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4화 〉 5. 빵과 비수(52)
* * *
어린 시절, 나는 엘프를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제국의 귀족으로 태어난 자의 숙명이었다.
엘프는 오래 전부터 인류의 적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주로 마찰을 빚는 쪽은 제국이었으므로, 나는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주입받았다.
엘프들이 무고한 이들을 얼마나 죽였는지.
불태운 민가가 수백 채에 이르며, 전투 중에 잔혹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는 소리도 들었다. 아직 머리가 덜 자랐던 나로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엘프는 마수 비스무리한 존재구나.
단지 외형이 아름다울 뿐이었다. 그래서야 괴물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이제 그 시절의 순진해 빠진 꼬맹이가 아니었다.
나이를 먹어가며, 내 시야도 차츰 넓어져 갔다. 그러다 보니 깨달은 점도 있었다.
반드시 나쁜 사람들만이 욕을 먹는 것은 아니었다.
권력은 적을 창출함으로써 공고해진다. 그 가상의 적은 악마, 혹은 괴물이 되어 철저히 소각해야 될 대상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엘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엘프 중에도 선량한 이들이 존재하리라 생각했다. 대개는 인류를 향한 증오에 가득 차 있겠으나, 그래도 몇몇은 보다 온건한 태도를 취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나 또한 온건한 자세를 지녀야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고정된 사고관의 힘은 막강했다.
지난 며칠 동안 느꼈다.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을 만큼 엘프를 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제국의 귀족으로서, 마땅히 토벌해야 하는 악적들.
어린 시절부터 뿌리 깊게 틀어박힌 인식이었다.
이를 간단히 지워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게 엘프는 여전히 신용할 수 없고, 위험천만한 존재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 세계관을 박살내는 사건이 하나.
바로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빠, 빵! 빵이 이렇게 부드러운 거였어?!”
이샤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내게 묻고 있었다.
그녀는 새로 맛보는 미식의 세계에 깊이 감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그렁그렁 맺은 눈물을 뚝뚝 쏟아내기라도 할 기세였다.
조금 더 점잖긴 했으나, 루게트가 보이는 반응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는 감탄한 표정으로 빵을 제 입에 쑤셔넣었다.
“이, 이허! 부흐러허!(이, 이거! 부드러워!)”
그러다 목이 막혀 급히 물을 꿀꺽꿀꺽 삼키기까지.
그나마 이곳이 설원이라서 다행이었다. 눈을 녹여 증류시키면 돼서, 식수 자체는 넉넉한 편이었다.
이를 얼리지 않고 보관하는 것이 문제일 뿐.
나는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 이 주머니가 특별한 덕입니다. 사실 빵은 오래 보관할수록 딱딱해지고 맛도 없죠. 그리고 무엇보다 설탕 같은 조미료도 많이 들어간 편이라…….”
“설탕!”
내 한 마디, 한 마디에 엘프들이 보이는 성원이 꽤 뜨거웠다.
스스로를 ‘미에라’라고 소개한 엘프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이샤보다 나이가 많아 ‘미에라 아줌마’라고 불린다는데, 솔직히 내 눈으로는 분간이 불가능했다.
둘 다 내 또래로 보일 뿐이었다.
과연 죽기 직전까지 노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엘프다웠다.
그 멋들어진 적갈빛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미에라 아주머니는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들은 적이 있어, 단맛이 나는 돌멩이라면서? 먼 옛날에는 우리 엘프들도 요리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의 기록이 아직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까?”
“그럼! 우리는 전통을 소중히 하거든. 또, 수명이 긴 만큼 잃어버리면 기억나는 대로 다시 쓸 사람도 많고… 음, 궁금하면 우리 엘프들의 전통 조리법을 알려줄까?”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수천 년 전의 기록도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혹시 암흑교단에 대한 정보도 적혀 있지 않을까?
솔직한 심정으로는, 수천 년 전 엘프들의 전통 요리도 궁금하긴 했다.
대수림에 머물던 시절의 요리였다. 대륙의 최북단으로 쫓겨난 만큼 당시의 식재료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지.
하지만 내게 가지고 있는 식재료로 재현이 가능하다면?
이 또한 엘프들의 호감을 사는 데 쓸 만하지 않을까.
사실 별 의미 없는 고민이었다.
엘프들은 빵 하나만으로 놀랍도록 내게 호의적인 여론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핍박받고 살아온 이들답지 않았다.
오히려 말하자면, 순박한 시골 사람에 가까웠다.
나는 그 점이 유독 당혹스러웠다.
내 고향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는 것만 같아서.
“알려주신다면 감사하죠.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접하고 싶거든요. 그러면 제 기억이 돌아올 것만 같아서…….”
“어머, 불쌍해라.”
미에라 아주머니는 단박에 연민 어린 눈빛을 했다.
자식까지 두고 있었다니, 유독 동정심이 많은 듯했다. 본래 배고프고 가난한 이들이 가지기 힘든 감정이었다.
당장 살기 바빠 죽겠는데, 누굴 챙기고 돌봐준단 말인가.
그에 비하자면 엘프들은 보다 넉넉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오래 살기 때문일까.
미에라 아주머니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나를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려무나, 꼬마야. 나는 검과 도끼를 가진 인간이 있다길래 엄청 무서워했지, 뭐니! 그런데 지금 보니 듬직하고, 빵도 주고…….”
“우리랑 별로 다를 것도 없는데?”
맞장구를 친 엘프는 ‘돌프’라고 불리는 근육질의 사내였다.
그는 마을에서 목수를 맡고 있다고 했다. 더불어 나무꾼과, 건축가와, 기타 등등.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서는 으레 있는 일이었다.
“나는, 마음에 들어… 무엇보다 저 작은 꼬마 엘프를 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는 점이 감동적이야. 요즘 엘프 사이에서도 이만한 동족애를 보이긴 힘들거든.”
“그래, 한동안 이곳에 머무르면서 천천히 생각해. 솔직히 우리 사정이 좋진 않지만… 기억을 되찾는 대로 떠날 채비를 할 시간은 있을 거야.”
미에라에, 돌프에, 루게트까지.
내게 호의적인 엘프들은 이 정도였다. 그 외에는 아직 나를 경계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빵을 준 이후 다소의 고마움도 느껴졌지만 말이다.
그래도 상상 이상으로 온건한 대우였다. 나는 약간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생각했던 엘프들이 아니었다.
나는 보다 인간에게 적대적이고, 수많은 은원 관계에 얽혀 잔인해지고 사나워진 종족이리라 예상했는데.
당장 마주한 이들은 하나같이 평범해 보였다.
이래서야 인류와 별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나는 문득 기도가 수축하는 것을 느꼈다. 느닷없이 숨이 막혔다.
떠오른다.
내 검과 도끼 앞에서 쓰러지던 수많은 엘프들이.
견디다 못한 내가 탁, 하고 가슴을 두드리기 직전.
“그래봐야 인간은 인간이야!”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그 갑작스러운 비난에 도리어 숨통이 트였다. 나는 그 고함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무리 봐도 1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앉아 있었다.
루게트가 내 옆구리를 툭툭 치며 속삭였다.
“저분이 ‘포프 영감’이야.”
영감이라고?
나는 그 호칭에 더욱 놀라 버렸다. 오히려 주변에 있는 엘프들보다 어려 보이는데.
포프는 무척 인상을 쓰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손도 대지 않은 빵이 남아 있었다. 힐끗힐끗 눈이 가는 것으로 보아 먹고는 싶은 모양이지만,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좌중의 시선이 몰리자 그는 더욱 목청을 키웠다.
“인간 놈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는 놈들뿐이야! 다들 그렇게 당하고도 잊어 버렸어?! 우리가 왜 이 춥고 먹을 것도 없는 북방까지 밀려났는지!”
포프 영감은 분을 참지 못하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쿵, 쿵, 땅을 두드리는 발이 그 분노의 크기를 짐작케 하고 있었다.
행동거지만큼은 영감이 맞았다.
나는 흐음, 하고 침음을 삼키며 포프를 바라보았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를 보며 안심까지 하는 내가 있었다.
그래, 이래야 엘프지.
일그러졌던 세계관이 차츰 수복되는 느낌이었다. 직전까지만 해도 턱턱 막히던 호흡이 원활해졌다.
포프 영감은 증오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아직도 눈앞에 선명해! 우리 마을을 덮치던 그 악마 같던 인간놈들… 그래, 그놈도 너처럼 멋들어진 검을 가지고 있던 기사였지.”
“포프 영감님…….”
결국 중재에 나선 쪽은 루게트였다.
그는 이샤와 함께 마을 엘프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듯했다. 말하자면 마을의 지도자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사내의 입에서 애걸에 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 인간들은 경계해야겠죠. 하지만 우리 엘프의 아이를 지켜준 사람이잖아요? 설마 ‘축복’까지 받은 아이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고… 그렇죠, 포프 영감님? 영감님도 ‘축복’을 받았으니 잘 아시잖아요.”
“크흠!”
‘축복’을 받았다라.
흥미로운 정보였다. 내 눈이 새삼스레 포프 영감의 몸을 훑었다.
겉으로 보기엔 짙은 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꼬마아이로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저 안에도 아비앙이나, 설표 마인에게 깃들었던 그 흉측한 살덩이가 있다니.
포프는 뿌듯함을 숨기지 못하고 어깨를 쫙 펼쳤다.
“그, 그건 레오릭 님께서도 내 신앙심을 인정하신 덕이 아니겠나?”
“그 덕에 사냥감을 본부에 엄청나게 보내셨죠. 우리 마을의 고기를 책임질 엘프는 영감님밖에 없는데.”
“그땐 ‘축복’만 얻으면 더 많은 사냥감을 잡을 줄 알았지!”
내심 찔리는 바가 있는지, 포프는 루게트의 지적에 그렇게 울컥했다.
물론 씨알도 먹힐 리가 없었다.
루게트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젓자, 포프는 몇 번 더 헛기침을 하더니 등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몇 마디.
“하여튼, 인간 놈들은 믿으면 안 돼! 다들 내 말 잘 들어둬, 그러지 않으면 후회할 테니까!”
“영감님, 빵은 드시고 가셔야죠!”
“흥, 독이 들었을 줄 누가 알고?”
결국 루게트는 포기했다는 듯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포프를 말리려 몸을 일으켰으나, 그래봐야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이샤가 몰래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하시네, 포프 영감님…….”
무언가 사정이 있다는 말투였다.
궁금증이 일었던 나는, 슬그머니 이샤의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저분이 뭐하시는 분인데?”
“깜짝이야!”
이샤는 내 소리 없는 접근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동그랗게 뜨인 눈동자가 나를 향했으나, 나는 태연했다. 나는 재차 물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야? 포프 영감님은 내가 싫으신 것 같은데…….”
“그, 그건 네가 인간이라 그렇지!”
이샤는 나를 위로하고 싶은 건지, 탓하고 싶은 건지.
헷갈리는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포프 영감님은, 예전에 인간들에게 가족을 잃었거든…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중에 참사를 당한 거지.”
“평화롭게 살고 있는데 습격을 했다고요?”
“그래, 너희 인간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잖아!”
이샤가 가증스럽다는 듯 나를 쏘아보며 씩씩대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분한 모양이었다.
“포프 영감님뿐인 줄 알아?! 너희가 주기적으로 창고를 불태워서 굶어죽은 엘프들도 많아! 그나마 포프 영감님 같은 사냥꾼들이 있으니, 굶어죽지는 않고 있지만…….”
나는 잠자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사냥꾼이셨군요.”
“……야, 너 내 이야기 듣고 있어?”
물론 듣고는 있었다.
필요한 부분만.
나는 속으로 계산을 끝마쳤다.
솔직히 말해, 나는 루게트나 미에라 아주머니보다 포프가 더 편했다. 나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모습만 보더라도 그랬다.
내가 알고 있던 엘프 그대로였다.
필요에 의해 각을 세우고, 칼을 부딪칠 수 있는 관계.
이상적이었다.
언젠가 나는 엘프 마을을 떠나야 했으니까.
한 줌의 미련조차 남기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듯했다.
레오릭의 ‘축복’부터 시작해서, 평화로운 엘프 마을을 습격했다던 군대까지도.
나는 그와 접점을 늘려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야, 너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칼 좀 찼다고 까불지 마라? 저래보여도 포프 영감님은 설표 마수를 사냥한 적도 있는 엄청 강한 사냥꾼이라고!”
사냥이라.
나는 내 허리춤에 매인 검과 손도끼를 만지작거렸다.
나쁘지 않은 취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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