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7화 〉 5. 빵과 비수(55)
* * *
인류에게 있어 엘프란 어떤 존재인가.
지상의 악마이자 제국의 적이었다. 선량하고 무고한 신민들을 도륙하고, 자원을 약탈하는 타락한 요정들.
한때 활과 정령의 종사라 불리던 종족은 이토록 영락해 버렸다.
인류의 눈에 엘프는 아인종보다 마수에 가까웠다. 처리하고, 관리하고, 기피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정작 그 누구도 엘프가 인류의 존망을 위협할 적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인류와 엘프의 전력 차는 명확했다.
엘프가 소규모 약탈을 자행할 수는 있어도,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면 꼬리를 말고 도망쳐야 했다. 그 든든한 믿음이 인류의 자부심을 지탱하고 있었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인류’로서의 이야기.
나는 이 시점에서 그동안 던지지 못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엘프는?
엘프에게 인류란 어떤 존재인가.
그 자문에 대한 답은 이미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묵직한 침묵.
대기가 폐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일행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또 그 탈색된 낯빛들은 어떤가.
가히 설원을 뒤덮은 눈과 비견될 만했다.
엘프에게 인류란 공포 그 자체였다.
언제든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이들, 차라리 살아 움직이는 천재지변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터였다.
엘프는 인류에게 저항할 수단이 전무했으니까.
특히 내가 머무르고 있는 마을은 소규모였다. 무장한 병력이 있다면 제압은 간단했다.
나조차도 단박에 눈치 챈 사실이었다.
당사자들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엘프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한동안 살얼음판 같은 정적이 이어졌다.
포프 영감은 무거운 침묵을 지켰고, 나머지는 경험 많은 노인의 조언을 기다렸다. 애초에 엘프가 아니었던 나는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인류를 성토해야 할 시간이었다.
괜히 내가 나서 분위기를 망칠 이유는 없었다. 포프 영감 또한 굳이 내게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떠난 지 시간이 꽤 됐어.”
얄따랗게 쌓은 눈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던진 말이었다.
수백 년 동안 사냥을 다닌 사내였다. 그의 보증이라면 믿을 만했다.
일행 중 누군가가 마른침을 꿀꺽, 하고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포프 영감은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말이 한나절 거리지, 그 반경을 모조리 수색하려면 숙련된 길잡이가 필요해… 또 시간도 필요할 테고. 무엇보다 이 주변은 사냥터니까.”
“설표가 그놈들을 막을 수 있을까요?”
“최대한 막아주길 기대하는 수밖에. 알다시피, 설표들은 영역을 침범당하면 동료들을 부르는 습성이 있으니.”
정확히 말하면, 설표가 아니라 마수의 특징이었다.
오염된 마수들은 동종의 생명체를 감염시킨다. 그 과정에서 군체 의식이 생겨나는지, 단독생활을 하던 동물들도 집단생활을 할 때가 있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위험에 처하면 동료들을 부르곤 했다. 아마 설표 마수도 이에 속하는 경우가 아닐까 싶었다.
포프 영감의 말에 이샤와 아비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대비할 여유가 남아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습격을 당할 바에야, 마을에 돌아가 의견을 공유할 시간이라도 있는 편이 나았다. 그러다 보면 답이 도출될 터였다.
단체로 이주를 하든지, 죽더라도 마을을 지킬 것인지.
포프 영감은 벌써 미간을 좁힌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이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럴 만도 했다.
나와 아비앙은 주민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아니었다. 마을에서 지내 온 세월의 무게가 마냥 가볍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어쩌겠는가.
살기 위해서는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서 수십 년을 살았든 수백 년을 살았든 달라지지 않을 진실이었다. 고작해야 열댓 명 남짓의 주민만으로 군대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다만 희망이 있다면, 야영지에 남은 발자국이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 물었다.
“이대로 쫓아가서 위험의 싹을 미리 잘라버릴 수도 있잖습니까.”
일견 잔혹해 보이는 의견이었다.
포프 영감과 이샤의 눈이 멍하니 나를 향했다. 동족을 제거하자는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내가 말하고 나서도 아차, 싶기는 했다.
아직 발자국의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만일 그 주인이 유르디나 군이라면?
지금 나는 내 동맹을 죽이면 안 되냐고 물은 셈이었다.
하지만 기왕 내친김이었다.
태연한 목소리를 가장해서, 나는 재차 물었다.
“어차피 이 주변에는 마수들이 많습니다. 숲에서 실종되었다고 해서 추가적인 수색을 나올 것 같진 않고…….”
“안 돼.”
포프 영감은 그렇게 답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 눈이 물끄러미 그를 향하자, 그는 내게 설명을 덧붙였다.
“네 녀석 말대로 이곳엔 설표가 너무 많다. 그리고 침입자들이 한창 그놈들의 신경을 긁고 간 뒤고… 무슨 뜻인지 알겠나?”
“화풀이 대상을 찾고 있겠군요.”
“혹은 이미 화풀이가 끝나고 식량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지.”
포프 영감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철수해야 돼. 너무 위험해졌어.”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는 경험 많은 사냥꾼의 조언을 따르는 편이 옳았다. 아비앙도 ‘설표’라는 소리에 몸을 오들오들 떨더니, 곧장 동의를 표했다.
오히려 반대 의견을 제시한 쪽은 이샤였다.
“하, 하지만 포프 영감!”
그 절박한 목소리에 발걸음을 돌리던 일행의 움직임이 멎었다.
포프 영감을 위시로 우리의 시선이 이샤를 향했다. 갑작스레 몰린 시선에 이샤는 잠시 우물쭈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목청을 돋우었다.
절절한 호소였다.
“식량이 바닥난 지 오래 됐어… 이대로라면 어린 엘프들부터 아사할 거야. 심지어 인간들이 주변에 있다며. 그럼 사냥을 나서기도 힘들어지잖아!”
“이샤…….”
포프 영감은 입술을 짓씹으며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세월은 절제의 미덕을 깨우치게 한다.
수백 년 동안 살아온 노인의 판단은 언제나 적확했다.
“안 돼, 당장 우리가 죽으면 다음에 사냥을 나올 엘프가 없어. 어떻게든 나무 죽으로 연명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샤.”
결국 이샤는 포프 영감의 뜻을 꺾지 못했다.
단지 울적한 낯빛으로 고개를 굽혔을 뿐이었다. 승복의 표시였다.
이를 뒤로 하며, 포프 영감은 다시금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요구는 다음과 같았다.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조심해. 인간놈들에게 실마리를 주지 마라."
여전히 희미한 공포가 묻어나오는 음색이었다.
앞장 선 포프 영감을 따라 우리는 퇴각을 시작했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면서.
물론 우리 사이에서 대화가 일절 없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울적해 보이는 이샤에게 농을 던졌다.
나름 위로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샤, 슬슬 풀어주면 안 돼? 설표가 덮치기라도 하면 위험하잖아."
반은 진심이고 반은 농담이었다.
어차피 마음만 먹으면 이깟 구속은 얼마든지 벗어던질 수 있었다. 다만 엘프들의 신뢰를 얻고자 그러지 않았을 뿐.
이샤는 내 속내도 모르고 앙칼진 답을 돌려주었다.
"절대 안 돼!"
째릿, 하고 나를 노려보는 폼이 제법 사나웠다.
내가 원망스럽기라도 하단 태도였다.
인간에 대한 적의가 나를 향했는지도.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을 따름이었다.
"그러다 네가 인간 편에 붙을 줄 누가 알아?! 절대 안 풀어줄 거야. 그러니까 너도 꿈도 꾸지 마!"
단순한 화풀이였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제물이 되어주기로 했다. 그 덕인지 이샤의 기분이 다소 풀린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화를 내봐야 내게 해코지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단지 나는 억울한 점이 있어 항변의 말을 내뱉었다.
"아니, 방금 못 들었어? 난 엘프의 편이라고. 그래서 동족을 처리하자는 의견까지 냈……."
"그러지 마라."
포프 영감의 조언이었다.
속닥거리던 나와 이샤의 시선이 단숨에 그를 향했다. 그러나 그는 뒤를 돌아보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묵묵히 설원을 헤쳐나가며 재차 말했을 뿐이었다.
"네 녀석은 인간이야. 동족을 죽이자는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 언젠가 후회하게 된다. 아직은 네가 엘프의 편이라지만, 글쎄."
그리고 이어지는 코웃음 소리.
그 언어의 틈새에서, 나는 닳고 닳은 유리 조각을 느꼈다.
이젠 상처인가 싶을 만큼 깊숙히 파고든 애상의 파편이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 후 숲은 다시 적막에 잠겼다.
나와 이샤는 멀뚱히 눈을 마주친 뒤, 서로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걸음을 내딛었다.
포프 영감이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정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으르르, 하는 소리를 들은 내 몸이 우뚝 멈춰섰다.
이샤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물어왔다.
"뭐해? 얼른 가지 않고."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프 영감의 걸음이 멎었다. 그 다음은 아비앙이었고, 마지막이 이샤였다.
어느덧 목을 긁는 짐승의 숨소리가 파다했다.
설표들이었다.
나무 그림자 사이로 푸른 안광이 명멸했다. 소음조차 없이 내달려 사냥감을 포위한 모양새.
아비앙의 얼굴이 다시 핼쑥해졌다.
설표를 유독 무서워하던 그녀였다. 십수 마리의 설표를 보고 몸이 굳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발악처럼 포프 영감이 부르짖었다.
"다들 도망쳐!"
달음박치는 소리가 설원에 울려 퍼졌다.
사실 나는 도망갈 생각이 없었으나, 이샤가 워낙 필사적으로 잡아끌기에 우선 그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한낮의 추격전이 시작됐다.
눈과 이끼를 발이 푹푹 파고들 때마다 바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설표들이 뒤쫓는 소리였다.
두 발 짐승이 아무리 빨라봐야 네 발 짐승을 압도할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비명이 울려퍼졌다.
"꺄악!"
이샤였다.
두 손이 묶인 나를 끌고 가느라 늦은 탓이었다.
그 틈새를 못 참고 설표들이 달려들었다. 그러자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포프 영감이었다.
"이샤!"
포프 영감이 이를 악물고 주문을 웅얼거렸다. 그러자 난데없는 강풍이 불더니, 나무 뿌리가 솟아나 나와 이샤를 감쌌다.
아비앙은 이미 공황 상태에 빠진 뒤였다.
그녀는 땅에 머리를 처박고 덜덜 떨고 있었다. 설표를 왜 그토록 두려워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설표들이 포프 영감을 덮치기 직전, 나는 나무 뿌리 사이에서 말했다.
"이제 풀어도 되냐?"
"무, 뭘……?"
이샤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와중에도 바깥에선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그래서 나는 팔뚝에 힘을 잔뜩 준 채 재차 물었다.
"절대 풀지 말라며, 이 구속."
손목을 들어올리며 묻자, 이샤는 울컥해서 외쳤다.
"병신아, 그거 신경 쓸 때야?! 당장 튀어!"
팍, 하고.
나무줄기가 비산하고 이샤의 눈이 부릅떠졌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곧장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다댔다.
포프 영감을 노리는 설표는 셋.
적당했다.
새하얀 빛살이 대기를 찢고 쏘아졌다.
멈춘 시간을 도화지로 그려지는 은빛의 궤적, 그 끝에 새빨간 핏물이 왈칵 터져나왔다.
포프 영감을 덮치던 설표 하나의 골통이 터져 나간 결과였다.
그리고 팍, 하고 궤도가 틀어지며 폭발하는 또 하나의 물감.
남은 설표는 그제야 그 푸른 동공을 서서히 움직였다.
그 눈동자에 비치는 새파란 날붙이.
퍽, 하고 미간에 손도끼가 꽂히며 눈동자가 툭 튀어나왔다.
압력을 이겨내지 못한 탓이었다. 그 결과는 당연히 즉사였다.
단 1초, 그보다도 적었다. 세 마리의 설표가 정리될 때까지 필요한 시간이었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살의로 불타던 설표들조차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저 자세를 낮추며, 얼어붙은 눈빛으로 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을 뿐.
그 중심에 내가 있었다.
으드득, 하고 나무 줄기를 헤치며 내 몸이 차가운 대기를 마주했다.
후우, 하고 내뱉은 숨결이 새하얗게 흩어져 내렸다. 실로 오래간만의 전투였다.
그리고 내가 손을 들자 팍, 하고 되돌아오는 손도끼.
도끼날에서 핏물과 뇌수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질척한 액체가 흘러 손을 적셨으나,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참 더 묻어야 하니까.
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열댓 마리라……."
내가 처음으로 상대한 마수는 늑대였다.
그때 열 마리를 잡았던가?
"나쁘지 않네."
그렇다면 오늘은 그보다 다섯 마리를 더 잡으리라.
내 흉흉한 눈빛을 마주한 마수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아우우, 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럼에도 내 몸에는 미동조차 일지 않았다.
나는 오늘 사냥을 할 것이다.
난생 처음 엘프를 위해 한 결심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