었다.

지정된 인물이 시동어를 외우는 즉시 폭발해 버리는 구속구.

심지어 주변의 마력을 탐지하는 기능도 있어서, 지정된 이가 일정 시간 이상 감지되지 않으면 폭발하기까지 했다.

제국 황실이 지닌 기술력의 결정체였다.

그리고 저 목걸이에 지정된 인물은 나와 네리스 선배, 단 둘뿐.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

다시 말해, 아비앙의 생사여탈권은 여전히 내 손에 있다는 뜻이었다.

의기양양하던 소녀의 안색이 단숨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더듬거리면서, 애써 내 말을 부정하려 노력했다.

“이, 이곳엔 내 동족들이 있어! 분명 그들이 이 목걸이도 풀어줄……!”

“너희 엘프들이? 우리 제국의 첨단 기술로 벼려낸 그 목걸이를?”

나는 큭큭,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당장 원시적인 화덕을 쓰고 있는 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수백 년에 걸친 전쟁 끝에, 쇠락해진 엘프들은 문명에서 소외되었다.

저 목걸이를 해제할 능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너도 알잖아? 그래도 인간 세상에서 살아봤으니까.”

구구절절한 반박조차 필요 없었다.

그 짤막한 설득에, 아비앙의 낯빛이 더할 나위 없이 핼쑥해졌다.

엘프는 본래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그 ‘사교’라는 것이 가치관을 뒤바꾸고 있는 듯했으나, 수천 년을 이어온 종족의 전통이 뿌리부터 달라질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아비앙은 애초부터 사교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아비앙의 대처를 기다렸다.

이미 한 번 꺾인 마음이다.

나무와 사람의 심리는 다르지 않았다. 일단 한 번 꺾이고 나면, 그 이후에는 보다 작은 힘으로도 꺾이곤 했다.

다만 변수가 있다면, 때때로 인간의 마음은 오래된 고목보다도 강인하다는 점뿐.

한참을 고민하던 아비앙이 이를 악물었다.

결의를 다진 표정으로, 소녀가 외쳤다.

“주, 죽지 뭐!”

덜덜 떨리는 음색이었다.

누가 봐도 아비앙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단단한 결심에 나는 옅은 탄성을 터트렸다.

영웅이 내는 용기와, 겁쟁이가 내는 용기는 다르다.

명백히 후자가 더 어려웠다.

나는 내심 아비앙의 평가를 상향조정했다.

“너, 너는 너무 강하고 악랄해… 우리 동족들을 벌써 몇이나 죽였잖아?! 그러니까, 나 하나로 희생하겠어. 네놈의 협박 따위 통하지 않는다고!”

엘프를 죽였다.

그것도 수십에 달하는 목숨을.

그 사실을 재차 자각하자 가슴 속에서 욱씬, 하고 통증이 일었다. 나는 문득 미래에서 온 ‘나’와 마주했을 적의 풍경을 떠올렸다.

피로 흠뻑 젖은 손.

나도 아직은 어설픈 구석이 남아있었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생명을 뺏어 왔는데, 단지 상대가 인격체라고 이토록 흔들리다니.

물론 이제 와서 슬픈에 잠겨 있을 틈은 없었다.

나는 이어지는 아비앙의 발악을 잠자코 들어주었다.

“알겠으면 얌전히 삶의 마지막 순간을 정리……!”

“왜 너만 죽겠어?”

내 태연한 어조에 아비앙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멍하니 바라보기에 나는 그 증거를 보여주기로 했다.

나는 묶인 두 손목을 아비앙이 잘 볼 수 있도록 치켜들었다.

그 이후에는 간단했다.

단지 한 번 힘을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투둑, 하고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불길한 소리를 내는 밧줄.

아비앙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리기 시작했다.

“너 말고도 잔뜩 죽어. 수십? 수백? 몇 명이나 죽을까, 날 제압하려면.”

진심은 아니었다. 나는 엘프를 학살할 만큼 피에 굶주려 있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효과는 확실했다.

상상도 못한 협박에 아비앙은 제대로 말조차 잇지 못했다.

단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나를 색다른 눈으로 바라보았을 따름이었다.

그 눈빛이 어딘가 익숙했다.

내게 처음으로 굴복했을 때 보였던 눈빛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를 직감한 내 혀가 더욱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무장은 빼앗겼지만, 난 맨손으로도 몇 명이든 죽일 자신이 있거든. 그러다 보면 무기도 빼앗을 수 있겠고… 그 후는, 알지?”

그러면서 나는 일부러 음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전투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지성을 갖춘 존재를 죽이는 감각은 최악이었다. 설령 싸운다 해도 살인은 최소화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약한 모습을 보이면 진다.

아비앙을 완전히 꺾어 놓아야 했다. 나는 그렇게 어울리지도 않는 연기를 지속했다.

“어떻게 할래?”

내 느긋한 목소리에, 아비앙의 눈동자가 다시금 나를 향했다.

아직 망설이고 있는 중인지 그 눈빛이 애처로웠다. 동시에 나에 대한 두려움도 다시 부활한 듯했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그 시선을 황급히 다시 내리깔았으니까.

시간 문제였다.

내 협박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아비앙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아비앙은 살고 싶을 터였다.

죽고 싶은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살을 하는 이조차도 죽고 싶어서 죽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삶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테지.

그래서 나는 아비앙에게 핑계거리를 제공한 것이다.

네 잘못이 아니다. 합리적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목숨도 건지면서, 동족을 위한 애정이라는 감정까지 충족시키는 멋진 조건이었다.

“……무, 뭘.”

아비앙이 이를 거부할 리가 없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다시금 돌아온 존댓말을 들으며, 나는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됐다.

그제야 나는 아비앙에게 자세한 계획을 늘어놓았다.

부디 베네타의 조언이 아직 유효하기를 바라면서.

*

두 엘프 남녀가 못마땅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와 아비앙을 내려다보고 있던 도중이었다. 어딜 가나 선남선녀로 분류될 두 사람은, 무척이나 곤혹스럽다는 얼굴이었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우선 아비앙이 엘프였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는 것이 하나.

그리고 그 아비앙의 입에서 나온 믿기 힘든 진술이 또 하나.

두통을 숨길 생각조차 없는지, 엘프 사내는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너는 남방으로 파견된 첩자인데, 정체가 들통 나 그 인간 남자한테 의탁해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 마수와 싸우다 저 남자는 정신을 잃었고?”

“네, 네. 맞아요…….”

꼴에 첩자 출신이라고, 아비앙은 제 눈에서 가짜 눈물까지 찍어내고 있었다. 나름 몰입감 있는 연기였다.

전문가가 아니라면 진위를 판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당연히 두 엘프 남녀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잠깐 눈을 마주쳤다가, 이내 구석으로 가 속닥이며 대화를 나눴다. 지금껏 몇 번이고 반복된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결말은 매한가지였다.

결국 두 사람은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또 다시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였다.

엘프 여성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끌었다. 짐짓 매서운 눈빛을 하는 폼이, 나를 위협하기라도 하겠단 모양새였다.

싸늘한 목소리가 그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너… 너는 기억상실? 네가 도대체 누군데?”

불신이 가득 담긴 음색이었다. 하기야 느닷없이 ‘기억상실’이라니, 너무 형편 좋은 소리가 아닐까 싶긴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어차피 마땅한 변멍거리도 없었다. 더불어 나와 아비앙이 그렇게 주장한들, 저쪽에서 검증할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멍청한 눈빛을 하며, 아무 말도 없이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기를 한참.

“모르겠어요… 제가 도대체 누구죠?”

탁, 하고 엘프 사내가 제 낯가죽을 손으로 훑어 내렸다.

그렇다.

나는 기억상실을 연기하기로 했다.

잠사나마 엘프들의 마을에 섞여들기 위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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