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6화 〉 5. 빵과 비수(64)
* * *
델핀 선배의 갑옷이다.
알렉스 경의 갑옷은 그와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듯했다.가까스로 우그러진 갑옷을 벗겨낸 그의 손이 덜덜 떨리며 움직였다.
뼈를 비틀고 있는 갑옷을 벗어내자,조금이나마 움직임을 되찾은 듯했다.
품속을 더듬거리던 주름진 손이 이윽고 물약을 찾아냈다.
불의의 기습을 허용한 나는 신음을 흘리고 있던 차였다.그리 오래지 않아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으나,알렉스 경은 이미 응급처치를 끝낸 뒤였다.
텅 빈 물약병이 설원 위에 던져졌다.
알렉스 경의 몸에서 새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시작했다.갑옷에 가려져 있던 몸은 노인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건장해 보였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그가 말했다.
“방어구는,장식이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알렉스 경,더하면 죽습니다.”
주춤주춤 몸을 일으키며,나는 경고했다.
이제 내게도 남은 수가 얼마 없었다.
나 또한 누적된 타격이 상당했다.성녀도 없는 지금,이보다 심한 부상을 입으면 이후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알렉스 경은 여전히 망설이는 기색조차 없었다.
“하하!그거 좋겠군요…이 비루한 삶을 도련님과 같은 상대가 끝내준다니?그리고,북부에서는‘죽는다’라고 이야기하면 늦습니다.”
그와 동시에 알렉스 경은 가슴을 둘러싼 벨트에서 단검을 꺼냈다.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부무장인 듯했다.
과연 수많은 전투를 헤쳐 온 정예다운 준비성이었다.
결국 나는 눈을 질끈 감는 수밖에 없었다.
“‘죽인다’…라고 말해야죠!”
또 다시 노기사의 몸이 내게 엄습한다.
단검에서 핏빛 오러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내 눈이 다시금 뜨인 것은 그때였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
노기사가 이를 눈치채기도 전에,허공에 핏빛의 글자가 아로새겨졌다.
세계가 핏물을 흘린다.
이글거리는 불꽃이 그 자상을 향해 수렴했다.일촉즉발의 시간,알렉스 경의 단검은 그제야 내게 닿을 수 있었다.
화려한 폭발과 함께.
쾅,하는 폭음이 터져 나오며 불꽃이 설원을 달구었다.눈과 이끼가 단숨에 증발해 버리는 광경은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주었다.
이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인간이 무사할 리가 없었다.
비명조차 없이 노기사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그리고 몇 바퀴를 구르며,몸을 불태우던 불꽃이 사그라진다.
그것이 최후였다.
죽음의 불꽃과 함께,삶의 불꽃 또한 사그라지고 있었다.알렉스 경의 몸이 옅은 경련을 시작했다.
재기 불능이었다.
나는 찢어질 듯한 안구 통증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걸어,어느덧 내 발자국은 알렉스 경의 앞까지.
노기사는 엎어진 채로,가까스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죽음을 앞둔 모습이었다.
“크,크큭…요,용혈 문자…….”
마지막 힘을 짜내어,사내가 터트린 웃음이었다.
마지막까지 몸을 일으키려는 듯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그럼에도 말을 듣지 않는 몸뚱아리,어찌 이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으랴.
기사의 최후란 이토록 필사적이었다.
“드디어,황실이 눈치를 챘구나…아,유르디나여…….”
유언을 끝으로, 숨도 끊겼다.
나는 이제 막 죽음을 맞이한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설원에는 아직도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새하얀 입김이 눈송이와 함께 흩어졌다.
모두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엘프도, 병사도 한동안 내게서 눈과 귀를 떼지 못했다.
이들이 내 죄의 증인이 되리라.
나는 살인을 했다.
그것도 엘프를 위해서.
이것이 나의 선택이었다.
**
전령의 도착이 유르디나 성에 희소식을 알렸다.
단독으로 실종자 수색을 지휘하던 알렉스가 이안을 발견했다.
이 사실을 깨닫자마자, 전령은 종일 질주해 성에 도착했다. 자세한 사정은 듣지도 못한 채였다.
그는 알렉스가 처음에 내보냈던 그 병사였으므로.
따라서 전령은 그 이후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다만 엘프들이 울부짖던 소리만을 기억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안 페르쿠스가 기억을 잃었다.
조기에 발견되어 천만다행이었다. 기억 상실이란 드문 증상이긴 해도, 사선을 함께 넘어온 동료들의 품에 돌아오면 차도가 있으리라.
물론 그 소식을 제일 반긴 이들은 따로 있었다.
성녀와 엘시, 황녀와 엠마.
이안의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지체 없이 소수의 병력을 꾸려 전령을 따라 걸었다. 그 이후로 알렉스로부터 들어온 소식은 없었으나, 무언가 사정이 있겠거니 할 뿐이었다.
알렉스와 그를 따르는 병사들은 실전 경험이 풍부했다.
엘프 따위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아마도 엘프 마을에서 이안의 치료에 전념하고 있지 않을까, 예상했을 뿐.
그래서 그들은 마을에 도착한 직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인기척이 남아있지 않았다.
불탄 오두막과 부러진 병장기들이 엿보였다. 살아있는 자의 온기 따위는 실종된 지 오래로 보였다.
다만 그 흔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할 수 있었다.
눈으로 만들어진 봉분들이었다.
그 위에는 병장기들이 하나씩 꽂혀 있었다.
창, 칼, 그리고 대검.
일행의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엘프의 무덤일까요?"
멍청한 소리였다.
그러나 황녀가 내뱉은 말에 감히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도 제발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엘프들에게 금속으로 된 병장기를 주조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범람하는 사고를 제어하지 못했다.
여인들 사이로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엘시였다. 그녀는 제 앙증맞은 손을 이마에 얹은 채,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실로 어이가 없다는 듯.
"아니, 엘프 따위의 무덤을 만들어서 뭘 하겠다는 거야? 내참, 다들 물렁해 빠져서는… 자, 그래서 우리 주인님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던진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럼에도 엘시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푸른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갖가지 감정이 농축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주인님은 어디 있어? 찾아… 당장 찾으라고!"
발작처럼 외쳐진 지시에 병사들이 허겁지겁 채비를 시작했다.
이제부터라도 탐색을 개시할 생각인 듯했다. 허나 그보다 먼저 파악해야 될 문제가 있었다.
"……파헤쳐 보세요."
상충하는 두 지시가 내려지자, 병사들은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엘시는 입술을 짓씹으며 두 번째 지시를 내린 이를 노려보았다.
유렌이었다.
그는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유일하다시피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봉분들, 전부 파헤쳐 봅시다."
"야, 호위기사.너 내 말 못 들었어? 우선 주인님부터 찾으라고……!"
"엘시 선배, 바보 흉내는 그만 내시고."
조롱인지 모를 지적이었다.
다만 그 효과는 뛰어났다. 불길 같던 엘시의 기세가 단번에 누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엘시는 그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 뿐이었다.
그럼에도 마땅한 반론이 생각나지 않는지, 새침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애써 숨기고 있지만, 보였다.
엘시는 불안했다. 진실을 확인하는 것이.
그리고 그 불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실체가 되어 되돌아왔다.
파헤친 무덤 속에는 얼어붙은 시체들이 놓여 있었다.
알렉스와 병사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충신의 시체를 본 세리아의 몸이 허물어졌다. 털썩 주저앉은 그녀는 입을 막은 채,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아, 아… 아, 알렉스 경? 어째서……?"
알렉스가 누구인가.
자타가 공인하는 유르디나의 충신이자, 군권을 맡을 만큼 유르디나 후작의 신임이 깊은 기사이기도 했다.
수십 년 동안 전장을 가리지 않은 그 용기는 북부인의 귀감이라는 평가까지 받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
그 사실에 충격을 받지 않을 북부인은 드물었다. 병사들의 부릅떠진 눈동자만 보더라도 그랬다.
허나 진정으로 충격을 받아야 할 진실은 따로 있었다.
시체를 살피던 병사 중 하나가 고함을 내질렀다.
"유, 유서! 이곳에 유서가 남아있습니다! 죽기 직전에 남긴 것 같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파가 우르르 몰려갔다.
그곳에는 과연 숨이 끊어지기 직전 남긴 듯한 글귀가 남아있었다.
얼어붙은 흙 위로, 피를 흘려가며 쓴 짤막한 문장.
이미 말라붙어 거무죽죽해진 뒤였으나, 자세히 보면 어떻게든 분별할 수준은 되었다.
병사 하나가 조심스레 그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이… 이안? 아! 이안 페르쿠스가……."
그러나 그 낭독은 차마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병사는 급히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이미 모두의 시선은 글귀에 꽂혀 있었고, 엎질러진 물이었다.
결국 병사는 눈을 질끈 감고 더듬더듬 남은 글귀를 읽어나갔다.
"이, 이안 페르쿠스가……."
"인류를 배신했다."
멍하니 내뱉어진 목소리.
모두의 눈동자가 그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 하나가.
"말도 안 돼……."
누구보다 창백한 낯빛을 하고 서 있었다.
기억을 잃은 사내가, 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차마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오해는 눈처럼 쌓여가고, 이야기는 종막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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