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56화 (356/649)

〈 356화 〉 5. 빵과 비수(54)

* * *

침엽수림은 넓고 복잡했다.

어딜 가도 침엽수밖에 서 있질 않으니, 어린 시절부터 훈련받은 길잡이가 아니면 방향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내가 엘프 마을을 함부로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대로 홀로 마을을 떠나봐야 미아가 될 뿐이었다.

그나마 내 동료인 아비앙이 길을 익히고 있긴 했으나, 나는 차마 그녀에게 동행을 요청하지는 못했다.

아직 그녀에게는 할 일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비앙은 여동생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이름이 베티였던가.

그녀에게 듣기로, 여동생은 ‘본부’라 불리는 장소에 머무르고 있다고 했다. 장애가 있거나 늙어 쇠약해진 엘프를 제물로 바쳐 음식을 만드는 곳이었다.

그 ‘레오릭’이 지내는 곳이기도 했고.

‘축복’을 부여하고, 마인을 만드는 작업 또한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터였다.

나는 아비앙에게 물었다.

“왜 엘프들은 식량이 부족한 거지?”

“……?”

아비앙은 광인의 헛소리를 들은 것마냥 얼이 빠진 얼굴을 했다.

그 눈빛에 나를 향한 희미한 책망이 섞여 있어, 나는 재차 물어야했다.

“왜 엘프들의 식량 사정이 열악하냐고. 그럴 이유가 없잖아?”

“그게 다 사악하기 짝이 없는 인간놈들… 이, 아니라.”

아비앙은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이내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주워 담았다. 그리고 크흠, 흠, 하고 헛기침을 한 뒤 다시 몇 마디.

“인류 때문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이 춥고 어두운 침엽수림으로 내몰았잖아요. 그리고 주기적으로 식량 창고도 불태우고… 우리를 습격하고, 동족들을 죽이고!”

으득,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답이 이어질수록 아비앙의 눈빛에서 타는 불꽃이 강렬해졌다. 분노와 증오를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이전까지는 그 마음을 이성으로만 이해했다. 수백 년에 걸친 원한이 누적되고 누적된 결과라고, 그런데 내가 본 엘프 마을의 풍광은 어떤가.

이들이 악마인가?

인류의 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강인하고 대단한 존재인가.

단 며칠만에 나는 옅은 회의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속으로 몇 번이고 이들은 적이라고, 제국의 귀족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엘프와 치르는 것은 전쟁이 아니었다.

사냥이나 도살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그렇다면 엘프에 의해 불타버렸다는 마을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억지로 가다듬었다. 어차피 이 또한 내가 캐내야 할 진실이었다.

엘프와 함께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그 길이 열리겠지.

그럼에도 당장 떠오르는 의문을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아니, 그거야 알고 있는데… 왜 마인을 이용하지 않는 거야?”

난데없는 질문에 아비앙의 고개가 갸웃했다.

한창 해묵은 감정을 토해내고 있던 그녀가 내게 물어왔다.

“마인이라뇨?”

“너 못 봤어? 나랑 싸웠던 설표를 닮은 괴물, 그게 바로 마인이야. 그리고 마인들은 동종의 마수들을 지배할 수 있거든.”

이는 고아원에서 길포드와 전투를 할 당시에도 증명된 사실이었다.

길포드는 원숭이 마수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아원을 포위하고, 내게 생사결을 강요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쯤에서 의문이 하나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왜 레오릭과 마인들은 마수들을 이용하지 않지?

군영을 습격할 때도 그랬지만, 이 점이 의문이었다. 예를 들어 식량 사정도 마수들을 조종하면 간단히 개선할 수 있었다.

마수들을 불러와 도축하면 그만이었다.

마수 고기는 의외로 영양가가 높았다. 심지어 조리 방법에 따라 맛도 뛰어나서, 제도와 아카데미 등 유행에 민감한 곳에는 마수 전문 식당이 차려져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레오릭은 그러지 않았다.

도대체 왜.

원인 없는 결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그 점을 짚고 넘어가자, 아비앙은 난생 처음 듣는 소리라는 얼굴을 할 뿐이었다.

“무슨 소리에요? 그분들이 마인이라고요?”

“당연히 마인… 됐다, 말을 말자.”

얼핏 보기에도 아비앙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보였다.

대신 나는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그래서 요즘은 어때? 그 여동생의 소식은 좀 들었어?”

“아니요, 본부로 갈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어요. 그러니 이 마을의 대표가 본부로 갈 때 편지를 전하려고요. 물론 제가 가고자 한다면 갈 수 있겠지만…….”

그러면서 내 낯빛을 흘깃흘깃 살피는 푸른 눈동자.

나는 흐, 하고 헛웃음을 머금었다.

“안 돼. 본부는 너무 위험해.”

아비앙이 아니라, 내가.

아비앙의 목에 걸린 초커는 내가 주변에 없을 시 폭발한다. 반나절에서 한나절은 영향이 없겠으나, 본부도 그토록 가까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본부에는 레오릭을 비롯한 엘프 수뇌부들이 머무르고 있을 터였다.

아무리 외진 곳에 있더라도 엘프의 정보망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쯤 되면 내 용모파기쯤은 외우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나로서는 굳이 위험을 자처할 필요가 없었다.

기껏해야 풀이 죽은 아비앙이 조금 안쓰러웠을 뿐.

내 손이 소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도 오늘은 오랜만에 산책을 나가잖아?”

“산책이 아니라 사냥이잖아요…….”

“그게 그거지, 뭐.”

내 너스레에 아비앙은 어이가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요 며칠 함께 지낸 덕일까, 아비앙은 나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은 덜어낸 듯했다. 이처럼 앙큼한 눈빛까지 보낼 정도라면 말이다.

나쁘지 않은 변화였다.

어차피 한동안은 함께 지내야 할 동거인이었다. 인류와 엘프는 적대관계인 만큼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질 필요는 없었으나, 필요 이상으로 멀어질 이유도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호언장담을 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줄 테니. 설마 숲에서 별일 있겠어?”

그래, 그럴 리가.

**

있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단단한 노끈이 몇 겹이나 겹쳐져 있었다. 발목은 자유로웠으나, 손목이 묶인 것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웠다.

이를 두고 이샤는 우쭐해져서 말했다.

“말했잖아? 우린 아직 널 믿을 수 없다고!”

“돌프 아저씨랑, 미에라 아주머니랑, 루게트는 날 믿는다고 했는데.”

“그건 그 엘프들이고!”

이샤는 하악질을 하는 고양이처럼 사납게 외쳤다.

나는 허, 하고 텅 빈 웃음소리를 삼킬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냥을 가는데 손을 구속하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

하지만 이 수상쩍은 구속에도 나름 역사와 전통이 있는 모양이었다.

“발에 집중해라, 인간놈.”

얼핏 보기에는 어린 사내아이로 보이는 엘프가 던진 말이었다.

그 외형과는 달리, 그는 마을에서 ‘영감’이라 호칭 받는 유일한 엘프였다. 그만큼 나이가 많다는 뜻이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포프 영감은 나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다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어린 엘프들은 모두 손을 묶고 사냥을 배운다. 발에 집중해서 길을 익히라는 의미지… 그렇게 몇 번이고 사냥을 나가, 이제 눈 감고도 길을 찾을 무렵이면 비로소 손을 풀어주고 사냥을 배우는 거야.”

“전 어린 엘프가 아닙니다만.”

“흥, 그 ‘어린 엘프’보다 네 녀석이 더 어릴걸.”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반박 대신 한숨을 내쉬며 항복을 선언했다.

그땐 묘하게 어려 보이던 영강님이었는데, 확실히 대화를 나누다 보니 노련한 면이 있었다.

나는 세월과 전통을 존중하는 모범적인 귀족이었다. 더는 군말 없이 그 교육법을 한 번 따라보기로 했다.

발에 집중해서, 걸음을 하나씩.

무척이나 지루한 과정이었다.

결국 조용히 엘프의 교육방식을 따라보겠다던 결심은 곧 깨지고 말았다.

“아니, 길을 눈으로 익히면 안 됩니까? 왜 하필 발로 해야 하는데요.”

“쯧쯧, 못난 녀석…….”

짜증과 경멸 어린 눈초리가 나를 향했다.

억울했지만, 나는 굳이 이에 대해 따지고 들진 않았다.

포프 영감은 나를 미워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족을 죽인 인류 전원을 증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게트를 비롯한 마을 엘프들의 압력에 이기지 못해 나를 데리고 온 것이다.

억지를 부렸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감수해야 했다.

또, 포프 영감이 아주 잘못된 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땅과 친해져라. 지금 네놈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잖냐, 그러다가 사냥감이 도망치려면 어떡하려고!”

“눈을 밟으면 당연히 소리가 나죠.”

“아니야,나지 않아야 돼!더 나아가 발자국도 남지 않으면 좋고!”

그 말을 끝으로 포프 영감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신호였다.

나는 흐음, 하고 침음을 삼키며 슬쩍 이샤를 바라보았다. 이샤는 조용히 걸음을 옮기다가, 흠칫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내 눈이 이샤의 발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 뭐해?”

“소리 안 나나 보려고. 겸사겸사 발자국도.”

그러자 이샤는 괜히 긴장되는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얼굴을 살짝 붉히며, 뻣뻣하게 한 걸음.

사각, 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귓가를 긁고 지나갔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에이.”

“야, 야! 이, 이건 실수거든?! 네가 자꾸 뻔히 바라보니까……!”

이샤는 얼굴이 벌개져서 내게 핑계를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강변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잠깐.”

포프 영감이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이샤의 입이 꾹 다물어졌고, 나와 아비앙의 눈동자가 의문을 담아 그를 향했다.

포프 영감은 조용히 자세를 굽힌 채, 눈바닥 위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그러더니 귀를 갖다 대기까지.

무얼 하는 걸까.

그는 이내 눈을 감고, 더듬더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은 일행들은 의아한 눈빛을 하고 그 뒤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눈에 특이한 흔적이 띄었다.

모닥불 자리였다.

쓰레기들은 얼마 없었으나, 한 점을 중심으로 녹아내린 눈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남은 자국들까지.

나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다른 엘프들이 야영을 한 자리일까요?”

포프 영감으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없자, 아비앙이 조용히 그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문득 흐릿해지는 발자국에 눈이 닿았다.

유독 깊은 자국이었다.

아비앙도 침묵에 잠겼고, 참다못한 나와 이샤도 그 옆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았다.

그 발자국,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무늬였다.

오직 이샤만이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야, 야… 다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대답은 포프 영감으로부터 되돌아왔다.

“……인간들이다.”

공포로 스산하게 얼어붙은 목소리.

포프 영감은 어느덧 창백한 낯을 하고 있었다. 살짝 숨이 차는지, 헐떡이는 소리를 내며 포프 영감이 중얼거렸다.

“인간들이, 이 주변까지 찾아왔어.”

마을로부터 고작 한나절 거리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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