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63화 (363/649)

〈 363화 〉 5. 빵과 비수(61)

* * *

설원의 마을에선 타닥거리는 불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노기사가 말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피에 젖은 낯과 사나운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돌이켜 보면, 그는 언제나 그랬다.

호전적이었고, 엘프를 혐오했으며, 폭력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보여주는 모습 또한 의외는 아니었다.

알렉스 경은 늘 한결같았다.

당장 피투성이가 되어 내던져진 포프 영감만 보더라도 그랬다. 일전에 엘프 정찰조와 전투를 벌였을 때, 알렉스 경은 엘프 하나를 곤죽으로 만든 바 있었다.

상황은 당시와 같다.

달라진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정찰조를 쓰러트릴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포프 영감이 당하는 꼴을 보자 욱하는 마음이 앞섰다. 나조차도 당황스러운 변모였다.

알렉스 경이 내 마음을 헤아려 주길 바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일단 설득에 나섰다.

“알렉스 경, 이제 무슨 짓입니까… 이 마을의 엘프들은 인간을 습격한 적이 없어요. 언제부터 우리 인류가 엘프에게 선공을 가했습니까?”

“하, 기억을 잃으셨다더니… 마냥 그래 보이지만은 않는군요.”

허나 나의 반론에도 알렉스 경의 목소리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그의 손이 서서히 등에 메고 있던 검으로 향했다. 그리고 쿵, 하고 땅을 찧는 소음.

일순 지반이 흔들리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엘프 사이에서 숨 막히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단 한 번의 손짓만으로 엘프들은 몸을 움츠린 채 벌벌 떨어야 했다.

완숙한 경지에 도달한 기사의 솜씨였다.

단지 기분전환에 불과한 가벼운 몸짓임에도, 약자들이 공포에 질려야만 했다.

히이익, 하는 신음이 유독 불쾌했다. 나는 울렁이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알렉스 경은 땅에 검을 곧추세운 채 느긋이 입을 열었다.

“그 말대로입니다, 도련님. 우리 인류는 결코 엘프를 선공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방적 타격’에 임할 뿐이죠.”

“예방적 타격이라니요?”

누가 봐도 면피용 발언에 가까운 소리였다.

하도 어이가 없어 인상마저 살짝 찌푸려질 정도였다.

하지만 알렉스 경은 당당한 낯짝을 하고 있었다. 마치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노기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어차피, 모든 엘프는 잠재적 적성분자가 아닙니까. 그러니 그 전에 싹수를 자르는 겁니다. 아니라면, 그들이 우리의 이웃을 도륙한 뒤에야 검을 뽑아들어야겠습니까?”

“섣부른 단정 아닙니까……!”

으득, 하고 이를 악물며 나는 말했다.

“저들이 우리 인류를 습격한다고요? 무슨 수로 말입니까… 침엽수림을 벗어나기는커녕, 당장의 끼니조차 때우지 못해 골골대는 엘프들이?”

“불가능은 아니죠.”

“그렇게 따지면 모든 엘프를 죽여야 할 텐데요.”

“네, 그렇습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그 여섯 음절이 하나같이 비릿한 피 냄새를 풍겼다. 그럼에도 알렉스 경은 혀를 쯧쯧 차며 나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이나 어린 애송이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나는 울컥한 마음에 무어라 따지려 했다.

그 직전에, 알렉스 경이 내 묻어두었던 과거를 파헤치지만 않았다면.

“도련님,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엘프들은 아름다운 껍데기를 뒤집어 쓴 악마에 불과합니다. 그 싸구려 동정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벌써 잊으셨냔 말입니다!”

일순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내가 엘프 마을로 떨어지던 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엘프를 구했던 적이 있었다. 베네타를 비롯한 엘프 정찰조의 목숨이었다.

그때도 알렉스 경은 그들을 죽이려 했다. 나의 반대로 그들은 살아났으나, 사실 베네타의 몸에는 추적장치가 붙어 있었다.

그 실책이 전투로 이어졌다.

야음을 틈탄 기습이었다. 엘프뿐만 아니라, 유르디나 군도 몇 명은 다치고 죽었겠지.

그 목숨값 또한 나의 몫이리라.

내 말문이 턱하고 막히자, 알렉스 경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노기사의 묵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련님, 잊지 마십시오… 도련님께서는 인간입니다.”

지당한 말이었다.

엘프들의 애절한 눈빛을 배경으로, 노기사는 새벽녘의 서리처럼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의 혀가 연이어 한파를 토해냈다.

“엘프가 아니란 말입니다… 도련님의 가족, 친구, 지인! 그 전부를 버릴 수 있습니까?”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럼에도 떠오르는 답은 없었다.

나는 엘프를 구하고 싶었다.

허나 이를 위해 내 소중한 이들을 버릴 수 있는가?

나의 가족, 나의 동료, 내가 사랑하고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을.

엘프의 편을 선다는 것은 그랬다.

인류를 등지고, 동족의 배신자로서 수치를 감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고작 몇 주 남짓을 함께한 엘프를 구하는 대가치곤 가혹했다.

분한 눈빛을 숨기지는 못했으나, 결국 내게서 돌아오는 반론은 없었다.

알렉스 경은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꺼운 건틀렛을 낀 손이 신호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다시 일사불란하게 행동을 재개하는 병사들.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빌어먹을.

“꺄, 꺄아아악! 그만둬, 안 돼… 도와줘!”

누구한테 하는 소리일까.

눈을 감아도 비명소리는 생생했다. 피부를 달구는 열기와 갑옷이 철그럭거리는 소음, 그리고 키득거리는 조소까지.

병사 하나가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뭐, 도와줘? 푸흐, 하하하하하하! 가, 감히! 큭큭, 엘프 따위가… 미쳤나!”

퍽, 하고 발질길이 이어졌다.

흘러나오는 신음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이샤였다.

언제나 틱틱거리면서도, 상냥한 본성을 숨기지 못하던 마을의 젊은 사냥꾼.

그랬던 여인은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폭력을 감내해야 했다.

활은 부러진 지 오래고, 팔과 다리마저 구속당한 탓이었다.

병사의 헐떡이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저분이 어떤 분인 줄 알아? 촌구석에 틀어박힌 너희 엘프 따위와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분이라고! 들어는 봤나, ‘이안 페르쿠스’라고…….”

“그만.”

나지막한 제지였다.

한숨과 함께 던져진 그 한 마디는, 너무나 작아 병사에게 닿지 못했다.

도리어 병사는 이샤의 머리채를 붙들기까지 했다. 강제로 들린 그 눈빛에서, 절망이 뚝뚝 물방울처럼 배어 나오고 있었다.

“들어는 봤나? 손도끼 한 자루로 마인과 마수를 가리지 않고 박살 낸 분이라고! 크으, 인류의 떠오르는 신성이시지. 듣기로, 이미 봉작은 확정이라던데…….”

"그만!"

내 고함에 병사의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비로소 내 눈동자가 어딘가를 향했다. 병사와 엎어진 채 콜록거리는 이샤에게로.

나는 악문 잇새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만합시다."

그 이상의 지시는 필요하지 않았다.

병사는 곧장 실례했다는 듯 바짝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마저 이샤를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엘프를 조금 더 상냥히 대하라고, 한 마디를 덧붙이려다 말았다.

싸구려 위선이었다.

결국 내가 도달한 결말 또한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어찌할 도리 없이, 나는 인간이었다. 어찌 동족을 배신하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애초에 인간과 엘프의 우정 따위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를 깨달은 것은 나뿐만이 아닐 테지.

어느덧 나를 향하던 엘프들의 시선이 잠잠해진 뒤였다.

실망과 절망, 이해와 연민의 감정만이 번갈아 가며 내게 전해질 뿐.

그들의 눈에는 낯선 감정마저 엿보였다. 유르디나 군의 병사들마저 내게 존중을 표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이처럼 나와 엘프 사이에는 높고 험한 장벽이 놓여 있었다.

내 손이 무의식적으로 손도끼를 만지작거렸다. 어떻게든 마을의 엘프들을 포로로 잡는 선에서 이야기를 끝마쳐 볼 심산이었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진.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엘프였다. 그 푸른 눈동자가 멀뚱히 나를 응시했다.

아비앙이었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죽었던 사내아이, 네드는 내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훌륭한 기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지켜주겠다고 했었는데,

툭, 하고 자그마한 충격이 사고의 댐에 가해졌다.

마치 돌멩이를 던진 듯 옅은 파문이었다. 그러나 그 떨림 속에서 사고의 연쇄가 이어진다. 지극히 단순한 연상 과정이었다.

회색 머리카락, 푸른 눈동자.

세리아.

유르디나.

델핀 선배.

왜, 나는.

무심코 토막난 의문이 뱉어진다.

“……델핀 선배.”

건틀렛을 정비하고 있던 알렉스 경의 눈이 나를 향했다.

그 흔들림 없는 눈빛에는 강한 확신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부끄러운 점 따위는 일절 없다는, 그 당당한 태도.

그래서 나는 차마 묻지 못했었다.

“델핀 선배는 알고 있습니까?”

우뚝, 하고 알렉스 경의 몸짓이 멎었다.

다시 우리 사이에 황량한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북풍이 뼈마디를 파고들고자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경지에 오른 검사는 아무런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다.

“도련님.”

단지 막힌 숨을 토해내듯, 알렉스 경은 진중한 낯빛을 했을 따름이었다.

“다음에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알렉스 경은 등을 돌렸다.

다시금 엘프를 향해 선 그의 손이 검 손잡이를 쥐었다. 엘프의 눈빛에 어린 공포만큼이나, 노기사의 목청도 드높아졌다.

“지금부터 처형을 시작한다! 그 죄목은 감히 인간의 영토를 노리고, 우리의 가족과 이웃을 참살한 죄!”

“우, 우리는 그러지 않았어요!”

엘프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애원했으나, 이를 새겨듣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병사들도 저마다의 무장을 꼬나쥐고 엘프들을 노려보았다. 저 검과 창이 내질러지면, 설원에는 피의 꽃이 피리라.

알렉스 경은 무척이나 그 광경을 보고 싶은 듯했다.

외치는 그 목소리에서는 일종의 광기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모조리 죽여, 짐승 밥으로 만들어라!”

“네!”

우렁찬 대답과 함께, 병사 하나가 창을 내찌르려던 찰나.

손도끼를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팍, 하고 세계가 찢어진다.

반탄력만으로 흩날리던 눈발이 으깨여질 정도였다. 파공성조차 없이 쏘아진 은빛의 궤적이 창대를 직선으로 강타했다.

으직, 하고 폭발하듯 터져 나가는 나무 창대.

병사는 느닷없는 제지에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물러섰다. 그대로 멈춘 것은 비단 그 병사뿐만이 아니었다.

모두의 몸짓이 멎었다.

북풍이 운동량을 모조리 앗아가 버린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것은, 오직 허공에서 팽팽 도는 손도끼뿐.

내가 손을 들자 탁, 하고 도끼가 되돌아왔다.

이제 더는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다들 엘프에게 손 떼세요…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안 됩니다.”

내 으르렁거리는 경고에, 알렉스 경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흐, 하고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가 또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여전히 무르십니다, 도련님. 그래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말씀드렸는데… 안타깝지만, 그 부탁은 거절하도록 하죠.”

알렉스 경은 계속하라는 듯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주춤거리면서, 슬금슬금 다시 엘프들에게 다가서는 병사들.

내 몸이 쏘아진 것은 그때였다.

탁, 하고 땅을 박찬 내 몸이 고속으로 내던져졌다. 어느덧 내 손은 허리춤에 매달린 검의 손잡이를 향하고 있었다.

벼락같은 발검이었다.

대응 따위는 불가능한 불시의 일격, 만일 내 앞에 있는 이가 어중이떠중이였다면 이 검격으로 이미 승부는 결정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상대는 백전을 거친 노장이다.

쿵, 하고 노기사의 대검이 시간을 찢고 내 검과 맞부딪혔다. 내리찍어진 검이 내 칼날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몸을 돌리고, 다시 검을 내리그을 때까지 시차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동요가 없을 수는 없을 테지.

내 발이 알렉스 경의 명치를 후려쳤다.

갑옷 탓에 치명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충격에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칠 정도는 되었다. 그때까지도 내 남은 손에는 손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또 다시 은빛의 궤적이 원을 그린다.

“악!”

“윽!”

팍,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창대가 하나둘씩 터져 나갔다. 더불어 검신을 후려쳐 몇몇 병사들은 검을 떨어트리기까지.

모두를 무력화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알렉스 경이 고함을 내질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도련님!”

“알렉스 경…….”

탁, 하고 되돌아온 손도끼를 갈무리하며, 나는 말했다.

“부탁이나 제안 따위가 아닙니다.”

두 손이 온전히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러자 날붙이의 서늘한 예기가 뼈를 파고드는 듯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지는 긴장감이었다.

강적을 상대할 때만 돌아오는 이 감각.

“더는 엘프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알렉스 경은 곧장 인상을 구겼고, 병사들은 눈에 띄게 당황해서 황망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엘프들조차 얼떨떨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

어쩔 수 없었다.

훌륭한 기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이를 증명하듯이, 아비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마을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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