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9화 〉 5. 빵과 비수(57)
* * *
엘프 마을에 활기가 감돌았다.
춥고 건조한 북부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애초에 식량 자체가 적어 열량 소모를 최소화하던 엘프들이었다.
함께 모여 북적거리는 소리를 내는 날은 많지 않았다.
만일 엘프들이 모여 소란을 피우고 있다면, 두 가지 가능성을 의심해 봐야 했다.
첫 번째, 마을의 존망이 걸린 중대한 위기가 발생했을 때.
혹은 두 번째, 부족한 식량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을 만큼 기쁠 때.
오늘의 모임은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었다.
고작 한나절 거리에서 인간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소식은 마을의 분위기를 단숨에 침체시키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정든 마을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열댓 명의 주민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개진하며 지지부진한 토의를 이어갔다. 그럼에도 마땅한 해답은 도출되지 않았다.
엘프에게 인류의 침략이란 일종의 자연재해와 같았다.
미리 걱정한다고 해서 저항할 수 있는 종류의 재난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본부에 보고를 올리고 지원을 기대해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그 마음이 보답받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엘프는 언제나 전력의 열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그마한 마을 하나하나까지 보살필 여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마을의 엘프들은 이내 그 슬픈 소식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더 골몰해 봐야 상황이 나아지지도 않을뿐더러, 골칫거리를 대신할 멋진 선물도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마을 어귀에는 짐승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거대한 몸집과 사나운 이빨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침엽수림의 새하얀 공포로 군림하던 설표들이었다.
몇몇 엘프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설표는 강하고 영악했다.
한 마리라도 사냥할 수 있으면 노련한 엘프 사냥꾼으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포프 영감 또한 설표를 사냥한 후에야 마을의 존경받는 사냥꾼이 되었다.
또 설표는 그 맛도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부드럽고 탄력 있는 근육이 특유의 식감을 선사해 주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그 가죽의 보온성은 또 어떤가.
남부에서 이주해 온 엘프들은 추위에 특히 취약했다. 그래서 그들은 온몸을 꽁꽁 싸매고 돌아다니곤 했는데, 설표 가죽이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단 한 장만 걸쳐도 따뜻했으니까.
이처럼 설표는 한 마리의 가치가 보물에 준했다. 그런데 그 귀한 사냥감이 무려 열댓 마리나 수중에 떨어졌으니, 엘프들로서는 얼떨떨한 심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심지어 이를 사냥해 온 당사자는 엘프도 아니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흑발 금안의 이방인.
증언에 따르면, 그가 단신으로 이 수많은 설표를 쓰러트렸다고 한다.
그러나 사내는 제 활약에 들뜬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단지 엘프를 도와 묵묵히 설표를 해체했을 따름이었다. 그 손도끼가 내리찍힐 때마다 설표의 몸뚱어리가 댕강댕강 잘려 나갔다.
무시무시한 완력이었다.
설표의 강인한 뼈조차 당해내지 못하는데, 저 도끼에 엘프의 가녀린 육신이 걸리면 어떻게 될 것인가.
소름이 돋는 상상이었다. 몇몇 엘프들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떨고 말았다.
아직 낯선 이방인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나마 루게트나 돌프, 미에라 같은 별종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새 주민의 활약을 반기고 있었다.
그 낯빛에 은근한 뿌듯함마저 묻어나올 정도였다.
물론 들뜬 엘프는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사내와 함께 사냥을 나갔던 이샤는 전에 없이 흥분한 모습이었다. 옹기종기 모여든 엘프들 앞에서, 그녀는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넋을 놓고 있는 사이에 단숨에 설표 셋이 죽어 버렸다니깐? 난 손도끼를 그렇게 잘 다루는 엘프는 처음 봤어!”
“그야 엘프가 아니라 인간이니까.”
포프 영감의 뚱한 지적이 이어졌으나, 이샤는 이를 깔끔히 무시했다. 그 달아오른 어조에서 우쭐한 마음이 느껴졌다.
역사적인 장면을 목도한 자의 자부심이었다.
“내 생각인데, 기억을 잃기 전의 인간은 분명 대단한 인물이었을 거야… 인류의 영웅쯤 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아서라, 아서.”
그러나 이샤의 가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좌초당하고 말았다.
돌프의 반론 탓이었다.
“그렇게 명망 높은 인간이 왜 엘프 하나 살리겠다고 이곳까지 오겠어? 실력을 숨기고 살아가던 낭인이라면 또 몰라.”
“그, 그런가?”
이샤는 곧장 볼을 긁적이며 수긍의 뜻을 표했다.
사실 이샤는 인간 사회에 대해 무지했다.
아니, 이샤뿐만 아니라 마을의 엘프 전원이 그랬다. 그들이 지닌 지식만으로 사내의 과거를 추론해 내기는 불가능했다.
단지 엉성한 추측 위로 상상의 돌탑을 쌓아갈 뿐.
그러니 질문의 화살은 자연스레 다른 이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인류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본 적이 있으며, 또 과거의 사내와 여정을 함께했던 엘프.
아비앙이었다.
회색 머리카락의 엘프 소녀는 아직도 얼이 빠진 낯짝을 하고 있었다. 그 푸른 눈동자가 멍하니 사내의 등만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미에라가 키득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 어머… 남자한테 푹 빠진 눈빛인데?”
“아, 아니에요!”
아비앙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며 미에라의 말을 부정했다.
울컥한 목소리가 그 자그마한 잇새로 새어나왔다.
“저 폭력적이고 하등한 인간 따위를 누가……!”
“폭력적이라니?”
루게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던진 반문이었다.
아비앙은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곧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엘프들이 눈만 깜박이고 있자, 그녀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변명을 주워섬겨야 했다.
“그, 그… 보셨잖아요? 전투만 시작되면 사람이 달라지는 거.”
“아아, 그렇긴 했지. 진짜 무서웠어… 피칠갑을 한 꼴이 악귀나찰 같았다니깐?”
다행스럽게도 좌중의 관심은 다시금 이샤를 향했다.
사내의 무용담이 시작되었던 덕이었다. 흥분한 목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엘프들 사이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비앙은 남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마음의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사내는 아비앙의 원수였다. 그 사실에 변함은 없었다.
비록 사기를 치긴 했으나, 그가 아비앙을 굴복시키기 위해 사용한 것은 폭력이었다. 억지로 굴복당한 자가 가해자에게 호의를 품을 리가 없었다.
그래, 그래야 하는데.
아비앙은 요즘 사내를 볼 때마다 헷갈렸다.
한때 엘프를 죽이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던 인간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는 엘프를 위해 온갖 고생을 자처하고 있었다.
굳이 설표를 사냥하러 나선 것도 그랬다.
주머니에 식량은 잔뜩 남아있었으면서, 왜 설표를 사냥하러 간 것일까. 그럴수록 정체가 들킬 가능성은 점점 더 커질 텐데도.
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 비상식량을 나누기도 했다.
얼마 전 루게트에게 들었다. 돌프에게 초대를 받았던 날, 그가 멋진 요리를 대접해줬다고.
그러더니 오늘은 제 팔을 바쳐 아비앙을 구해 주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엘프 소녀가 한심할 법도 한데, 그는 단 한 마디의 타박도 없었다. 도리어 몸조차 일으키지 못하는 그녀를 부축해 주기까지 했다.
너무나 양면적인 사내였다.
아비앙이 한참을 넋을 놓고 고민에 잠겼을 때였다.
“……아비앙.”
그 나지막한 부름에, 소녀의 눈빛이 무심코 뒤를 향했다.
그리고 훅, 하고 그녀를 덮치는 비린내.
아비앙의 시야는 순식간에 어둠으로 물들었다.
“앗, 꺄악! 이, 이게 무슨……!”
아비앙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둥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소녀를 덮친 물건은 두텁고 따스했다.
그만큼 무거워서, 벗어나기도 힘들었지만.
짓궂은 장난은 오래 가지 않았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아비앙의 시야가 훅, 하고 밝아졌다.
그 눈부신 빛을 등지고, 사내가 하나 서 있었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설표 가죽이야. 마음에 드냐?”
“벗겨낸 직후의 가죽을 누가 좋아해요!”
아비앙은 울컥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렇게 외쳤다.
괜히 서럽고 억울했다.
누구는 제 탓에 번민을 반복하고 있는데, 이토록 태평하게 장난을 걸다니.
그러나 사내는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그게 가장 작은 놈의 가죽이거든. 네 몸에 딱 맞겠다 싶어서.”
“흥, 됐거든요.”
“미에라 아주머니한테 말해 둘 테니, 방한복이나 하나 맞춰 봐. 난 어차피 쓸데없으니까.”
아비앙은 입술을 비쭉 내밀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반항적인 태도였다. 그러든 말든 사내는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사내가 떠나자, 말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엘프들이 다시금 몰려왔다.
미에라는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거봐, 너만 특별 취급이잖아?”
“아니거든요. 그냥 뭐, 장난친 거지…….”
코웃음을 치며, 소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그 새침한 어조와 달리 두 손은 설표 가죽을 꽉 쥐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겠다는 듯.
이를 보며 미에라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좋을 때구나.
그날 밤의 연회는 즐거운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사내가 술을 꺼내 더욱 달아오른 분위기였다. 정작 그는 ‘술에 취한 돌프’에게 붙잡혀 밤새도록 주정을 들어주어야 했지만.
아비앙은 웃음꽃이 가득한 엘프들을 보며 생각했다.
참으로 어색한 풍경이라고.
그녀가 아는 동족들은 늘 울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파리하고 퀭한 눈빛은 차라리 죽어가는 시체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토록 맑은 웃음소리를 낼 수 있던가.
배가 터지도록 먹어도 고기가 줄어들지 않았다. 활활 타는 불길은 따스한 온기를 선물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아비앙은 일렁이는 주홍빛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슬슬 취기가 도는지 벌개진 사내의 얼굴이 문득 눈에 들어왔따.
그날 밤, 소녀는 생각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
동족들과 함께, 이토록 행복하게.
이 연회에 여동생이 함께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소녀는 밤새도록 사내를 보았고, 포프 영감은 술을 깨작이다 걸음을 돌렸다.
그의 눈길이 마지막으로 사내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밤바람에 두 엘프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내가 엘프 마을에 착실히 적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
푹, 하고 칼끝이 지반에 틀어박힌다.
마치 무른 진흙을 파고들듯 거침없는 기세였다. 그 검신에 일렁이는 푸른 불꽃이 야밤의 풍경을 비추었다.
어두운 숲, 횃불 몇 개만이 밤을 밝히는 천막.
엘프 하나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칼날은 그의 바로 옆에 틀어박혀 있었다. 서늘한 예기를 느낀 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듯한 기세였다.
물론 그의 앞에 선 소녀는 이를 용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회색의 머리카락, 아쿠아마린을 닮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었다.
처연히 달빛을 등진 그 외모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미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들 사이에서도 드문 미인이었다.
단지 그 가라앉은 눈빛이 그 이상으로 공포스러웠을 뿐.
소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만일 조금이라도 헛소리를 했다간, 손가락을 하나씩 날릴 거야."
엘프는 흐윽, 하고 새어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인의 질문이 곧장 이어졌다.
"너희 마을에 인간이 있나?"
그 짤막한 질문에, 떨리던 엘프의 몸이 일순 멎었다.
멍청한 눈빛이 여인을 향했다. 마치 네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아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소녀의 입술이 짓씹어졌다.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대답해! 인간이 있어?! 있다면 이름이 뭐지?!"
"그, 그, 그건……."
엘프는 쉽사리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자 소녀는 더욱 초조해졌다.
칵, 하고 뽑혀나온 검이 이제 목젖을 겨누었다. 엘프는 히이익, 하고 비명을 내지르며 엉덩이를 뒤로 질질 끌었다.
그러나 그가 도망칠 장소는 없었다.
이 주변은 이미 봉쇄된 지 오래였다. 특히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인들의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엘프 혼자서는 도망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울먹이면서 외치고 말았다.
"모, 몰라요! 마을을 배신할 수는 없어!"
"……하."
가소롭다는 듯, 소녀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검이 치켜들어진다. 새파란 달빛이 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는 곧 밤을 찢는 실선이 되어 핏물을 터트리리라.
소녀가 그렇게 검을 내리긋기 직전.
"기억을 잃어 버렸다고요!"
덜컥, 하고 소녀의 숨소리가 정지했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엘프를 주시하고 있던 모든 여인들의 숨이 멎었다.
소녀가 차마 질문을 던지지 못하는 사이, 엘프는 울고불며 외쳤다.
"그 친구, 기억을 잃어버렸어요! 혹시 엘프와 함께 도주한 배신자를 쫓아왔다면, 그만 좀 괴롭히라고요!"
"그게, 무슨 소……."
"그 친구는 우리 이웃이에요!"
발작처럼 울부짖는 소리였다.
엘프는 품고 있던 울분을 전부 다 토해내듯 외쳤다.
"그러니 더는 괴롭히지 마세요! 우, 우리는 아무것도 안했다고요… 그 친구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요! 우리는 인간을 건들지도 않았단 말이에요!"
그러나 울음 섞인 엘프의 호소는 소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 들리지 않은 지 오래 되었던 탓이었다.
소녀는 그저 넋을 놓고 중얼거렸을 따름이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그리고 그 직후.
"기습이다! 누군가 군영에 불을 질렀다!"
난데없는 불꽃이 치솟아 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