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1화 〉 5. 빵과 비수(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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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프 영감이 머무르고 있는 곳은 자그마한 오두막이었다.
마을에서 존경받는 사냥꾼이라지만, 그 삶은 대개의 엘프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허름한 오두막에서 그날의 끼니를 걱정하며 살고 있었다.
최근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만 말이다.
설표의 신장은 어지간한 엘프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다. 심지어 가죽부터 고기, 뼈까지 버릴 것 없는 사냥감이 바로 설표였다.
한 마리만으로 잔치를 벌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얼마 전 사냥한 설표의 수는 무려 열댓 마리에 이르렀다. 마을 주민들이 배불리 먹더라도 한동안 식량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북부의 추위는 보존식을 만들기 유리했다.
춥고 건조한 바람이 스칠 때마다 설표 고기는 점점 더 야위어 갔다. 대신 그만큼 오랜 세월을 보관할 수 있으리라.
적어도 두 달 남짓은 끼니를 때울 만하리라.
이는 엘프 마을에 있어 실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하루 한 끼는커녕 ‘나무 죽’만으로 연명하던 엘프들이 태반이던 마을이었다.
주민들은 배를 곯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얼떨떨해 보였다. 포프 영감조차 그 예외는 아니었다.
나를 마중한 포프 영감은 다소 심란한 표정이었다.
말없이 나를 향하는 그 녹색 눈동자가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핏 떨떠름해 보이기도 했고, 고마워 보이기도 했고, 또 짜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확실한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포프 영감이 이전처럼 나를 마냥 미워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
설표를 사냥한 가치가 있었다. 더불어 쥐 죽은 듯 마을의 일을 도운 보람도.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포프 영감님.”
“용건이 뭐냐?”
여전히 나를 대하는 태도는 쌀쌀맞기 그지없었지만.
어차피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나였다.
나는 곧장 포프 영감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그의 요망대로 내 입이 곧장 본론을 읊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혹시 그쪽 길을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내 부탁에 포프 영감은 코웃음을 쳤다.
그의 삐딱한 질문이 이어졌다.
“네가 거길 뭐하러 가? 설마 불탄 동물 시체라도 주워오겠단 거냐?”
“그것도 나쁘지 않겠죠. 그런데 조금 불안해서 말입니다.”
이 무렵에서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포프 영감의 협조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이윽고 내가 내린 결론은 담백했다.
어차피 나는 레토 같은 달변가가 아니었다. 단순무식한 검술학부 학생일 뿐이지.
그렇다면 괜히 기교를 부릴 이유가 없었다. 우직하게 진실을 밀고 나가는 수밖에.
내 혀가 가감없는 진실을 흘려냈다.
“혹시 그쪽, 지난번에 인간의 흔적이 발견된 곳 아닙니까?”
포프 영감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침엽수림은 온통 나무뿐이었다. 그래서 진입하는 순간 방향 감각을 상실하기 일쑤였다. 낯선 길에 들어서면 대략적인 방향조차 잡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오직 오랜 세월 숲의 지리에 적응한 이만이 정확한 위치를 짚어줄 수 있었다.
엘프 마을에서 그 역할을 도맡은 자는 바로 내 앞의 포프 영감이었다.
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이내 말없이 문에서 비켜섰다.
그리고 등을 돌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록 말은 없었으나, 나는 그것이 무언의 초대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닫고 포프 영감의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혼자 살고 있는 탓인지 실내는 단출했다. 최저한으로 필요한 가구만이 자리하고 있어 황량한 느낌마저 줄 정도였다.
포프 영감은 자그마한 탁자 위에 잔 두 개를 꺼내놓았다.
나는 눈치껏 포프 영감의 맞은편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앉았다. 포프 영감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나를 만류하지 않았다.
쪼르륵, 하고 온수가 잔에 따라졌다.
손님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얼마 전까지 ‘인간’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던 포프 영감이었다. 나를 손님으로 대접하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발전이었다.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아,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걸 어떻게 믿지?”
“네?”
꽤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나를 신용하는 분위기로 넘어가던 참이 아니었던가?
내 당황한 목소리에 포프 영감은 나를 재차 채근했다.
“네놈은 인간이잖냐. 그 인간들을 찾아가, 마을의 위치를 불고 사이좋게 돌아간다는 선택지도 있겠지… 그런데 네놈을 어떻게 믿냔 말이다.”
난감한 질문이었다.
신뢰란 대개 무조건적이었다. 아무리 보증을 서고 대가를 걸어도, 신뢰란 기본적으로 신용으로부터 나오는 법이었다.
무작정 의심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었다.
나를 믿어달라고 어떻게 호소한단 말인가. 심지어 나는 기억을 잃었다는 설정이라, 내 명성이나 재산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다만, 또 그 질문이 묘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믿지 않으면 믿지 않는 거지, 굳이 오두막까지 끌고 와 심문할 까닭이 어디 있단 말인가. 온수를 홀짝이자 대뇌가 팽팽 회전을 개시했다.
문득 베네타가 떠올랐다.
내가 심문했던 첫 번째 엘프였다. 그리고 내가 죽인 첫 번째 엘프이기도 했고.
그때는 몰랐으나, 나는 이제 그녀의 진심을 믿었다.
베네타는 내게 한 점의 거짓 없는 조언을 건넸던 것이다.
그것이 엘프의 규율이었으므로.
빵은 빵으로, 비수는 비수로.
내 혀가 멋대로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빵은 빵으로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포프 영감은 말없이 김이 올라오는 물잔을 들이켰다. 그러든 말든 나는 해야 할 말을 이어붙일 뿐이었다.
“기억까지 잃은 저를 받아준 건 엘프들이었습니다. 적어도 그 은혜를 배신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간 보여드렸다시피…….”
“자네는 엘프가 아니잖아.”
또 다시 핵심을 짚는 질문이었다.
내 입술이 다시금 달라붙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포프 영감의 지적대로였다.
빵을 빵으로, 비수는 비수로.
이는 엘프의 규율이었다. 내가 이를 굳이 따르리란 보장은 없었다.
다만 한참을 궁리하다가, 나는 문득 어떠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포프 영감은 ‘축복’을 받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교와도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
“레오릭이란 분도 인간이라고 들었는데요.”
포프 영감의 눈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종교와 신념은 심리의 가장 연약한 지점이었다. 함부로 건드리면 화를 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당장 내가 꺼낼 만한 재료는 이뿐이었다.
“인간과 엘프라는 구분이 중요합니까? 이곳에 오니 알겠더군요. 제가 엘프처럼 살면, 다른 주민들도 저를 엘프처럼 대한다는 사실을.”
이는 고백에 가까웠다.
짧다고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엘프 마을에서 지내며 내가 얻은 결론이었다.
인간과 엘프의 경계는 의외로 희미했다.
단지 귀가 뾰족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와 엘프를 온전히 구분할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어째서 이제야 깨달았을까.
너무나 많은 이들을 죽이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고해성사를 하듯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한 번만 믿어 주시죠. 포프 영감님이 마지막입니다.”
이 마을에서 나를 믿지 않는 엘프는, 오직 포프 영감뿐.
소년의 외형을 한 노인은 눈을 감고 고심에 잠겼다. 그러기를 얼마쯤, 물잔에서 올라오던 김이 희미해질 무렵.
포프 영감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로, 말없이 벽면에 걸린 활과 화살을 바라보았다.
그가 괴로운 음색을 토해냈다.
“……난 인간 따위 믿지 않아.”
얼핏 보기엔 내 설득이 통하지 않은 듯 보였으나, 포프 영감의 말에는 묘한 여운이 남아 있었다.
무언가 속사정을 숨기고 있다는 양.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 과거를 털어놓았다.
“내 아내와 딸은 굶어죽었네. 인간놈들이 식량 창고를 불태운 탓이었지… 비쩍 말라 허망히 입을 벌리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줄 아나? 삶은, 알고 보면 지옥이었어.”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야기였다.
삶이 차라리 지옥이라던 그 말, 사교의 교리였다.
단지 포프 영감에게는 그 공허한 구호가 현실이었을 뿐.
“그뿐인 줄 아나? 내 하나 남은 아들은 인간의 손에 살해당했지… 그 이후 맹세했어. 남은 삶은, 내 가족을 지키지 못한 죗값이라 생각하고 살겠다고.”
영감은 한숨을 내쉬며 벽에 걸린 활과 화살을 쓰다듬었다.
그러던 찰나, 그의 손이 더듬거리며 활에 묶여 있던 매듭을 하나 풀었다.
지금 보니 특이한 덩굴이었다.
최소한 북부에서 자생하는 생물은 아니었다.
내 의아한 눈빛이 포프 영감을 향했다. 그는 우묵해진 눈으로 그 덩굴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이제 너무 지치는군… 삶은 여전히 너무 괴로워. 그럴 때 자네가 온 거야. 한때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제 알겠네. 마을을 위해서는 자네가 필요하다는 걸.”
포프 영감은 힘없이 걸어 내게 덩굴을 내밀었다.
내가 얼이 빠져 그 덩굴을 받아들자,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선대부터 내려온 물건이네. 우리가 대수림에 살던 시절부터… 마을의 사냥꾼은 이 덩굴을 발목에 매고 다녔지. 그러면 길을 헤매지 않을 수 있거든.”
“무슨 원리로요?”
“이젠 몰라. 당시의 기술은 소실된 지 오래니까.”
그 퉁명스러운 말을 끝으로, 그는 조용히 등을 돌렸다.
무언의 축객령이었다.
“이제 마을의 사냥꾼은 자네야. 이샤를 잘 부탁하네, 아직 미숙한 점이 많으니.”
마을의 사냥꾼.
짧은 시간이었으나, 나는 엘프 마을에서 지내며 그 무게를 실감했다.
사냥꾼은 마을의 척후이자 식량을 책임지는 중책이었다. 더불어 그 무력으로 마을을 지키는 역할도 수행해야 했다.
내게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언젠가 떠나야 할 이방인이 아닌가.
내가 화들짝 놀라 한 마디를 꺼내기도 전이었다.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에만 하면 돼.”
포프 영감의 녹색 눈동자가 흘깃 나를 향했다. 무어라 핑계를 대려던 내 입이 그대로 꾹 다물어졌다.
“언젠간 떠날 수도 있겠지, 그러니 그 전까지만… 오늘은 사냥꾼으로서 보내는 첫 번째 날이라 생각하게.”
돌이켜 보면, 실종자 수색도 사냥꾼의 몫이었던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덩굴을 움켜쥐었다.
이만한 보물을 받았으면, 그에 맞는 역할 또한 짊어져야만 했다. 엘프의 오랜 격언이 다시금 떠올랐다.
빵은 빵으로, 비수는 비수로.
얼마나 오랜 시간을 엘프 마을에서 머무를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 짧은 시간만큼은 마을의 사냥꾼으로 있어 주겠다고.
그렇게 나는 명실상부 모두가 인정하는 마을의 일원이 되었다.
내게 남은 걱정은 하나뿐이었다.
과연 유르디나 시에 남은 나의 일행들이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을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돌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또 엘프 마을을 마냥 방기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 나는 속으로 몇 번이고 번민했다.
그 고민이 해결될 때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나의 고뇌는 끝을 맞이했다.
그 원인은 단순했다.
마을 밖을 나서, 실종자 수색을 끝마치고 돌아오던 날.
나는 우두커니 멈춰 서는 수밖에 없었다.
마을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병장기가 부딪히고, 비명 소리가 귓가를 쟁쟁히 울렸다.
인류의 습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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