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화 〉 5. 빵과 비수(63)
* * *
“아직도 얼얼한데요.혹시 죽일 셈입니까?”
“당연한 말씀을.”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내뱉은 말이었다.
누가 보면 친근한 사이끼리 나누는 농담이라도 되는 줄 알 정도였다.그러나 나는 알렉스 경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고 깨달았다.
이 사내는 진심이었다.
나를 죽일 각오로 검을 들었다.
“도련님,북부의 오랜 격언을 알려드리죠. ‘입을 다물게 하는 것보다,입을 없애는 편이 더 쉽다.’조상의 지혜란 이처럼 위대한 면이 있습니다.”
“오늘따라 말이 많으시군요.유언입니까?”
“하하,도련님께서도 죽일 생각 만만이십니다…훌륭하게도.”
눈 속에 파묻힌 대검이 팍,하고 뽑혀 나왔다.
검극이 나를 향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알렉스 경은 다시금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직전의 공방으로 대략적인 계산을 끝마친 것이다.
경지는 내 쪽이 더 높지만,실전 경험과 전략의 변칙성은 알렉스 경이 더 나았다.
이전의 전투와는 정반대의 양상이었다.
내 장기는 부무장과 다양한 기술을 활용한 실전성에 있었다.그러나 이를 알렉스 경에게 압도당하고 있는 판이었으니,불리할 수밖에.
심지어 알렉스 경은 내 전투 방식을 전부 꿰고 있었다.
대개의 기술들은 이미 대중 앞에서 공개가 끝난 뒤였던 탓이었다.최소한 지난 엘프와의 전투에서 알렉스 경은 나를 눈여겨보았을 테지.
난관이었다.
그러나 아직 내게도 숨겨둔 한 수는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마저 정적을 강요하는 세계.
얼어붙은 세상에 파문을 일으킨 쪽은,내가 아니었다.
쿵,하고 둔중한 소리와 함께 노기사의 몸이 쏘아졌다.
전신을 중갑으로 도배한 기사였다.그 무게에 가속력이 더해지니,그 위력만큼은 포탄과 비견할 만했다.
정면으로 부딪히면 승산이 희박했다.
내 눈이 발작적으로 주위의 풍경을 도해했다.공간의 실끈들이 내 손을 따라 마구잡이로 헝클어졌다.
텅,하고 세계가 일그러지고 재생하는 듯한 착각.
알렉스 경은 어느덧 나를 스쳐 지나간 뒤였다.그러나 이쯤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그 자리에 멈춰선 그는 반환점을 돌 듯 검을 내질렀다.
극점을 찢으며 날아드는 찌르기.
나는 검면을 비스듬히 들어 그 일격을 흘려냈다.대검의 무게가 워낙 묵직했던 탓에 내 몸이 살짝 기우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알렉스 경이 노리고 있던 틈은 그것이었다.
그는 도리어 땅을 박차고 내달리며 내게 몸을 밀착시켰다.대검의 위력을 흘려내느라,내가 검 손잡이에서 한 손을 뗄 수 없다는 사실을 짐작한 듯했다.
즉, 손도끼로 견제가 불가능하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육탄 돌격.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되돌리며 몸을 회전시켰다.회절의 묘리를 담은 일수에 알렉스 경의 몸이 다시금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 또한 몸을 돌리며 얌전히 있지는 않았다.
회전력을 담아,횡으로 그어지는 일격이 공간을 절단한다.
탁,하고 노기사의 대검이 내 검을 가로막았다.등 뒤를 가까스로 방어하는 어색한 자세,그러나 몸의 중심으로부터 가까운 쪽은 대검이었다.
나는 재빨리 검을 회수했고,당연하다는 듯 그 뒤를 대검이 따라 나왔다.
두어 걸음 물러나며 회피.
앞섬이 칼바람에 으드득 찢겨나간다.
엘프 마을에서는 구할 수 없는 소재인데,얼핏 아쉬운 감상이 들었으나 이에 깊이 잠겨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내 몸이 굽혀지고,퉁겨진다.
그렇게 내 검이 품속을 파고들기 직전,알렉스 경이 노호성을 터트렸다.
“어딜!”
온 힘을 다한 내려베기가 직선으로 그어졌다.
쿵,하고 무거운 충격파가 주위를 휩쓸었다.내 검은 자연스레 튕겨져 좌하단으로 떨어졌다.
알렉스 경은 다시금 대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건틀렛에 붉은 오러가 어리고 있었다.이대로 가면 방금 전의 반복이었다.
내 검이 튕겨나가거나,상대의 검격을 받아치더라도 건틀렛에 검이 붙잡힐 운명.
알렉스 경의 눈동자에 살벌한 기세가 어렸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일종의 승리 선언이었다.
최소한 그가 알기로 내게 이 상황을 돌파할 수단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으로 핏빛 오러를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내 목숨을 확실히 끊어놓기 위해.
이글거리는 오러가 마치 불꽃과 같았다.점점 단단히 응축하는 그 일격을 정통으로 막아내기는 무리였다.
그래,막아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수는 무엇인가.
그 해답은 내 검극의 위치에 있었다.
좌하단으로 떨어진 칼끝이,시간 속을 둥실 떠올라 유영하기 시작한다.
찰나의 공방을 벗어난 검이 허공에 상처를 아로새기고 있었다.
이것은 이빨인가,혹은 발톱인가.
알렉스 경이 이 기술을 모를 턱이 없었다.
멈췄던 시간이 방류하기 직전,알렉스 경의 눈이 부릅떠졌다.
불신을 가득 담은 시선이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폭발하듯이,은빛 갈퀴가 다섯 줄이나 터져 나왔다.
비전절기,금사검(???).
유르디나 가문의 직계에게만 전승된다는 기술이었다.오랜 시간 유르디나에 충성해 온 노기사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가문의 비전이 외인에게 전수되었다는 사실을.
그 대가는 참혹했다.
한 줄은,대검의 각도를 틀어버렸다.
또 한 줄은,대검을 퉁겨 올렸고.
나머지 세 줄기가 두터운 금속을 찢으며 통렬한 아픔을 선사했다.
울컥,하고 알렉스 경의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그때까지도 알렉스 경은 얼이 빠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직후,내 손이 도끼를 쏘았다.
텅,하고 무방비로 일격을 허용한 알렉스 경의 몸이 붕 떠올랐다.나는 내달려 그 위를 뛰어들 듯 덮쳤다.
내 손이 허공을 부유하던 손도끼를 낚아챘다.
그 다음은 순식간이었다.
쿵,하고 지면에 부닥치며 알렉스 경의 몸이 한 차례 경련했다.그 틈을 타서 내 손도끼가 알렉스 경의 팔뚝에 작렬했다.
어차피 금속의 이음새를 파고들 필요도 없었다.
도끼의 뒷면을 망치처럼 활용하면 됐다.
캉,캉,캉!
불꽃이 튀는 소음과 함께 금속으로 이루어진 갑옷이 조금씩 으그러졌다.치명타는 아니었으나,상대를 제압하기에는 적당했다.
“크으,끄아,크아아악!”
팔뚝 뼈가 뒤틀린 노기사가 처량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 또한 잠시.
제압을 끝마친 나는 손도끼 대신 검을 들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최대한 알렉스 경과 거리를 벌리기 위함이었다.
검극을 싸늘한 예기가 흘러내렸다.그 빛의 흐름 끝에서,핏방울이 맺혔다.
노기사의 목젖이었다.
나는 헐떡이는 숨소리를 애써 감추며 말했다.
“……항복하시죠,알렉스 경.”
“크,크큭…크하하하하핫!”
숨이 끊어져라 터져 나온 웃음소리였다.
노기사는 거의 몸부림에 가깝도록 몸을 비틀며 웃었다.그 위에 올라탄 내 몸이 절로 들썩거릴 정도였다.
내 미간이 더욱더 좁아졌다.
이대로 죽여야 하나?
하지만 아직 상대에게서 들을 말이 남아있었다.나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어 경고했다.
“지금이라도 항복하라고 했습니다.그럼 목숨을 보장…….”
“그,금사검…이럴 수가,내 생전에 유르디나의 핏줄이 아닌 자가 금사검을 쓰는 꼴을 보게 되다니…….”
한탄과도 같은 말이었다.
웃다 지친 알렉스 경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일그러진 표정에서 그가 겪고 있을 고통이 그대로 느껴졌다.
“델핀 아가씨와 깊은 관계라는 말이,그 뜻이었습니까?흐흐…어린 시절에,델핀 아가씨의 결혼식만큼은 꼭 보겠노라 약조했는데.”
“그러니 항복하란 말입니다!”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그러든 말든,노기사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왜 델핀 선배에게 비밀로 엘프를 습격했습니까?그리고 델핀 선배가 곧 유르디나가 아니란 건 무슨 소리죠?왜 굳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엘프를 도발까지 해가며……!”
“도련님.”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안쓰럽다는 눈빛을 한 노기사가,조용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삶과 죽음 따위는 초탈했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일순 불안해졌다.
한동안 그 얼굴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만 같아서.
“전 이미 한 번 죽은 몸입니다…제 부모님은 숲의 사냥꾼이었습니다.어느 날 엘프를 만나 비명횡사를 하기 전까지는요.”
“아픈 과거를 동정이라도 하길 원합니까?”
“그리고 제 아들은 아비를 따라 기사가 되겠다고 하다 죽었습니다.마찬가지로 엘프와의 전장에서였죠…병약한 제 아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선물이나 다름없는 아이였는데.”
목젖을 겨누고 있는 내 검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그랬던 당신이 불러온 비극을 보시죠…엘프는 사교에 빠졌고,더 많은 병사들이 전선에서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이제 속이 시원하십니까?!”
“속은 언제나 후련했습니다…….”
큭큭,하고 알렉스 경은 움찔거리며 어깨를 덜었다.
손을 들고 싶은 모양인데,뼈가 부러져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정확히는 가슴에 구멍이 난 느낌이었죠.그러니 편해지더군요.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오직 유르디나를 위해 살아가는 삶.”
“하,그래서 델핀 선배를…….”
“도련님께서는 유르디나가 짊어진 무게를 모르고 계십니다.”
숨을 고르며 내뱉은 말에,내 손이 우뚝 멎었다.
의아한 눈빛이 노기사를 향했다.그 의문에 호응하듯,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세상에는,때때로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입니다…제국의5대 귀족 가문조차 거역할 수 없는 사정이.”
“……그게 도대체 뭡니까?”
흐,하고 알렉스 경은 헛웃음을 머금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직후,눈을 뜨면서 한 마디.
“이러니까,도련님이 뭘 모른단 겁니다.”
내가 무어라 질문을 던지려던 찰나.
팍,하고 알렉스 경의 어깨가 들썩였다.그리고 그 파문을 타고 채찍처럼 후려쳐지는 금속의 갑옷.
그곳에는 옅은 핏빛 오러가 둘러져 있었다.
얻어맞으면 치명타다.
나는 곧장 고개를 숙이며 검을 옆으로 세웠다.캉,하는 강렬한 충돌음이 울려 퍼지며 내 몸이 측면으로 기울였다.
그 틈을 타 알렉스 경은 허리를 거칠게 퉁겨 나를 밀어냈다.
우득,우드득.
금속 갑옷이 찌그러지며 기묘한 소음을 내고 있었다.저절로 벗겨지는 갑옷의 모습은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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