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55화 (355/649)

〈 355화 〉 5. 빵과 비수(53)

* * *

엘프 마을에서의 삶은 새로웠다.

여태껏 제국 귀족으로만 살아왔던 나였다. 북부 오지에서 지내는 생활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새 이웃사촌들은 엘프가 아니던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피치 못할 우연과 인연이 겹쳐, 나는 엘프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또 시간은 술래잡기의 술래와 같이 흐른다.

눈을 두고 있으면 움직이지 않지만, 어쩌다 눈을 돌리면 어느덧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는 엘프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참 정신없이 지냈던 며칠이었다.

열댓 명 남짓의 마을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인사를 나누고,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하기 위해 애를 쓴 지 얼마쯤.

정신을 차려 보니 하루치 달력이 벌써 몇 장이나 넘어간 뒤였다.

그간 내가 깨달은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하나, 엘프들의 식량 사정은 상상 이상으로 열악했다.

마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었다.

나는 돌프 아저씨의 초대를 받았다.

연회 때도 나를 유독 마음에 들어 하더니, 엘프의 저녁식사를 대접해 주겠다는 제안까지 건넨 것이다.

나로서는 거절할 까닭이 없었다.

마침 엘프들의 식생활이 궁금하기도 했던 참이었다. 흔쾌히 수락의 의사를 밝힌 그날 밤, 나는 루게트와 함께 돌프 아저씨의 집으로 향했다.

허름한 오두막이었다.

마을의 목수라고 들었는데, 정작 사는 집은 마을의 엘프들과 다르지 않았다. 엘프의 사정을 떠올려 보면 이해하지 못할 풍경은 아니었다.

건축은 수많은 기술의 집합체다.

‘건축’에는 설계부터 시작해서, 소재나 가공 등의 여러 문제가 얽혀 있었다. 엘프가 이를 전문적으로 훈련받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자원이 한없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그래서 엘프에게 ‘목수’란 대개 손재주 있는 이를 지칭하는 표현에 불과했다. 그 호칭에 걸맞은 전문성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돌프 아저씨의 오두막만 보더라도 그랬다.

스스로 지낼 곳을 열과 성을 다해 짓지 않는 목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 결과물이 남들에게 지어준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니.

물론 이는 돌프 아저씨의 성품을 드러내주는 예이기도 했다.

그는 꾸밈없고 정직한 엘프였다. 제 일이든 남의 일이든 구분 없이 최선을 다할 만큼.

더불어 그는 이타심을 갖춘 선량한 이웃이기도 했다. 술만 마시면 다혈질에, 다소 무식하다는 단점이 있다곤 했지만 말이다.

아직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술 마신 돌프 아저씨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당장 끼니를 때울 식량조차 부족한 엘프였다. 술을 만들 여력이 남아 있을 때는 많지 못했다.

루게트한테 듣기로, 술을 마시는 날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다나.

아무래도 내가 만취한 돌프 아저씨를 볼 날은 오지 않을 듯했다.

나는 그렇게 루게트와 한담을 나누며 오두막으로 들어섰다.

너절한 외관과 달리 오두막의 내부는 아늑하고 따스했다. 중앙에 위치한 화덕 겸 벽난로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며 열기를 전달했다.

일순 후끈한 열기가 낯가죽을 훑고 지나갈 정도였다.

남부에서 올라온 엘프들은 유독 난방에 민감했다. 그들은 과하다 싶을 만큼 많은 목재를 쓰곤 했는데, 이는 침엽수림에 널린 것이 목재인 탓도 있었다.

그 외의 자원은 하나같이 부족했다. 엘프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아낌없이 쓸 수 있는 것은 땔감뿐이었다.

정작 나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익스퍼트에 이른 육체는 더위와 추위를 잊는다. 북부의 매서운 한파조차 내 몸을 파고들 수는 없었다.

다만 대접에는 감사로 갚는 것이 예의, 나는 고개 숙여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돌프 씨… 방 안이 무척 따뜻하네요.”

“하하, 기껏 찾아온 손님을 추위에 떨게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보다, 다들 출출하지?”

묘한 기대감이 서린 목소리였다.

그러면서 돌프 아저씨는 손까지 싹싹 비비고 있었다. 마치 멋진 장난감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어린아이 같은 모양새였다.

엘프들의 특징이었다.

그들은 수백 년을 살아가면서도 동심을 잊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순진했다. 그것이 장수의 비결일지도 몰랐다.

닳고 닳은 심장으로 수백 년을 살아가기는 너무나 괴롭다.

어린아이처럼 하루하루를 축복으로 여기는 자세를 지녀야 할 터였다.

나는 아저씨의 반응에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내심 이는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얼마나 훌륭한 음식이기에 저토록 신이 난 걸까.

루게트의 마음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은 듯했다.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그가 돌프 아저씨께 물었다.

“아니, 돌프 아저씨. 오늘 메뉴로 뭘 준비하셨길래 그러세요?”

“후후, 자네도 보면 깜짝 놀랄걸?”

돌프 아저씨는 그 질문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흐릿한 호선에서 자신감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나와 루게트는 안달이 난 기색을 보이자,돌프 아저씨는 그제야 만족한 듯 걸음을 옮겼다.

주방을 향해서였다.

나와 루게트의 기대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프 아저씨는 커다란 냄비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뚜껑의 틈새로 후끈한 김이 배출되고 있었다.

묘한 육향이 내 코끝을 스쳤다. 난생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혹시 북부에서만 자생하는 생물로 만든 요리일까. 나는 들뜨는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돌프 아저씨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냄비 뚜껑을 치운 것은 그때였다.

직후 새하얀 김이 시야를 어지럽히더니, 이내 숨겨져 있던 재료가 눈에 들어왔다.

털가죽이 벗겨져, 그 불그스름한 맨살을 드러낸 동물.

쥐였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나를 환영하는 줄 알았는데, 혹시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였다.악질적인 장난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절로 들 만큼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물론 그 의혹이 무너져 내릴 때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쥐잖아… 그것도 무려 두 마리나! 돌프 아저씨, 어떻게 잡았어요?”

“시험 삼아 덫을 만들어 봤는데, 알다시피 쥐는 앞니를 가는 습성이 있잖나? 혹시 몰라 나무 조각을 미끼로 넣어봤지… 그러니까 보게, 이 멍청한 쥐들이 덫에 잡혀 있지 않겠나? 하하하!”

루게트는 탄성을 터트렸고, 돌프 아저씨는 우쭐한 낯으로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는 말없이 냄비 안에 담긴 수프를 내려다보았다.

흔해빠진 야채조차 들어가지 않은 요리였다. 쥐를 제외한 내용물이라곤,정체불명의 이끼만이 둥둥 떠다니고 있을 뿐.

적절한 향신료를 가미하지 못한 탓에 역한 내가 풍겼다.

그렇다고 수프에 넣은 쥐가 큰 것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손바닥만한 크기의 쥐 두 마리, 이를 만찬이라고 내놓다니.

희멀건 국물은 어떻게든 양을 많게 하려던 시도의 일환으로 보였다.이를 한껏 퍼먹어 봐야 이끼 흙내와 고기 잡내만 날 텐데도.

그럼에도 루게트와 돌프 아저씨는 전에 없이 신난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깊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놀라운 점은 그뿐만이 아닐세. 잘 보게, 이 쥐의 배를…….”

더 놀랄 것이 남아있단 말인가?

내 눈이 멍하니 쥐의 사체를 향했다. 확실히 수프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는 쥐의 배가 볼록해 보이긴 했다.

미처 내가 의문을 제기하기도 전이었다.

돌프 아저씨는 집게로 배가 볼록한 쥐를 꺼냈다. 그리고 능숙한 칼질로 쥐의 자그마한 배를 갈랐는데, 그 안에서 반투명한 살덩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쥐의 태아들이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헛구역질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반면 루게트는 더욱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임신한 쥐잖아요! 태아가 또 별미인데… 운이 좋아도 너무 좋은데요?”

“그렇지? 하지만 이 별미는 특별히 우리의 귀한 인간 손님에게 양보하지. 무려 우리에게 빵을 대접해 준 은인이 아닌가.”

돌프 아저씨의 흐뭇한 목소리에, 루게트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입가에 순수한 호의로 넘치는 미소가 맺혔다.

“인간, 운이 좋은데? 임신한 쥐는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거든. 살이 통통할 뿐만 아니라, 태아까지도 그 부드러운 식감이 일품이지.”

“그럼 두 분은 뭘 드시게요?”

“하하하, 걱정 말게! 우리에겐 아직 쥐 한 마리가 남아있으니.”

돌프 아저씨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상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투였다. 마치 쥐 한 마리를 성인 남성 둘이 나눠먹는 삶이 당연하다는 듯.

내 표정이 더욱 암울해졌다.

이들의 호의를 봐서 맛을 보긴 해야 할 텐데, 도저히 손이 가지 않았다. 쥐까지는 어떻게 참을 수 있어도 태아는 무리였다.

결국 나는 그들에게 역으로 제안해야 했다.

“돌프 아저씨, 그리고 루게트. 이 멋진 요리를 더 빛내줄 재료가 내게 있는데, 잠깐 맡겨 주시겠어요?”

돌프 아저씨와 루게트의 눈이 멀뚱해졌다.

두 사람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엘프들은 항상 배를 곯으며 살고 있었다.먹을 양을 늘려주겠다는데 거절할 리는 없었다.

나는 어설픈 요리 솜씨로나마 최선을 다했다.

토마토와 양파, 파를 추가하고 소고기와 향신료를 뭉근히 끓여냈다. 저녁식사가 한참 늦어지긴 했으나,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루게트와 돌프 아저씨는 눈물 한 방울을 떨구었다.

“맛있어, 기름지고 감칠맛도 뛰어나…….”

나는 루게트가 탄성을 터트리는 사이, 무사히 쥐 고기를 먹지 않고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은 숟가락을 들기 꺼려지긴 했지만 말이다.

차차 익숙해져야 할 문제였다.

그날의 식사는 그렇게 끝났다.

오두막을 떠나기 직전, 돌프 아저씨는 나와 단단한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감격으로 찔끔 새어나온 눈물을 훔쳐내며 말했다.

“고기 냄새가 좀 줄어든 게 흠이지만, 그 이상으로 맛있었네.”

일부러 그 잡내를 죽이려 한 건데.

엘프들은 그 잡내마저 일종의 풍미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입맛은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그렇다면 나도 이 식생활에 익숙해져야 하는 걸까.

쥐 고기뿐이라면 어떻게든 먹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여러 잡념과 함께 나는 엘프 마을에서 또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내 동거인인 아비앙이 식사를 가지고 찾아왔다.

희멀건 죽이었다. 걸쭉한 국물 사이로 새하얀 실 같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이건 뭐야?”

“나무 죽이에요. 우리 엘프들의 주식이죠. 나무 껍데기를 벗겨서, 그 내부의 연한 부분을 오래도록 끓여먹는 거예요.”

하, 하는 헛웃음조차 새어나오지 않았다.

단지 나는 곧바로 떠오르는 의문을 던졌을 뿐이었다.

“영양분은 있어?”

“섬유질은 풍부하죠.”

“그거, 소화 안 되잖아.”

결국 아비앙은 더 이상의 답변을 거부했다.

얼굴이 붉어진 것으로 보아, 엘프들의 열악한 삶을 증언하기 부끄러운 듯했다. 그래봐야 지금의 내겐 숨길 수 없는 현실일 텐데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식사를 시도했다.

나무로 만든 숟가락으로 죽을 휘휘 젓자 새하얀 섬유질이 달라붙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각오를 다지고 나무 죽을 한 숟가락 퍼먹었다.

얇은 실이 걸리적거렸다. 풋풋한 풀냄새가 불쾌할 만큼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주식으로 삼기엔 지나치게 맛이 없었다. 심지어 영양분도 형편 없었고.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에 불과했다.

“이대로 말리면 종이로 써도 되겠는데…….”

헛웃음을 삼키며, 나는 결심했다.

이따위 삶에는 적응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이 마을의 식량 사정을 내 손으로 개선하는 것뿐.

며칠 후, 나는 직접 사냥에 나서기로 했다.

포프 영감과 이샤, 아비앙과 함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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