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2화 〉 5. 빵과 비수(50)
* * *
베네타는 내게 말했다.
빵과 비수를 기억하라고.
엘프들은 빵은 빵으로, 비수는 비수로 갚는다. 그 원칙에 예외는 존재하지 않았다. 설령 증오해 마지않는 인간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 산 증인이 존재하기도 했다.
사교의 우두머리, 레오릭.
한때 유르디나 군의 종군사제였던 그가 어째서 엘프들과 함께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더불어 사교에 빠지게 된 계기도.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는 예전부터 엘프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이었다.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엘프 소녀를 살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 또한 그 서사를 되풀이할 요량이었다.
물론 소소한 차이는 존재했다.
이야기의 진정성을 위해서였다. 너무 많은 부분을 따라해 버리면, 도리어 의심을 살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서 나는 몇 가지 단락을 나와 아비앙에게 맞추었다.
우선 아비앙은 인간 사회의 첩자 출신이었다. 이는 몸 안에 내재된 ‘축복’을 내보임으로써 증명받을 수 있었다.
그 이후부터 신뢰를 얻는 것은 간단했다.
‘축복’까지 받은 첩자가 거짓말까지 해가며 인간 사내를 두둔할 리는 없다.
그러한 안일한 의식이 그들의 의심을 억눌렀다. 더불어 아비앙이 정체를 들킬 뻔하며 펼쳐지는 생생한 고생담까지.
우리 둘을 면담하러 온 두 사람이 숙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을 정도였다.
물론 그 고생담의 대다수는 내가 가해자였지만 말이다.
나는 딱히 똑똑한 편도 아니었고, 연기에 능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기억상실’이라는 설정을 추가한 것이다.
이를 통해 나는 무해한 약자라는 인식을 줄 수 있었고, 덧붙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굳이 심문을 통해 인간 사회에 대한 정보를 얻어낼 이유가 없어지는 셈이었다.
그 기나긴 과정의 끝에서, 결국 두 엘프 남녀는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우리 둘의 이야기를 믿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하나였다.
두 사람이 구석에 가 속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름대로 비밀이랍시고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으나, 내 예민한 청각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야, 야, 그럼 어떡해? 당연히 저 남자는 추방하거나 본부로 보낼 생각이었잖아.”
“뭘, 뭘 어떡해! 당연히 죽여야지!”
“꼬마 엘프 하나 살리겠다고 대륙을 건너온 사람한테?”
대체로 나를 변호하는 쪽은 사내였고, 강경한 입장을 피력하는 쪽은 여인이었다.
여인은 사내의 말에 할 말이 궁해진 듯 입을 다물었다.
사내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인간이라도 은인을 함부로 대할 순 없어… 설마 ‘축복’까지 받은 엘프가 배신자일 리도 없고.”
할 말이 궁해졌는지 엘프 여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다가, 마지막으로 소심한 반항을 시도했다.
“그래도, 포프 영감이 엄청 싫어할 텐데…….”
“마을은 우리에게 전권을 맡겼어.”
물론 소용없는 저항이었다.
사내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여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여인은 사내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니 우리가 결정해야 해, 이샤. 알지? 빵은 빵으로…….”
“비수는 비수로…알겠어.”
아비앙은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지 살짝 불안해 보였다.
그리고 사내가 비수를 들고 왔을 때는 눈에 띄게 창백한 얼굴을 했다.
내가 죽으면 그녀도 죽는다.
저 비수가 마치 제 목숨을 끊을 흉기처럼 느껴지겠지.
나는 일부러 아무 말도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자, 잠깐만요! 안 된다니까요, 이 사람은 저를 위해 너무나……!”
직후 툭, 하고 끊어지는 밧줄.
나는 그제야 홀가분한 기분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엘프 사내는 곧이어 아비앙의 구속까지 풀어주었다.
헛된 간청이었음을 깨달은 아비앙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엘프 사내는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아가씨, 저 남자를 많이 아끼나 봐? 혹시 연인 사이야?”
“아, 아니에요!”
아비앙은 필사적으로 부정했으나 이를 들어줄 리가 없었다.
도리어 사내는 여인의 팔뚝을 쿡쿡 찌르며, ‘거 봐, 죽였으면 어쩔 뻔했어’ 같은 소리를 떠들어 댈 뿐이었다.
다행이었다.
일단 나를 해칠 생각은 없어 보였고, ‘기억상실’이라는 핑계로 한동안 마을에 머무르다 길을 익히고 떠난다.
아비앙의 말에 따르면, 엘프의 마을은 여럿이라고 했다.
‘본부’라고 불리는, 레오릭이 머무는 총본단 같은 곳이 존재하나 대개의 마을은 서로 떨어져 있었다. 마치 유르디나 군의 군영처럼.
한꺼번에 종족의 명맥이 끊기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죽으면, 이 대륙에 ‘엘프’라는 종족은 남지 않게 된다.
남왕국에서 암암리에 거래된다는 엘프 노예들이 유일한 후손이 될 터였다. 그렇다면 엘프는 영원히 ‘노예 종족’으로 남게 되겠지.
합리적인 사유였다.
내게 쌀쌀맞은 표정을 하고 있는 여인과는 달리, 엘프 사내는 꽤나 호탕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서글거리는 미소만 보아도 호인으로 보였다.
“내 이름은 루게트야, 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애는 이샤고… 참, 그러고 보니 당신 이름을 못 들었는데.”
“그,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서…….”
‘이안’이라는 이름을 들었다간 무슨 소문이 날지 몰랐다.
그나마 내 신상파기는 알지 못해 다행이었다. 지난 전투 때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엘프들을 통해 이미 확인한 사실이었다.
애초에 나를 알고 있었다면, 그따위 헐거운 매듭으로 날 억눌러 보겠다는 멍청한 시도는 하지 않았겠지.
그래서 나는 이름조차 잊어버렸다고 주장하기로 했다.
참고로 아비앙조차 내 이름을 모른다는 설정이었다. 내가 인류의 배반자로 낙인 찍히면,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염려되었다는 이유였다.
황급히 짜낸 거짓말치고는 나름 구멍이 없지 않은가.
내가 그렇게 뿌듯함을 느끼는 사이, 루게트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래, 이름… 이름을 어떻게 하지? 야, 이샤. 너는 무슨 생각이라도 있어?”
“그냥 ‘인간’이라고 부르면 되지, 뭐.”
불만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여전히 내게 시선조차 던지지 않고 있었다. 나와 접촉조차 꺼려진다는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인간이었고, 그녀는 엘프였다. 특히 인간들은 여성 엘프들을 잡아다 몹쓸 짓을 하기도 했다.
따지자면 이샤가 정상이었고, 루게트가 비정상이었다.
루게트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은 듯했다.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적당히 화제를 넘겨 버렸다.
“그래, 그러면 되겠네! 우리 마을에 인간은 하나뿐이니까… 하하, 혼자서 종족을 대표하게 돼서 부담스럽겠어.”
“아닙니다. 오히려 좋네요, 인간… 뭔가 재미있는 어감 같기도 하고.”
아비앙은 질렸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루게트와 농을 나누는 내 태연함에 놀란 듯했다. 그야 나도 속으로는 조마조마하긴 했지만, 이곳이 적진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팽팽히 당겨진 긴장의 끈은 정신을 일깨운다.
그렇게 신중히 대화를 나누며, 나는 어느덧 창고 바깥의 작은 헛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음, 이곳에 너희의 소지품을 모아두었거든. 사실 이대로 우리가 가질 예정이었지만, 돌려줘야겠지?”
검과 손도끼, 그리고 내 품을 지키던 공간 확장 주머니까지.
특히 공간 확장 주머니는 얼핏 보기에도 고급품이었다. 무려 황가의 상징까지 그려져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들은 워낙 문명과 동떨어져 생활한 탓인지, 그마저도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내가 우선 손도끼를 챙기려 들자, 이샤가 갑작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아, 아무래도 불안해……!”
그 한 마디에 내 손짓이 멈칫했다. 나와 루게트, 그리고 아비앙마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이샤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떨리는 음색으로 말했다.
“나, 나 들어본 적 있어… 손도끼를 들고 마인부터 신화 속의 괴물까지 때려 부수는 미친 인간이 나타났다고! 혹시 저 사람이 그 사람이면? 우리 다 죽는 거 아니야?”
“이샤…….”
루게트는 보다못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진지한 어조로 이샤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야. 본부에서 누가 호들갑을 떤 이야기가 와전된 거겠지, 상식적으로 그딴 인간이 존재할 수 있겠어?”
“그, 그건 그렇지만…….”
이샤는 이내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루게트의 말이 내심 옳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정작 그 '헛소문'의 주인공인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곳까지도 소문이 퍼지긴 퍼졌구나. 하기야, 엘프 첩자가 아비앙만 있을 리는 없으니.
더욱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조심스레 내 소지품을 챙겼다.
아비앙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궁금했던 점은 내 주머니 속의 상태였다.
그 사이에 털리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내부는 멀쩡했다. 혹시 소지품은 건드리지도 않은 걸까.
내가 그렇게 유심히 주머니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이샤가 내게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야, 너 인간! 일단은 살려주지만, 조심해.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벌였다간 당장 그 미간에 화살을 꽂아줄……!”
툭, 하고 나는 주머니를 털어 보관해 두었던 식량을 하나 꺼냈다.
빵이었다.
보존 마법 덕에 빵은 아직도 말랑하고 촉촉했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지는 않았으나, 몇 주가 지났는데도 이 상태라니.
감동적인 성능이었다.
다시금 황녀를 향한 감사의 말을 곱씹고 있던 차에, 나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주위가 고요했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분명, 이샤가 내게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내 눈이 흘깃 이샤를 향하자, 그곳에는 내 손 위에 들린 빵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는 여인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꿀꺽, 군침을 삼키는 소리가 내게도 들려올 정도였다.
이샤가 조심스레 내게 물어왔다.
“그, 그거… 혹시 빵이야?”
“네, 빵인데요.”
보면 모르나.
나는 이 시점에서 고개를 갸웃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 안쪽 본 적 없어요?”
“아니, 우리도 그러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우리가 열려고 들면 열리지 않더라고.”
루게트의 설명이었다.
설마 그러한 기능까지 달려 있을 줄이야. 나는 새삼스레 이 주머니 하나의 가치가 얼마나 할지 셈해 보았다.
내 그릇으로는 감당도 되지 않는 단위였다.
그러나 루게트나 이샤는 내 주머니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직 내 손 위에 올려진 빵, 그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엘프는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댔나.
저 간절한 눈빛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샤가 빵을 먹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빵을 권했다. 순수한 호의였다.
“드실래요?”
“으, 응… 핫! 아, 아니! 나는 인간 따위가 주는 건 받아먹지 않아! 그리고 그, 하나뿐인데 달라고 하기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이샤였으나, 이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어 보였다. 묘하게 염치를 차리는 걸 보니, 참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내가 인간이라서 싫다더니, 빵은 하나밖에 없어서 받기가 좀 그렇다니.
복잡한 여자였다.
그래서 나는 보다 직관적으로 이샤를 이해시키기로 했다.
툭, 하고 내가 주머니를 털자 빵 하나가 더 떨어졌다.
루게트와 이샤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그야 주머니의 크기로 보아, 빵이 두 개나 들어갈 자리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문명에서 유리된 엘프들은 공간 확장 주머니도 모르는 듯했다.
“빠, 빵이 하나 더……?”
그 얼떨떨한 중얼거림을 들으며, 나는 내 손에 쥐어진 빵 두 개를 이샤에게 건넸다.
처음에는 우물쭈물하던 이샤였다.
그러나 빵 냄새를 참기는 힘들었던지, 이내 눈을 질끈 감고 빵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유혹에 질세라 빵 하나를 후다닥 루게트에게 넘겼다.
참 사이가 좋아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그럴 필요 없는데도.
나는 그 두 사람이 보는 앞에서, 주머니를 몇 번 더 털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씩 떨어지는 빵.
“빠, 빵이 하나, 둘, 셋… 무, 무려 여덟 개나!”
“도대체 얼마나 있는 거야, 응? 호, 혹시 더 나눠줄 수 있어?!”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루게트와 이샤는 무척이나 극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 열광은 가히 지상에 강림한 신을 접견한 수도승과 비견할 만했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빵이 많냐고?
물론이었다. 빵뿐만 아니라 비스킷부터 육류, 각종 식량들이 주머니 안에 내장되어 있었다.
노숙을 할 때 식사의 질이 달라지니까.
지난번에 받은 포상금을 잔뜩 투자해서 챙겨둔 식량들이 잔뜩 남아있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전개였다.
나, 혹시 다른 세계에 온 걸까.
고작 빵과 공간 확장 주머니만으로 이토록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낼 수 있다니.
그러나 이마저도 아직 절정에는 미치지 못한 듯했다.
“이, 이 정도라면 마을 사람이 하나씩 빵을 먹을 수 있을지도……!”
“대단해…….”
루게트의 추측에, 이샤는 감격한 듯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입을 틀어막은 그녀의 눈가에서 옅은 이슬이 비치고 있었다.
엘프들은 다 이런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아비앙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비앙은, 살짝 홍조 띤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그, 엘프들은 식량 사정이 정말 좋지 않아서… 특히 엘프들한테 ‘빵’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음식이거든요.”
그래도 너무 과한 것이 아닐까, 하고 고민하고 있던 그때.
아비앙이 슬그머니 다가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슬쩍 내 주머니를 바라보며 한 마디.
“그, 그런데 그 주머니 안에 얼마나 들어가는 거예요?”
아비앙도 공간 확장 주머니가 신기하긴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나는 이때 직감했다.
엘프들이 상상 이상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평생을 제국 귀족으로만 살아오던 내 가치관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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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세리아는 부푼 가슴을 안고 유르디나 시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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