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62화 (362/649)

〈 362화 〉 5. 빵과 비수(60)

* * *

포프 영감이 준 덩굴은 과연 신묘한 효능이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저절로 길이 그려지는 듯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지도 위에, 내가 움직이는 궤적이 표시되고 있었다.

색다른 감각이었다.

포프 영감이 어째서 침엽수림에서 길을 찾을 수 있었는지 짐작이 갔다. 이만한 물건이 있다면, 당연히 침엽수림의 곳곳을 파악할 수 있겠지.

나 또한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내 눈이 불타버린 주위를 훑었다. 모든 것이 불탄 자리에는 흑과 백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을린 잔해들만이 이곳에 있던 기물들을 증언했다.

천막이나, 기타 부대시설을 보니 군영이 분명했다. 인류의 군대는 어느덧 이 근방까지 파고든 뒤였다.

정체불명의 원인으로 화재를 당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 점이 나는 의문이었다.

북부는 춥고 건조한 곳이었다.

일단 화재가 한 번 발생하면 얼마든지 확산될 위험성이 존재했다. 그나마 땅 위를 덮은 눈이 있어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젯밤의 화재는 대형참사로 화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침엽수림이 이토록 빽빽한 삼림을 구성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애초에 불이 붙기 쉬운 환경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즉시 얼어붙는 장소가 침엽수림이었다. 하물며 사시사철 부는 바람은 막 피어오른 불씨를 꺼트리는 주범이었다.

당연히 자연적인 화재가 발생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어젯밤의 화재는 인위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그 범인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누가 감히 인류의 군대를 건드린단 말인가.

엘프라면 가능했다.

인류와 엘프는 적대관계였다. 군영에 불을 지르는 것은 마땅한 군사작전의 일환에 불과했다.

다만 내가 품은 의혹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이 주변의 엘프 마을은 내가 머무르는 곳이 유일했다. 그리고 우리 마을은 이 군영의 위치조차 모르고 있던 참이었다.

애초에 이곳을 불태울 전제조건부터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제 남은 가능성은 둘뿐이었다.

어제 실종된 엘프가 이곳에 불을 질렀거나, 제3의 용의자가 존재하거나.

전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정당했다.

내 눈에 불에 탄 구속구의 잔해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엘프의 기술력으로는 만들 수 없는 물건이었다.

납치당했구나.

나는 대번에 그 전후사정을 짐작해 냈다.

침엽수림을 헤매던 불행한 엘프는, 인류의 정찰조에 붙잡혀 심문을 당하고 만 것이다.

구속까지 당한 상태에서 불을 지르기는 힘들었다. 하물며 그 엘프를 군영의 모두가 감시하고 있었을 터다.

또 하나의 가설을 폐기한 내 눈이 유심히 주위를 훑었다.

화재 현장의 구석에, 유독 이질적인 지형이 하나 위치하고 있었다.

야트막한 봉분이었다.

그 위에는 검과 창이 꽂혀 있었다. 누가 봐도 전사자를 위한 무덤이었다.

혹시 군영의 병사들이 되돌아 와 시체를 수습한 것일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그 추론을 부정했다. 그랬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흔적을 지웠어야 했다.

적에게 제 위치를 노출하고 싶어 하는 지휘관은 없었다. 엘프 마을을 불시에 습격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화재처럼 눈에 띄는 행동을 한 직후라면, 당연히 이곳에 남은 잔해들을 청소했으리라.

결국 나는 답을 찾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실종된 엘프는 시체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군영에 불을 지른 범인들은 아직도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빈말로도 훌륭한 성과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는 기사였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척후병이 아닌 이상, 내가 파악할 수 있는 전말은 한계가 있었다.

우선 최대한 빨리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 상수였다.

그러면 마을 주민들의 지혜를 빌릴 수 있을 터였다.

대개는 순박한 엘프들이었으나, 개중에는 포프 영감처럼 경험이 풍부한 노인들도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들의 지혜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었다.

불타오르는 마을을 보기 전까진.

낯가죽을 낼름거리며 핥는 열기가 느껴졌다. 명명백백한 화재였다. 그렇지 않으면, 저 붉고 이글거리는 것을 무어라 불러야 하는가.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인류의 군영은 어젯밤 불타 버렸다. 당연히 몇 주 동안은 이곳에 돌아오지 않아야 마땅했다.

그런데 단 몇 시간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병장기가 맞부딪히는 듣자하니 습격이 분명했다.

도대체 누가, 왜.

가라앉은 내 정신을 일깨운 것은, 연달아 울려 퍼지는 고함이었다.

"일단 창고부터 태워! 이 자식들 식량이 꽤 많은데?"

"아, 안 돼요! 얼마만에 모은 식량인데……."

"엘프들은 싹 다 중앙에 모아!"

나는 비틀거리다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곤두서는 감각이 모든 정경을 내 시신경으로 전달했다. 타오르는 건물 중에는 식량 창고도 있었다.

지난번에 사냥한 설표 고기가 보관된 곳이었다. 그때 엘프들은 얼마나 기뻐했던가.

지금은 불에 타 재가 되기 직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루게트와 돌프, 이샤의 오두막도 불타고 있었다. 포프 영감의 오두막에는 이제 막 불이 붙고 있었다.

더는 참기가 힘들었다.

나는 곧장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 뛰듯이 도약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내 몸은 마을의 중앙으로.

그곳에는 밧줄에 꽁꽁 묶인 엘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중앙으로 질질 끌고 가는 병사들도.

유르디나 가문의 인장이 보였다.

내 뇌리가 끊어진 실타래처럼 마구잡이로 풀어헤쳐졌다. 유르디나 군이 그럴 리가 없었다.

유르디나 군은 결코 엘프를 선공하지 않는다.

델핀 선배에게도 공언 받았으며, 제국의 상식이기도 했다. 제국은 언제나 엘프에게 피해를 받는 쪽이었다.

결코 가해자의 편에 서는 법이 없었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불행히도 내겐 고민에 잠길 여유마저 남아있지 못했다.

내 목젖을 치고 발작적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만!"

우뚝, 하고 불을 지르고 엘프를 옮기던 병사들의 걸음걸이가 멎었다.

엘프를 포함해서,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불타는 마을을 배경으로 묘한 침묵이 내리깔렸다.

병사들은 한참 동안이나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이내 시선을 교환했다.

내 눈이 급히 엘프들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죽은 엘프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구할 수 있었다.

나는 이안 페르쿠스였다. 인류의 영웅이자, 유르디나 가문의 차기 가주로부터 전폭적인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엘프라면 몰라도, 상대가 인간이라면 내 후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도, 보라.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머뭇거리기만 하는 병사들을.

나는 재차 노호성을 터트렸다.

"그만해, 당장… 지금 다들 뭐하는 거지? 인류가 언제부터 아무 죄도 없는 엘프들을 습격했냔 말이야!"

내 호통에 병사들이 노골적으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쭈뼛거리며, 들고 있던 횃불을 내리거나 엘프를 잡아끌던 손에 힘을 풀었다.

나는 그제야 확신했다.

통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아무런 피해 없이 엘프들을 구할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속으로 반색하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느닷없이, 낯익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하하, 이거 참. 이곳에서 뵙게 될 줄이야."

너털웃음이 들려오자, 머뭇거리던 병사들의 몸이 일제히 경직됐다.

그들은 곧바로 정자세를 취하며 경례를 보냈다. 내게도 보이지 않았던 최고의 예우였다.

존경받는 상관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

내 눈이 서서히 목소리의 진원지를 향했다.

**

"결국, 위치는 모르겠다는 소리네요."

한숨 섞인 타박이었다.

유르디나 성 한 켠에 마련된 병실에는 여러 명이 모여 있었다.

병자인 세리아는 물론이고, 성녀와 엘시부터 엠마와 황녀까지.

이안이 데려온 전원이었다. 유렌 또한 성녀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성녀는 다소 초조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불안한지 자꾸만 입술을 짓씹는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비단 성녀뿐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심란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타박의 대상이 된 세리아만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

그녀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정확한 작전 위치는 파악할 수 없어요. 대략적인 방향은 파악하고 있지만, 침엽수림은 미지의 공간이에요. 그렇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 것만 해도 기적이죠."

"그런데 그 주변에 주인님이 머무르고 있다며!"

울컥해서 엘시가 내뱉은 소리였다.

그렇다. 침엽수림에서 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는 일쯤이야 자주 있는 일이었다.

평시라면 탓할 거리조차도 되지 않는 문제였다.

일종의 불가항력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여인들이 흥분하는 까닭은, 세리아가 가져온 정보 탓이었다.

세리아가 마지막으로 위치했던 주변.

그곳에 있는 엘프 마을에, 이안이 머무르고 있다.

그것도 기억을 잃은 채로.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여인들은 바짝바짝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냉수를 들이켜도 갈증이 해소되지가 않았다.

세리아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엘시는 결국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쯧, 그러니까 왜 불이 나고 지랄이야…넌 불이 날 때까지 뭘 하고 있었는데?"

"최선을 다했어요!"

세리아는 억울하다는 듯, 눈가에 물기를 그렁그렁 맺은 채 강변했다.

"경계는 빈틈없이 완벽했어요. 저 또한 긴장을 끈을 놓치지 않았고… 분명, 병사들 외의 기척은 없었는데."

"그게 말이 돼? 엘프의 기척을 놓쳤겠지. 그 외에 불을 지를 녀석들이 어디 있어?"

그러나 엘시의 태도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세리아도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제 무능을 증언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다만 세리아는 마지막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아닌데, 분명 기척은 없었는데……."

"유르디나 자매님께서 실수하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성녀의 단언이었다. 세리아는 결국 다시금 시선을 내리깔았다.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당장 이안 걱정으로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은 성녀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지만 말이다.

"침엽수림에서 습격을 당했다면 엘프일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아요. 만일, 아니라면……."

성녀는 입술을 뗐다가, 문득 어떠한 의심이 뇌리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

그다지 설득력 있는 가설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일 세리아가 옳다면?

그날 밤, 정말로 아무런 외인도 침투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배신자가 있는 거겠죠."

유르디나 군에 제 사람을 심어, 남몰래 불을 지를 수 있는 존재.

그럴 만한 이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엘프에 관한 정보를 차단하고 있다는, 유르디나 가문의 배신자뿐이었다.

물론 곧 그 추론은 곧 폐기되고 말았다.

아무리 골몰해도 배신자가 군영을 불태워야 할 이유가 없었던 탓이었다.

최소한 지금까지 주어진 단서로는 그랬다.

**

설원의 위로 핏자국이 남는다.

신음하는 소년이 두터운 건틀렛에 붙들려 있었다.

얼굴 곳곳에 멍이 들고, 쿨럭이며 피를 토하는 꼴이 치열한 전투를 겪은 모양이었다.

그 결과는, 아마도 소년의 완패.

이를 뽐내듯 승자가 그 목덜미를 쥐고 질질 끌고 있었다. 나는 그 소년의 정체를 금세 떠올렸다.

내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호명이 새어나왔다.

"포프 영감……."

저벅거리는 발걸음과 함께 그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얼어붙은 듯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난데없이 등장한 사내는 망설임 없이 포프 영감을 내던졌다.

툭, 하고 포프 영감은 중앙에 모인 엘프들 위로 포개어졌다.

"포프 영감!"

엘프들 사이로 소란이 일었다.

마을의 버팀목이었던 포프 영감이 쓰러졌으니, 덜컥 겁을 먹고 만 것이다.

사내는 그 풍경을 등지고 섰다.

마치 울부짖는 엘프들이 교향곡을 연주하는 악단이라도 된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핏물에 젖은 입가가 사나운 호선을 그렸다.

늘 그랬던 것처럼.

"도련님, 설마 이곳에 계셨습니까? 하하하! 그간이 저급한 엘프놈들과 어울리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녀석은 아무 상관 없어!"

루게트가 발악처럼 외친 소리였다.

사내의 눈동자가 흘깃 뒤를 향했다. 손과 발을 결박당한 상태임에도, 루게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나를 변호했다.

"저 사람은 기억을 잃었다고! 너희 인간을 배신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

흐음, 하고 사내는 잠시 침묵했다.

턱을 쓰다듬던 그가 슬쩍 병사 중 하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병사는 헐레벌떡 어딘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사내는 턱, 하고 제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럴 수가… 보고해야 할 내용이 늘었군요. 설마, 기억상실이라니."

그 직후.

팍, 하고 맑은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내의 발길질이 관자놀이를 직격해, 루게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혼절하고 말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사내의 이름을 부르짖는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 경, 안 돼!"

그 한 마디에, 의외라는 듯 사내의 눈동자가 서서히 움직였다.

듬직한 체구를 가진 노기사였다.

머리는 이미 새하얗게 샌 지 오래였으나, 그 칼 같은 기세는 여젼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픽,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쓸데없이 말랑한 부분은 여전하시군요, 도련님."

유르디나 후작의 침묵이자, 대를 이어 가문에 충성을 바쳤다던 충신.

그가 바로 엘프 마을을 불태운 범인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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