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53화 (353/649)

〈 353화 〉 5. 빵과 비수(51)

* * *

네리스는 이안 페르쿠스가 싫었다.

당연했다. 애초에 첫 만남부터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한때 그녀는 이안을 붙잡아 고문하려 들지 않았던가.

단지 불에 타고, 술이 부어진 후, 걸레 빤 물에 흠뻑 젖어버리는 치욕 끝에 패배를 자인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악연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네리스는 극심한 심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이안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은 세 가지에 불과했다.

불과 쇠와 피.

하나같이 골수가 얼어붙을 만큼 끔찍한 경험들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면 손가락을 날리는 상사라니, 최악이라는 표현조차 부족했다. 네리스는 그가 정식으로 아카데미 지부에서 부임했을 때, 차라리 죽고 싶었다.

어떻게 그딴 상사 밑에서 지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참고 인내해야 했다.

제국 첩보부의 일원이 되기 위해 한평생을 바쳐 온 네리스였다. 고작해야 상관이 맞지 않는다고 그만둘 수는 없었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여태껏 흘려왔던 피와 땀을 우습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더불어 제국 첩보부는 ‘요람이자 무덤’이기를 지향했다. 일단 가입하면 탈퇴가 지극히 어려웠다. 탈퇴를 한다 하더라도, 기밀 유지를 위한 각종 제약을 달고 살아야 했다.

그럴 바에야 몇 달만 더 참자는 심정이었다.

네리스는 아카데미 4학년이었다. 어차피 반년 후에는 졸업해서 떠날 몸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견뎌 주겠다고, 입술을 짓씹으며 결의를 다졌던 것이 불과 몇 달 전.

여인은 초조한 심정으로 방 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서글픈 공회전이었다.

아무런 답도 도출해내지 못하는 불모의 걸음걸이가 반복됐다. 이따금씩 엄지손톱을 물어뜯는 소리만이 울려 퍼질 따름이었다.

네리스는 이안 페르쿠스가 싫었다.

비번인 날에 불러내면 짜증이 솟구쳤다. 속으로 몇 번이나 욕지거리를 내뱉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쉬는 날에 싫어하는 상사의 호출?

화가 나지 않으면 이상했다.

또한 이 춥고 외진 북부까지 불러냈을 때는, 몇 번이나 갈등을 했을 정도였다. 되도 않는 핑계를 대서라도 가지 말까, 하는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었다.

물론 이를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이안이 두려웠던 탓이었다.

쓸데없는 의문을 제기한다고 또 손도끼를 들고 찾아오면?

미치광이는 예측이 불가능해서 미치광이였다.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결국 네리스는 도축장에 끌려가는 가축의 심정으로 북부까지 따라왔다.

그래, 그랬는데.

네리스는 이안 페르쿠스가 싫었다.

때때로 네리스를 걱정하거나, 인정하거나, 신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괜한 멋쩍음에 볼을 긁적인 적도 있었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네리스의 가슴에 맺힌 앙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지금은 이토록 초조하고 숨이 막히는 것일까.

이안이 정체불명의 장막에 갇혀, 실종된 지 벌써 며칠째.

유르디나 성은 말 그대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파견할 수 있는 여유 병력이 얼마나 되지?”

“침엽수림에 들어서려면 길잡이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최근 엘프들의 습격으로 인근 마을의 사냥꾼들이 많이 죽어서…….”

“성국에서 사절이 찾아왔습니다.”

어느덧 문 앞에 주저앉은 네리스의 귓전으로 수많은 소리들이 파고들었다.

오러의 끈이 문틈을 빠져나가 곳곳의 속삭임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훔쳐들어도 네리스가 원하는 정보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내를 발견했다는 소식은, 어디에도.

네리스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으며,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왜 그랬을까.

이안은 네리스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 만약 네리스를 버리고 도망쳤다면, 그는 실종되지 않았을 텐데.

사내는 필사적으로 보였다.

고작해야 부하가 아닌가.

그런데 왜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해 가며 그녀를 구해냈는지, 그리고 종래에는 스스로를 희생해야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숨이 턱턱 막혔다.

죄책감인지도 몰랐다. 이미 그깟 순수한 감정은 지워진 지 오래라고 생각했는데, 네리스도 근본은 여인이었다.

“침엽수림 내에 있다는 건 확실한가?”

“마도병단의 판단으로는 그렇습니다. 전이술식의 좌표가 어느 정도 특정되었는데, 침엽수림 깊숙한 곳이라고…….”

“깊숙한 곳? 그렇게 애매한 정보를 가지고 탐색하라고?”

웅웅거리며 실이 정보를 보내온다.

네리스는 말없이 그 이야기를 곱씹고 곱씹었다.

“애초에 말이야,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시체라도 찾으라 하셨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듣기만을 반복하다가.

“그것이 유르디나의 뜻입니다.”

네리스가 비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 낯빛에는 묘한 결의가 느껴지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치부하고 싶었다.

짜증나고 무서운 상관이 사라졌을 뿐이다. 용혈문자의 소유자를 지키지 못한 죄가 크긴 하나,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얌전히 있을 수가 없었다.

초조해서, 무서워서.

네리스는 품 안에 있는 호각을 만지작거렸다. 특수한 음파를 발생시키는 이 호각을 쓰면, 넓은 범위를 수색할 수 있었다.

이안이라면 반드시 그 음파에 반응할 테니까.

다만 혼자서는 침엽수림을 탐험할 수 없었다.

동료가 필요했다.

그렇게 조용히 유르디나 성의 1층으로 향하기를 한참.

네리스는 문득 소란을 눈치 챘다.

“……거짓말.”

로비를 나지막이 울리는 음색이었다.

네리스는 계단을 내려서다 말고, 멈칫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하나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는 여인들이 여러 명.

이안의 일행들이었다.

다만 회색 머리카락의 소녀를 상대하는 이는 여인들이 아니었다.

유르디나 성의 기사로 보였는데, 그는 무척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 아가씨? 이안 경이 돌아가셨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다만 생사와 행방이 불분명할 뿐…….”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

비명과도 같은 고함 소리였다.

텅, 하고 벼락같은 발검에 젊은 기사의 몸이 붕 떠올랐다. 뒤이어 쿵, 하고 울려 퍼지는 묵직한 충돌음.

기사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세리아는 검극을 목젖에 겨누고 있었다.

그 푸른 눈동자가 도깨비불처럼 타고 있었다.

“지금 장난해?! 이안 선배께서 수상한 장막 안에 갇혀 계셨는데, 너희는 그걸 구경만 하고 있었다고? 머저리라고 홍보라도 하고 싶었던 거야?!”

“하, 하지만 이안 경께서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핑계 대지 마.”

싸늘한 단언이었다.

평소의 공손한 어조 따위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못했다. 세리아는 으득, 하고 이를 갈면서 그 새파란 검극을 겨누고 있을 뿐이었다.

“살고 싶었던 거잖아… 아니야? 그래서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곳에 이안 선배를 방치한 거잖아. 이안 선배가 희생을 자처할 수 있도록……!”

세리아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가다간 목젖이 찔려 죽을 위기, 젊은 기사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참사를 막은 것은 가녀린 손이었다.

탁, 하고 손목을 쥐는 손에 세리아의 눈이 매서워졌다.

어느덧 성녀가 세리아에게 다가서 있었다.

우울과 피로에 잔뜩 젖은 목소리로, 성녀가 말했다.

“그만하시죠.”

“……아하.”

그러나 세리아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부푼 가슴을 안고 유르디나 성에 도착했던 세리아였다.

가까스로 선배에게 인정받을 만한 실력을 쌓아 왔다. 그런데 느닷없이 행방불명이라니, 심지어 생사조차 알 수 없다니.

제정신을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세리아는 조소처럼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요? 다들 찔리기라도 하셨나?”

“세리아 양…….”

성녀는 분노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그럴 기력은 전부 소진했다는 듯, 슬픈 눈빛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전장에서 감정을 우선할 수는 없어요. 우리는 이안에게 전권을 맡겼고, 따라서 그 지시를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안 선배를 혼자 둘 의무요?”

“아니요, 이안의 의지를 헛되게 하지 않을 의무.”

침착한 음색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어서, 성녀의 마음이 여전히 편치 않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 연분홍빛 눈동자에 맺힌 은은한 분노만 봐도 그랬다.

“당시 우리는 그 마법의 정체를 추측할 수 없었어요. 고작해야 결계나 공간전이, 혹은 대규모 소실 마법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죠… 어느 쪽이든 우리는 도움이 안 돼요.”

“최소한 혼자 두진 말았어야죠.”

이를 악물면서, 세리아는 반론했다.

그러나 성녀에게도 할 말은 남아있었다.

그녀는 그 짧은 시간 떠올렸던 수많은 가능성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만일 내부를 폐쇄시키는 결계라면 외부에서 해결해야 해요. 발동 즉시 내부는 아수라장이 될 테니까… 공간전이라면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넓은 공간을 먼 거리로 이동시킬 순 없어요. 그렇다면 침엽수림 내부가 가장 가능성 있겠죠?”

물 흐르듯 흘러나오는 추론에 세리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으나, 마땅한 반론이 떠오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당시 성녀의 뇌는 팽팽 돌다 못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내의 위기를 목전에 두었던 덕이었다.

“그렇다면 특정 좌표값을 설정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조난시키는 쪽이 가능성 있어요. 만일 적진에 떨어진다면 도리어 단신이 탈출하기 더 유리하고요. 그리고 대규모 소실 마법?”

후후, 하고 성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랬다간 모두 죽어요… 알겠어요? 이안의 희생을 헛된 것으로 만들 뻔했다고요!”

“좋겠네요.”

그러나 성녀의 그 절절한 설명을 듣고도, 세리아가 보이는 반응은 담백했다.

코웃음.

소녀는 등을 돌린 채, 검을 허리춤에 갈무리했다.

“이안 선배의 희생으로 살아남아서… 난, 그럴 생각 없어요.”

세리아는 그렇게 한결 살벌해진 기세로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이 도달할 곳은, 유르디나 가문의 가주실.

아버님과 언니에게 인사를 올린 직후 허가를 구할 예정이었다.

침엽수림으로 향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그녀를 멈춰 세운 것은, 다름 아닌 네리스였다.

“……아가씨?”

세리아는 흠칫, 하고 몸을 굳히며 다급히 옆을 돌아보았다.

기척이 희미했다.

바로 옆에 서 있었는데, 어떻게.

그러든 말든, 네리스는 싱긋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저와 마음이 좀 맞는 것 같은데, 어때요? 잠깐 대화나 나눠보는 건.”

네리스는 비로소 일이 좀 풀린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진녹색 눈동자가 흘깃 로비를 향했다. 그곳에는 아직도 침울한 얼굴을 하다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여인들이 남아있었다.

저만하면 충분했다.

이제는 그저 이안이 버텨 주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이었다.

이안이 살아주기를 바란 것은.

네리스는 그 사실조차 눈치 채지 못한 채, 입술을 짓씹었다.

멋대로 죽게 두지는 않으리라.

*

한편, 이안은 엘프의 마을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래봐야 준비한 음식이라곤 빵밖에 없었다. 연회보다는 조촐한 만찬에 불과한 행사였다.

허나 그 반응만큼은 폭발적이었다.

“세상에, 빵이 이렇게나 많이…….”

“부, 부드러워!”

“그, 정말 먹어도 되는 거야?”

이안은 아무런 말도 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솔직히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조심스레 물어오는 이샤의 눈빛이 워낙 간절해서, 재빨리 답을 내놓았을 뿐이었다.

“네, 드시죠. 어차피 저야 많이 있어서…….”

그와 동시에 허겁지겁 빵을 집어가는 열댓 개의 손들.

이안은 그들이 어서 식사를 하길 바랐으나, 그들 중 누구도 함부로 빵을 배어 물지는 못했다.

단지 찔끔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을 뿐.

“세계수시여,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이토록 귀한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이안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엘프들의 삶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따뜻해……!”

“부드럽고 달콤해요. 예전에 한 조각 얻어먹었던 빵은 이러지 않았는데!”

“이, 이게 정말 빵입니까?!”

그것도 꽤 많이.

이안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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