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58화 (358/649)

〈 358화 〉 5. 빵과 비수(56)

* * *

칼과 도끼가 춤을 춘다.

대기를 찢는 은빛 섬광이 매서웠다. 핏물이 터져 나올 때마다 골편과 살점이 질척한 소리를 내며 지면에 떨어졌다.

나는 그 오물을 뒤집어쓰며 걸음을 내딛었다. 눈앞에서 새하얀 그림자가 불쑥 솟구칠 때까지.

검을 쥔 내 손에 즉시 힘이 들어갔다.

팍, 하고 내리그어지는 종베기.

내게 달려들던 설표 하나가 반으로 쪼개졌다. 발톱을 앞세우긴 했으나, 내 오러를 이겨내기엔 한참이나 부족했다.

손도끼가 제비처럼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끼가 되돌아왔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매끈한 자루가 손에 쥐어졌다.

어느덧 주위는 시체투성이였다.

벌써 쓰러진 설표의 숫자가 열이 넘어갔다. 마수들이 필사적으로 울부짖으며 전력을 충원하긴 했으나, 그 눈동자에서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

허세나 자만 어린 평가가 아니었다. 그것이 나와 설표 사이의 객관적인 격차였다.

마수가 몇 마리나 몰려오든 간에 나의 승리는 달라지지 않을 터였다.

상급 마수라면 몰라, 설표는 중급 마수쯤으로 보였다.

수렵제 직전 사냥했던 늑대 마수가 중급 마수였다. 당시에도 열 마리를 넘게 쓰러트렸는데, 지금은 스무 마리가 오더라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지난 몇 개월간 눈부신 성장을 이룬 나였다.

운이 좋기도 했고, 사선을 몇 번이고 넘기도 했다. 그 덕에 나는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그 증거가 지금 내 눈앞에 드러나 있지 않은가.

설표들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내게 적의를 표하고 싶은 듯했으나, 정작 그 몸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도망쳐 준다면 나도 좋았다.

이미 마을로 가지고 돌아갈 사냥감은 충분했으니까.

쓸데없이 피를 묻힐 필요는 없었다. 더욱이 설표는 이곳에 올 인간들은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성적인 판단으로 움직이면 마수가 아니었다.

오로지 증오와 폭력을 지침으로 삼는 생물이었다. 그들은 나와 엘프를 두고 도망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 각자 흩어지며 진용을 가다듬었을 뿐이었다.

그 속셈이 눈에 뻔히 보였다.

나를 강한 개체 몇몇이 견제하는 사이, 나머지 설표들이 일행을 물어죽이겠다는 작전인 듯했다. 그리고 이는 나름 유효한 전략이기도 했다.

설표를 단신으로 상대할 수 있는 이는 포프 영감뿐이었다.

심지어 그 포프 영감조차 정면에서 마수를 상대하기를 꺼려했다. 이샤나 아비앙이 설표를 감당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특히 아비앙은 낯빛이 창백해져서 땅에 주저앉은 지 오래였다. 덜덜 떨리는 다리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한동안 거동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몸을 달군 전투의 열기가 새하얀 입김으로 흩어졌다. 내 입에서 흐릿한 지시가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이샤.”

“으, 응?!”

내 나지막한 부름에 이샤는 화들짝 놀라 답했다.

펄쩍 뛰기까지 하는 꼴이, 한참이나 넋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경악, 감탄, 그리고 공포.

아직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실망도 없었다. 단지 나는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을 전하기로 했다.

“저 뒤로 물러나서 화살을 쏴. 아비앙에게 다가오는 녀석들 위주로.”

“너, 너랑 포프 영감은……?”

“포프 영감은 알아서 하겠고…….”

나는 쥐고 있던 손도끼를 허리춤에 갈무리하며 말을 맺었다.

“나도 알아서 해야지.”

아우우, 하고 설표가 마치 늑대처럼 울부짖었다.

이를 신호 삼아 설원의 맹수가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탄력 있는 근육이 무시무시한 가속도를 부여하고 있었다.

내게 달려드는 설표는 총 셋.

땅을 딛고 선 다리에 힘을 주자 눈발이 비산했다. 이를 악물고, 주위가 압축된다 싶더니 나는 어느덧 설표의 앞에 서 있었다.

여타의 설표보다 유독 몸집이 큰 개체였다.

중급 마수가 아니라 상급 마수로 보였다. 그렇다면 일격에 처리하는 것은 무리였다.

카가각, 하고 날붙이와 손톱이 마찰하며 불꽃이 튀었다. 설표는 검신을 쥐듯이 당겨 내게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새하얀 송곳니가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입이 아주 벌어지기 전, 나는 새까만 콧잔등에 머리를 처박았다.

콱, 하는 소리와 함께 마수의 턱 근육이 멈칫했다.

그 틈에 나는 등을 젖히며 설표의 몸을 뒤로 넘겨버렸다. 그 직후 근육을 비틀 듯 짜내어, 전력으로 매다 꽂기.

성국 비전 달 뒤집기의 응용이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흙과 이끼가 치솟았다. 양 측면에서 달려들던 설표 둘이 몸을 날린 것은 그와 동시였다.

검은 여전히 땅에 처박은 설표의 발톱에 걸려 있었다.

나는 깔끔히 검을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부무장이 남아있었으니까.

손도끼가 다시금 하늘을 날았다. 그 일격으로 끝나 주기를 바랐지만, 설표에게도 학습능력이란 존재했다.

설표는 캉, 캉, 하고 연달아 날아드는 손도끼를 쳐냈다.

안타깝지만 손도끼는 견제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할 듯했다. 나는 몸을 숙여 손도끼에 견제당하지 않은 마수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다만 설표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유연한 근육을 이용해, 설표는 곧장 몸을 웅크려 내게 대응했다. 급격히 떨어지는 몸이 나와 함께 설원 위를 굴렀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긴 했으나 완력은 내 승리였다.

두 무릎으로 앞발을 제압한 내 주먹이 설표의 콧잔등을 으껴버렸다.

콰득, 하고 연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와중에 버둥거리던 설표의 뒷발톱이 내 등을 할퀴는 일도 있었다. 허나 가까스로 닿은 발톱 따위가 대단한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마력으로 보호받는 육체에 얕은 흔적만을 남겼을 따름이었다.

그새 손도끼의 견제를 탈출한 설표가 노호성을 터트렸다.

크르르릉!

섣불리 달려들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전황이 불리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는 후우, 하고 숨을 고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설표와 눈이 마주치기를 잠깐.

마수는 영악하게도 몸을 돌려 목표를 바꾸었다.

아비앙을 향해서였다.

“이샤!”

“한 마리 더 있어!”

그러나 이샤는 이미 시위에 화살을 매기고 있던 참이었다.

과연 그 말대로 아비앙에게 달려드는 마수는 하나가 더 있었다. 이샤가 힘겹게 한 마리를 견제하는 사이, 나를 노리던 설표가 아비앙을 노리기 시작한 듯했다.

난감했다. 당장 손에 들린 무기가 없었다.

내 눈에 묘한 광경이 띈 것은 그때였다.

달려드는 설표의 궤적 사이로, 자그마한 싹이 움을 트고 있었다. 나는 이를 보자마자 곧장 땅에 떨어진 손도끼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손도끼를 붙잡은 찰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무뿌리가 치솟았다.

설표를 칭칭 묶기 위해서.

포프 영감의 지원이었다. 설표가 곧 나무뿌리를 뜯어내긴 했으나, 내게는 그 짧은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잘했어요, 포프 영감님!”

“네 놈을 도운 게 아니야! 엘프를 구한 거지!”

물론 포프 영감은 내 칭찬을 솔직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무뿌리와 활대를 들고 분투하며 외친 소리를 들으며, 나는 대기를 갈랐다.

내던져진 내 몸이 막 나무뿌리에서 해방된 설표를 덮쳤다. 그리고 설표가 무얼 하기도 전에, 연달아 손도끼가 내리꽂혔다.

으득, 콱, 콰직.

단 세 번의 도끼질이면 충분했다. 짐승의 네 다리가 감전이라도 당한 듯 부르르 떨리며 임종을 알렸다.

이제 남은 것은 포프 영감에게 달려든 한 마리뿐인가.

그렇게 넋을 놓았을 때, 내 귀를 스치는 소음이 하나 있었다.

텅, 하고 가죽에 무언가 튕겨나가는 둔탁한 음성.

내 눈이 멍하니 그 진원지를 향했다. 반대편에서 아비앙에게 달려드는 설표가 한 마리 더 있었다.

이샤의 화살이 마수의 가죽을 관통해내지 못한 것이다.

나는 본능에 따라 손도끼를 내던졌다. 그러자 설표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몸을 둥글게 말더니, 제 등에 도끼날을 받아들였다.

핏물이 터져 나오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설표가 한 차례 땅을 구르더니, 곧바로 퉁기듯이 아비앙을 덮쳐들었다.

그 눈빛에서 맹렬한 살기가 줄기줄기 뻗치고 있었다. 어떻게든 하나는 물어죽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꺄, 꺄아아아아악!”

마수의 적의는 참 근원을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제 목숨마저 버려가며 남을 해하도록 하는 것인지.

나도 남 말 할 사정은 아니었다.

우드득, 하고 강인한 치악력이 뼈를 뒤트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비앙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웅크린 고개 사이로 공포에 질린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고 뚝, 뚝, 떨어지는 핏방울.

설원이 선홍빛으로 젖어들었다.

팔을 물렸다.

아비앙이 아니라, 내가.

이를 눈치 챈 이샤가 비명을 터트렸다.

“이, 인간!”

턱이 덜덜 떨릴 만큼 아팠다. 실시간으로 짐승의 송곳니가 뼈를 으스러트리려 드는 감각이 유쾌할 턱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고통이 익숙했다.

이를 악물고 팔에 힘을 주자, 근육이 수축하며 설표의 이빨을 붙들었다. 설표는 버둥거리며 앞발로 내 팔에 죽죽 흠집을 그었다.

내 남은 주먹이 미간을 강타할 때까지.

콱, 하고 주먹이 틀어박히자 설표는 구슬픈 울음소리를 냈다. 이빨이 붙들려 있기에 그 이상의 소리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지 몇 번이고 주먹질을 당해, 내가 그 몸뚱아리를 땅에 내던지기를 기다릴 뿐.

아비앙은 그제야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켜준다고 했잖아.”

훌륭한 기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든, 귀족은 귀족의 도리를 다해야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마지막은 설표의 몸에 박힌 손도끼로 처리했다.

한참 포프 영감과 드잡이질을 하던 설표는 내 손도끼를 피해내지 못했다. 전투는 그것으로 끝이었고, 남은 문제는 단 하나.

“……이걸 어떻게 마을까지 운반하지?”

오늘 사냥의 성과를 어떻게 옮길 수 있을지 걱정이었을 뿐.

그래도 이만하면 엘프 마을은 한동안 식량 걱정을 덜 수 있으리라.

다만 내 마음에 걸리는 점이 또 하나, 설표가 우릴 덮치기 전 느꼈던 묘한 기척이었다.

반사광이 얼핏 비쳤던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이내 신경을 꺼 버렸다.

차라리 착각이기를 바라면서.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

“정찰병 중 하나가 엘프에게 붙잡힌 인간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어둑한 밤, 침엽수림 내에 설치된 임시 막사.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잠자코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어찌나 심했는지, 퀭한 눈빛에서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나왔다.

그럼에도 소녀는 잠들지 못했다.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는 그러지 않기로 했으니까.

소녀가 지친 목소리를 내뱉었다.

“인간이라뇨? 이 깊은 침엽수림에 말이에요?”

“네, 그렇습니다. 정확한 신원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설표들에게 습격을 당하고 있어서, 멀리에서 확인해 본 결과로는 젊은 남성이라는 사실밖에…….”

뚝, 하고 소녀의 숨소리가 그대로 멎어버렸다.

그리고 심호흡.

들숨과 날숨이 이어지기를 몇 초, 소녀는 아쿠아마린을 닮은 눈동자로 병사를 바라보았다.

“붙잡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죠?”

“두 손이 무언가에 묶여 있었는지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고 합니다.”

소녀는 침묵했다. 한참이나.

다시 한 번 그 어여쁜 입술이 떼어졌을 때는, 스산한 한기가 막사에 내려앉은 뒤였다.

마치 서리처럼.

“……당장 그쪽으로 이동하죠.”

운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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