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64화 (364/649)

〈 364화 〉 5. 빵과 비수(62)

* * *

“도련님, 미치셨습니까?”

노기사의 목을 긁고 나온 소리는 그처럼 싸늘했다.

맹수만이 지닐 수 있는 울음소리였다.

설원에서 수십 년을 전장에서 살아온 검사란 이토록 무시무시한 면모가 있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득한 살의가 묻어나왔다.

승부는 경지로만 가려지지 않는다.

실전 경험과 임기응변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아무리 내가 실전에 강한 편이라고 하나, 적은 백전백승의 노장이었다.

내 명성이 높다 한들 방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숨을 죽이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파르르 떨리던 긴장의 끈이 차츰 가라앉았다. 팽팽히 당겨진 적의의 실이 언제쯤 끊어질지, 내 몸이 옅게 굳어졌다.

아직 내겐 해야 할 말이 남아 있었다.

“미쳤다니, 누가 말입니까? 모든 엘프를 잠재적 학살자로 분류해서, 평화로운 마을을 불태우는 인간이 말입니까?”

“인류를 위한 일입니다!”

알렉스 경의 강변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건틀렛이 철그럭거리며 내게 얻어맞은 명치 부근을 탁탁 털었다.

눈동자가 매섭다.

대화를 나누고 있으나, 그 기세만큼은 이미 전투 중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설령 도련님 말씀대로 저들의 죄가 없다고 칩시다. 그리고 평생토록, 수백 년이나 되는 시간을 얌전히 있는다고…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집니까? 저들은 엘프입니다!”

“엘프로 태어난 것이 죽을 죄는 아니죠.”

“아니요, 죽을 죄 맞습니다. 저들이 우리와 칼을 맞대는 엘프들을 먹이고 입히니까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화가 길어져 봐야 결론은 뻔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나지막이 목울대를 긁었다.

어느덧 적의가 함뿍 묻어나오는 음색이었다.

“그렇게 당당해서 델핀 선배에게도 숨겼습니까?”

우뚝, 하고 노기사의 말이 멎는다.

그와 대화를 나누며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눈빛이 나를 향했다.

어디 계속 말해 보라는 듯.

“델핀 선배는 엘프의 습격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제게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까지 했죠… 그런데 제가 듣도 보도 못한 습격이 벌어지고 있다고요?”

“아가씨께서 도련님께 숨기셨을 수도 있죠.”

“아니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나는 흐, 하고 헛웃음을 삼키며 검극을 더욱 아래로 내렸다.

언제든 그 칼끝으로 노기사의 목젖을 노릴 수 있다는 듯.

“우리 사이가 꽤 깊거든요… 알렉스 경의 상상 이상으로.”

흐음, 하고 침음을 삼키며 알렉스 경이 내게서 눈을 돌렸다. 잠시 고민에 빠진 듯했다. 그래봐야 오랜 시간 고민할 수는 없었다.

그럴 여유를 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악문 잇새로 차가운 추궁이 이어졌다.

“왜 유르디나를 배신했습니까?”

“배신이라…….”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알렉스 경이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여전히 당당했다. 도리어 그를 추궁하고 있는 내 꼴이 우습다는 투였다.

“제 충심이 의심받다니, 이 알렉스도 한물갔군요… 오해입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고의적으로 델핀 선배에게 정보를 숨기고, 엘프들을 자극하기까지 했다. 엘프들이 사교에 빠지고 인류를 습격했던 까닭은 이러한 도발 탓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죽고 다쳐야 했다.

내 손에 묻은 엘프들의 피가 이를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열기가 멋대로 목젖을 치고 올라왔다.

“델핀 선배에게 정보를 숨겼잖습니까!”

“그래서요?”

그 천연덕스러운 반문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 함의를 알지 못하는데, 반박이 가능할 턱이 없었다. 정제되지 못한 언어는 노도가 되어 내 심장을 세차게 때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어떻게 그리 뻔뻔하게.

다시금 내가 목청을 높이려던 찰나였다.

“델핀 아가씨… 어린 시절부터 명민하셨고, 일신의 무력 또한 뛰어나신 분입니다. 가신들의 존경도 한몸에 받고 계시죠. 허나 그분이 곧 유르디나는 아닙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차차 아시게 될 겁니다. 맹세코, 제가 유르디나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노기사가 검의 손잡이를 천천히 그러쥐었다.

칼날에서 붉은 오러가 넘실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명백한 도발, 이에 응해 내 검에도 은빛의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가 최후통첩이라는 양 물었다.

“그래도 저를 참하시겠습니까? 유르디나의 충신이자, 인류를 위해 헌신해 온 저를?”

“유르디나를 위해 충성한다고 하셨잖습니까.”

나는 사나운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껏 노기사가 그래왔듯이.

“저는, 델핀 선배를 위해 충성합니다.”

“아가씨께서 좋은 패를 고르셨군요…….”

그러면서 알렉스 경은 제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눈동자에 흡족한 빛이 어렸다.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그가 한 마디.

“다들 물러서라. 너희 실력으로는 방해밖에 되지 않으니까.”

내게 던진 말은 아니었다.

흠칫, 하고 몸을 떨던 병사들이 차츰 뒤로 물러섰다. 두 익스퍼트가 발하는 살기에 질렸는지 벌써부터 새파란 안색이었다.

알렉스 경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선언했다.

“그럼, 검무를 춰 볼까요.”

선공을 양보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내 발이 전력을 다해 땅을 박찼다. 갑작스레 쏘아진 몸뚱아리가 비명을 내질렀으나, 내 쇄도가 느려지는 법은 없었다.

일순 시간이 붕 떠버리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러나 상대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병이었다. 내 속셈 따위는 금세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다.

이를 증명하듯이, 묵직한 파공성을 일으키며 반원을 그리는 대검.

훙, 하고 날아드는 거대한 날붙이가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이에 대항하여, 나는 검에 막대한 운동량을 모조리 투사했다.

이윽고 터져 나오는 폭음.

쾅, 하고 두 검이 마주치자마자 대기가 찢겨나갔다. 마치 돌을 맞은 수면처럼 설원 위로 파문이 새겨졌다.

가까이 있던 엘프 몇몇이 비명을 내지르며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캉, 캉, 캉!

찰나의 공방이 불꽃을 튀기며 이어졌다. 우하단에서 좌상단, 그리고 곧장 정면으로 내려긋는 일격에 하나하나 검격이 틀어박혔다.

대검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무장의 차이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대검은 묵직하고 강인하지만, 그 이상으로 속력이 느렸다.

나를 완력으로 제압하지 못하면 내 우위는 여전했다.

칵, 하고 내려친 검을 비켜 맞은 대검이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처박혔다. 예상하던 대로 속력은 내 쪽이 우위였다.

충돌과 동시에 튀어 오르는 검을, 이를 악물어 내리찍는다.

지반에 틀어박힌 검을 빼내려먼 그 이상의 힘이 필요했다. 하물며 내 검은 하방을 향하고 있었고, 알렉스 경의 검은 상방을 향하고 있던 차였다.

대검이 내 일격에 대응할 수단은 전무했다.

그래, 대검으로는.

카각, 하고 칼날이 금속의 표면을 긁으며 기분 나쁜 소음을 일으켰다. 단단한 힘이 내 검을 강제로 고정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건틀렛이었다.

알렉스 경이 착장하고 있던 두꺼운 강철 장갑은, 어느덧 핏빛 오러에 물들어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검을 빼려 했으나, 알렉스 경의 악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노기사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방어구는 장식이 아닙니다, 도련님.”

팍, 하고 발길질이 명치에 틀어박혔다. 검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 덕에 검 손잡이를 놓치지는 않았다.

그 대가로 연달아 기사의 발이 내 복부를 후려쳤을 뿐이었다.

퍽, 퍽, 퍽.

가죽을 두들기는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는 검에서 한 손을 떼 손도끼를 더듬거리며 쥐었다.

직후 그려지는 새하얀 궤적.

노기사는 그제야 만족한 듯 내 검을 놓아주었다. 마지막까지 걷어차인 내 몸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속이 느글거리는 느낌.

전력을 다한 발길질은 아니었다. 내 검을 쥔 채로, 나를 견제하면서 온 힘을 다해 내 명치를 후려차기는 힘들었던 듯했다.

그럼에도 타격은 유효했다.

내 입술 사이로 핏물이 주르륵 새어나왔다. 옅은 출혈이었으나, 긍정적인 신호는 아니었다.

내장이 박살나고 있단 뜻이었으니까.

“인간!”

이샤를 비롯해 엘프들이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볼 때는 어리둥절한 광경일 수밖에 없을 테지.

몇 초에 불과한 시간, 몇 번의 검격이 오고 가고 끝내는 내가 뒷걸음질을 쳐야 했는가.

저들의 실력으로는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단지 넋이 나간 와중에도 내 위기를 느끼고 비명을 질렀을 뿐.

알렉스 경은 내게 농을 던졌다.

“참 시끄러운 관중들이군요. 거슬리시면 입 좀 다물게 할까요?”

“제일 거슬리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 방금 전에도 막 입을 놀리던데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쿨럭, 하고 한 줌의 핏물을 뱉어내야 했다.

오랜만에 입 안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나는 자세를 낮추며 알렉스 경을 응시했다.

갑옷뿐만 아니라 건틀렛까지 고급품이었다.

더불어 방어구에 오러를 두르는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지금껏 내가 상대해 온 상대와는 종류가 달랐다.

노련하고, 숨기는 것도 많다.

그렇다면 나도 굳이 전력을 감출 이유가 없었다.

각오를 다진 내 숨결이 점차 가라앉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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