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0화 〉 5. 빵과 비수(58)
* * *
나는 엘프 마을에서 새로운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였다. 지난 몇 달 동안 이보다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가 도착한 이후, 내 삶은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그에 비하자면 요즘은 무척 행복한 편이었다.
비록 이곳이 춥고 건조한 북부이며, 식량조차 부족한 엘프 마을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내게는 딱히 열악한 환경도 아니었다.
설원의 추위는 내 피부를 파고들지 못한다. 또 부족한 식량도 내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충원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설표를 잔뜩 사냥한다든가.
지난 연회에서 이미 확인된 사실이었다. 당시 사냥해 두었던 설표 고기는 아직도 남아 요긴한 식량으로 쓰이고 있었다.
여러모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엘프 마을의 주민으로 확고히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다만 내 무력이 지나치게 뛰어난 탓에 나를 경원시하는 무리도 있긴 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그들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애써 무력을 뽐내려 들지도 않았다.
혹시라도 마을에 위화감을 조성할까 싶어서였다.
단지 나는 엘프의 삶에 순응하고자 노력했다. 마을에 조용히 녹아들고자 했던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렇게 내가 묵묵히 마을의 일을 도맡은 지 며칠이나 됐을까.
어느덧 나와 엘프들은 거리낌 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절친한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웃사촌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관계였다.
이제 내게는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마을 엘프들의 신임이 두터워진 만큼, 내가 책임져야 할 일도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특히 마을 바깥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내 전담이었다.
엘프 마을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침엽수림이었다.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도 위험한 곳 천지였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마을에서 가장 강했으니까.
오늘 루게트가 나를 찾아온 까닭도 그와 관련되어 있었다.
“어젯밤에 불이 났다고?”
“응, 대략 한나절 거리에서 연기가 관측됐어.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은데, 그래도 너한테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나는 흐음, 하고 침음을 삼키며 살짝 시선을 돌렸다.
하필이면 한나절 거리였다.
지난 사냥 때 인간의 흔적을 발견한 곳도 그쯤 되는 위치가 아니었던가. 아무래도 포프 영감을 찾아가 자세한 지리를 익혀둘 필요가 있을 듯했다.
내 표정이 어두워지자, 루게트는 금세 내 고민을 눈치챘다.
그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내게 물었다.
“괜찮겠어? 넌 인간이잖아. 인간의 품으로 돌아가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는데.”
“하, 엘프와 붙어먹은 배신자를 누가 받아준다고?”
코웃음을 치며 그 조언을 일축했으나, 나는 내심 뜨끔하고 말았다.
도대체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루게트의 말처럼, 나는 인간이었다.
내 고향은 침엽수림이 아니었다. 풍족하고 아늑한 동부였고, 더불어 내 소중한 가족과 동료 모두가 남쪽에 있었다.
춥고 외로운 북부에서 버텨야 할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 짜낸 핑계라곤, 아직 엘프의 사정을 낱낱이 파악하지 못했다는 공허한 울림뿐.
헛소리였다.
이 마을에 머물러 봐야 무슨 정보를 더 얻겠는가.
이들은 나날이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평범한 마을 주민에 불과했다. 사교가 횡행한다는 ‘본부’의 엘프들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나는 애써 그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었다.
내가 떠나면 이곳을 지킬 사람은 없어진다.
설표를 대량으로 사냥할 수도 없으니 주민들은 다시 배를 곯아야겠지. 또 인류의 발달한 문물을 전해줄 사람도 없어지리라.
돌아갈 생각은 있었다.
그래,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터였다. 다만 그날이 지금은 아닐 뿐이었다.
내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우습게도, 나는 엘프에게 정이 들고 만 것이다.
설마 제국의 귀족이 엘프와 친해질 줄이야.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더욱이 뻔뻔스럽기도 했다. 내 손에는 이미 엘프의 피가 잔뜩 묻어있지 않은가.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헛구역질을 견디기 힘들었다.
내 손이 단숨에 잔에 담긴 냉수를 비웠다.
루게트는 여전히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혹여라도 내 마음이 바뀔까 싶어서.
그러나 내 대답은 언제나 동일했다.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재차 확언했다.
“떠나지 않아, 아직은… 언젠가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언제 봐도 넌 참 솔직해.”
루게트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었다.
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찾아보면 침엽수림에도 찻잎으로 쓸 만한 식물이 존재할 수도 있겠으나, 당장은 탐색할 여력이 없었다.
단지 냉수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또한 엘프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불안했거든. 널 마을에 들이기로 한 건 나였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참 잘한 결정이었다고 느껴.”
“오글거리게 왜 그래?”
내 질색하는 목소리에, 루게트는 더욱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본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뱉어졌다.
“우리 마을의 주민 중 하나가 실종됐어.”
나는 침묵했다.
내 눈이 조용히 루게트의 안색을 살폈다. 늘 기운 넘치던 그의 낯빛에 활력이 사라져 있었다.
자포자기한 어조로, 친구가 내게 물었다.
“이끼를 캐러 가던 중이었거든. 그런데 그곳에 화재가 났고… 죽었겠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 봐야 알지.”
생존자 수색은 시간이 생명이었다.
나는 곧장 포프 영감을 찾아갈 채비를 하기로 했다.
**
짐은 단출했다.
어차피 생존에 필요한 대다수의 물품들은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었다. 공간 확장 주머니란 이토록 유용했다.
나는 무장만 대충 허리춤에 걸치고 오두막을 나서려 했다.
아비앙이 나를 붙잡지만 않았다면.
“어디 가는데요?”
불쑥 방에서 튀어나와 던진 질문이었다.
나와 동거한 지도 한참이나 된 소녀였다. 내 행선지를 알 자격은 충분했다.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숲으로. 엘프 하나가 실종됐대.”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내딛으려 했으나, 그보다 아비앙이 더 빨랐다.
그녀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내 눈이 등 뒤를 향하자, 아비앙은 어느덧 내 지척까지 다가온 뒤였다.
“설마 불난 곳?”
“응, 아무래도 조금 수상해서.”
“위, 위험하잖아요!”
아비앙이 경악해서 외친 말이었다.
걱정이 쓸데없이 많은 엘프였다. 한때는 나를 미워하기까지 했었는데.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비앙을 달랬다.
“위험할 게 뭐 있어? 그냥 둘러만 보고 오는 건데.”
“그러다 인간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나도 인간이다.”
끝내 할 말이 궁해진 쪽은 아비앙이었다.
그러면서 살짝 시선을 내리까는 꼴이, 풀이 죽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눈빛에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
걱정과 불안, 그리고 초조.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내 두 손이 턱, 하고 아비앙의 어깨 위로 얹어졌다.
“걱정하지 마. 한동안은 떠날 생각 없으니까… 그리고 죽을 생각도 없어. 나 없으면 너도 죽잖아?”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요?”
그러나 아비앙이 던진 물음은 내 상상 이상이라, 일순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엘프는 적이라면서요? 나도 그렇게 막 대해놓고… 그런데 왜 지금 와서 엘프를 위하는 척을 하냐고요.”
숨이 턱, 하고 막힌다.
아비앙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어 보였으나, 그 푸른 눈동자에 맺힌 눈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것이다.
내 오락가락하는 태도가, 수십이나 죽인 엘프를 위하는 내 모습이.
내가 생각해도 작위적이고 모순적이다.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나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그럼에도 결국 짜내어진 한 마디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나도 몰라.”
아비앙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나는 차마 그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원래 인간은 이래. 우리의 삶은 무척이나 짧아서, 변덕이라도 부리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너무 아깝거든.”
어떤 고아원장이 보여주었던 일면이었다.
당시의 나는 그를 비겁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해는 할 수 있어도, 용서는 할 수 없었던 악적.
그러나 양면성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속성이다.
나 또한 그 예외는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적을 참하지만, 한편으로는 연민과 동정을 버리지 못했던.
그래서 매일 아파하는 인간이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설마 그 속내를 털어놓는 상대가 엘프일 줄은 몰랐지만.
내 한숨 섞인 고백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이나 침묵이 이어진 끝에, 아비앙도 제 과거를 털어놓았다.
“제 부모님이 누구인지는 몰라요… 다만 어린 시절, 설표에게 물려 죽을 뻔했던 기억만 남아있죠.”
그러고 보면, 아비앙은 유독 설표를 무서워했던가.
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아비앙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날 이후로 저와 제 여동생은 늘 둘만 의지하며 살아왔어요. 동족을 믿고 사랑했지만, 먹고 살기 위해 전 첩자가 되어야 했죠. 그런데 당신은 뭘 위해 절 지켜주시나요?”
“그냥.”
벌써 두 번째로 내뱉은 대답이었다.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아비앙은 입술을 짓씹으면서, 망설이는 눈빛을 했다.
“……혹시 베티도 구해줄 수 있어요?”
“미안,모르겠어.”
아비앙의 여동생은 ‘본부’에 있었다.
내가 그녀를 구할 수 있으리라고 확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솔직한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비앙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소녀는 난생 처음 듣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폭력과 위협 끝에도 끝끝내 털어놓지 않던 정보였다.
“제 여동생은 저와 같이 회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어요. 또 푸른 눈동자도.”
마치 그것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투였다.
내가 정적을 지키는 사이, 아비앙의 토로가 이어졌다.
“예전에 물어본 적이 있었죠? 남부 대수림에 사는 쌍두사에 대해서… 그 쌍두사를 ‘본부’에 가져오는 여자가 있어요. 그리고 회색 머리카락은, 그 여자의 피를 타고났다는 증거죠.”
그 머나먼 거리를 단신으로 돌파할 수 있는 여인이 존재한단 말인가.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반문을 던지려고 했다.
그보다 먼저 아비앙의 입에서 세 음절이 튀어나오지만 않았다면.
“……‘흡혈귀’라고 부르더군요. 저에게 피를 물려준 사람 말이에요.”
너무나 많이 들었던 이름이었다.
내 입술이 절로 접붙었다.
“회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가 그 증거에요. 부디 제 여동생을 구해주세요…….”
문득 떠오르는 이들이 있었다.
내 일행들은 여전히 나를 걱정하고 있을까.
아비앙이 눈물을 흘리며 간원하듯이.
내 이야기가 새로운 국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
회색 머리카락의 소녀는 눈을 떴다.
헐떡이는 소리가 가냘팠다. 다급히 주위를 살피는 푸른 눈동자가 애처로웠다.
그 병상의 옆에서, 은빛 머리카락이 여인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니까 무리라고 했잖아요……."
음울한 음색이었다.
소녀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깨질 듯한 아픔과 함께 찾아오는 기억들이 있었다.
그래, 불이 났었지.
그 이후 폭음이 들렸다. 준비해 온 전략 물자들이 전부 폭발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유르디나 가문의 소수 정예를 이끌고 간 길이었다. 세리아는 물론이고, 동행인의 예민한 감각에도 수상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리아의 의문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세리아를 채근했다.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여인은 제 옆머리를 검지로 돌돌 말고 있었다.
"흥, 꼬맹이가 뭘 알기야 하겠어? 주제도 모르고 나대다가, 스크롤에 의존해서 본가로 빌빌 기어오는 꼴 하고는… 우리라고 주인님을 구하고 싶지 않은 줄 알아?"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어질 때마다 세리아는 울컥하는 마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녀를 조롱하고 있는 두 여인의 정체는 명확했다.
성녀와, 엘시 라이넬라.
북부에 동행한 전력 중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저 둘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 이상이라고 해도 좋았다.
단신으로 전황을 뒤바꿀 수 있는 괴물들이다.
저들이 동행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세리아는 입술을 짓씹었으나, 제 모자람만 재차 깨우칠 뿐이었다.
어째서 미래에서 온 '그'가 세리아를 데려가지 않으려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러든 말든 성녀와 엘시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유르디나 자매님도 나름 최선을 다했잖아요."
"우린 최선을 다 안 해서 토벌군을 편성한 줄 알아? 제국에, 성국에,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까지… 으으, 이제야 좀 본격적으로 할 만 하겠네."
아무래도 두 사람은 후방에서 새로운 편제를 구상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야말로 침엽수림을 쓸어버리기 위한 전력이었다.
제국과 성국, 유르디나 가문이 협력한 군세라니?
허나 세리아는 그들이 모르는 사실을 하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는 잘못된 선택이 될 수도 있었다.
"……발견했어요."
뚝, 하고 대화를 나누던 두 여인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의문이 어린 눈빛이 세리아를 향하자, 그녀는 발작하듯 외쳤다.
"찾아냈다고요! 이안 선배, 아직 침엽수림에 있어요……."
"무슨 헛소리야?"
엘시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 그 자그마한 손으로 세리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세리아의 귓전을 긁고 지나갔다.
"찾아냈는데, 너 혼자 돌아왔다고? 미쳤어?! 그럴 리가 없……."
"기억을 잃었대요."
헐떡이면서, 눈물과 함께 토해낸 한 마디.
엘시의 낯빛이 망연해졌다. 성녀도 마찬가지였다.
"기억을, 흐흑… 잃어서, 엘프를 동족으로 여기고 있다고……."
맑은 눈물이 주륵주륵 떨어진다.
엘시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멱살을 잡은 손을 놓았다.
툭, 하고 자유를 얻었으나 소녀의 눈물이 그치는 일은 없었다.
엘시는 제 빈 손을 내려다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기억을 잃었다고?"
그렇다면 전부 사라졌단 말인가?
둘이서 공유했던 모든 소중한 추억들이, 감정들이, 그리고 사랑했던 기억들이.
누군가 제 가슴의 살점을 뜯어가는 느낌이었다.
이야기는 가속하며 자꾸만 교차하고 있었다.
곧 파열이 다가오리라.
성녀는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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