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67화 (367/649)

〈 367화 〉 5. 빵과 비수(65)

* * *

노기사를 향한 추모는 길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죽인 사내였다.

얼마나 오랜 시간 명복을 빌어도 모자라지 않겠으나, 지금은 시기가 적절하지 못했다. 이미 이곳은 유르디나 군에 의해 발각되었다고 봐야 했다.

당장 알렉스 경이 전령 하나를 보내지 않았던가.

어서 몸을 추스르고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한참이나 노기사의 시체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다가, 나는 비로소 발걸음을 돌렸다.

엘프를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허나 남은 병사들은 나의 승리를 축복해 주지 않았다.

그들 중 하나가 발작적으로 엘프 하나를 붙들었다. 그리고 그 목젖에 비수를 가져다 대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꺄, 꺄아아아악!”

“오, 오지 마!”

설마 그토록 무모한 짓을 벌일 줄 몰랐던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살희망자인가?

패배가 확정된 시점에서 협박은 무의미했다. 물론 내게 동요는 줄 수 있겠으나, 고작해야 그 정도가 한계.

인질이 사라지는 즉시 병사는 생명의 위기를 겪어야 할 터였다.

그렇다고 인질을 데리고 침엽수림을 빠져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단독으로 그럴 체력도 남아있지 않거니와, 애초에 침엽수림을 벗어난 엘프는 죽은 목숨이었다.

볼모로서의 가치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설득에 나서야 했다.

“칼 놓으시죠… 이미 끝난 싸움입니다.”

“알렉스 님은 우리의 우상이셨어!”

울부짖으며 외친 말이었다.

그 절절한 목소리를 들은 몇몇 병사들로부터 동요가 일었다. 그들도 슬금슬금 병장기를 꼬나쥐는 꼴이, 아무래도 골치가 아파질 듯했다.

우선 나는 혼자였다.

다수가 날뛰기 시작하면 내게도 한계는 존재했다. 이대로 가다간 엘프 중 몇몇은 목숨을 잃어야 할지도 몰랐다.

더불어 나는 이제 막 내 동족을 죽인 참이 아니었던가.

더 많은 인명을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죽이지 않고 제압만 하는 것이 최선이겠으나, 엘프를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이들의 명까지 일일이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나는 우선 병사의 하소연을 잠자코 들어주기로 했다.

“우리는 모두 엘프들한테 가족을 잃었지… 그래서 이 임무에 자원한 거야! 알렉스 님에게 충성을 다하기로 했는데, 어떻게 우리만 목숨을 건질 수 있겠어?!”

“무의미한 죽음이잖습니까.”

내 지당한 반론에 병사의 몸이 움찔 떨렸다.

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설득을 이어갔다.

“그렇게 목숨을 버려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불행한 엘프 몇 명의 목숨을 가져가는 정도?”

“그, 그 정도로 충분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불타는 복수심을 달랠 수도 없고요.”

그러면서 나는 한 걸음을 내딛었다.

자그마한 신호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도 병사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모든 생물이 공유하는 감정이었다.

그 앞에서 인간과 엘프의 차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병사는 엘프의 목젖을 겨눈 단검을 더욱 바짝 붙였다.

엘프가 히익, 하고 신음을 삼키며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두 남녀의 몸이 공명이라도 하는 듯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토록 죽음이 무서운데도 목숨을 헛되게 던지려 하다니.

심지어 남의 귀한 목숨까지 빼앗아 가면서 말이다.

나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제 그 엘프를 놓아주시죠. 당신들까지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믿지?”

“죽일 생각이었으면, 아직까지 당신이 살아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오만한 선언이었으나 냉정한 현실이기도 했다.

나는 이미 병사들을 제압한 바가 있었다. 손도끼를 던져, 그들의 병장기를 하나씩 터트렸을 때 내 의도는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죽일 마음이었다면 그때 죽였다.

내 논리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병사의 손에 일던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는 고뇌가 역력한 기색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알렉스 경을 향한 의리와, 제 목숨.

무엇이 중요한지 가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렉스 경의 인망을 증언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설득을 시도했다.

“알렉스 경의 유해를 저대로 둘 순 없잖습니까.”

그것이 결정타였다.

우물쭈물하던 병사 중 하나가 눈을 질끈 감고 병장기를 내던졌다. 이는 나머지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나기처럼 검과 창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남은 것은 엘프를 위협하는 병사뿐이었다.

나는 어쩌겠냐는 듯 사내를 바라보았다. 병사는 동료들의 선택에 다소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이를 악물었다.

불길한 조짐이었다.

툭 튀어나온 눈동자에 붉은 혈관이 비치고 있었다. 과도한 흥분 상태에 빠졌다는 의미였다.

나는 다급히 손도끼를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허나 이제야 막 첫 번째 살인을 끝마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찰나의 망설임이 참사를 가져올 판이었다.

내 입에서 절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안 돼!”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단검이 엘프의 목젖을 긋기 직전.

푹, 하고 은색의 비침이 병사의 뒷덜미에 틀어박혔다.

“크억, 컥!”

병사는 신음조차 제대로 흘리지 못했다. 단지 눈을 부릅뜬 채로, 비틀거리다가 옆으로 쓰러졌을 뿐.

그가 나동그라진 자리에는 벌벌 떨고 있는 엘프만이 남아 있었다.

당연하지만, 내가 한 짓은 아니었다.

그 범인을 찾으러 모두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러자 불타는 마을의 구석에서, 그림자 하나가 꿈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앞머리에 강조점을 주는 핀에, 갈색 머리카락. 잡티 하나 깨끗한 피부가 순한 인상을 주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 진녹색의 눈빛만은 달랐다.

타인을 거부하듯 까마득한 깊이로 가라앉은 색조였다. 얼핏 보면 뱀의 눈처럼 보이기도 했고, 혹은 음모를 숨긴 여우의 눈처럼 보이기도 했다.

뒷짐을 진 채 뚜벅뚜벅 걸어 나온 여인이 정중히 제 치맛단을 쥐었다.

차려입은 옷과 같이, 하녀의 예법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안 님.”

네리스 선배였다.

나는 그 난데없는 조우에 하, 하고 옅은 웃음을 터트려야 했다.

어째서 네리스 선배가 이곳에?

**

병사 한스는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북풍이 매섭게 살을 애며 갑옷을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추위를 타지 않는 까닭은, 이 주변이 활활 타고 있어서겠지.

엘프 마을에는 아직도 잔불이 남아있었다. 저중 몇몇은 한스가 지른 불일 터였다.

우스운 꼴이었다.

오두막을 불태우고, 그 온기로 동사를 면하다니.

마치 남의 불행을 파먹고 살아가는 기생충 같았다. 예전에 그의 마을을 덮쳤던 엘프들처럼.

한스의 마을은 식량이 부족한 엘프들에 의해 파괴당했다.

생존자는 그 하나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일평생을 복수에 미쳐 살았다.

그러다 보니 멋진 상사도 만나게 됐다.

지휘관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병사와 함께 최전선에서 싸우던 기사.

그는 죽었다.

그것도 인류가 영웅으로 숭상하는 자의 손에.

한스는 그 허탈한 최후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만 멍하니 몸을 일으켜 기억을 되짚었을 따름이었다.

엘프를 찔러 죽이려고 했는데, 그 이후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기억의 공백을 채워준 것은 그의 동료였다.

동료 병사 하나가 터덜터덜 걸어와 한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며, 나무로 만들어진 조잡한 삽을 내밀었다.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조악한 기술력은 엘프의 것이었다. 한스의 눈빛이 멍청해졌다.

“무덤 만들고 있어. 너도 도와라.”

“뭘…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한스의 질문에 동료 병사는 그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그 마음을 모르지는 않는다는 듯.

“뭐가 어떻게 돼? 우리가 털린 거지… 그것도 아주 탈탈 털렸어. 너, 그 이후에 어떤 아가씨한테 침 맞고 기절했었다고.”

“그런데 우리가 왜 살아있는데?”

“살려줬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였다.

그러나 쉬이 이해할 수는 없는 말이었다.

마을을 불태우고, 엘프들을 씨몰살을 시키려 들었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살려줬다고?

한스는 무어라 반박을 해보려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부정해도 소용없었다. 그의 명줄이 붙어있다는 것이 가장 명확한 증거였으니까.

동료 병사의 나지막한 설명이 이어졌다.

“엘프는 우리를 죽이고 싶어 했는데, 이안 경이 막아주더군… 증인도 필요하지만, 죽이고 죽여봐야 남는 것은 없다고. 엘프들도 가까스로 납득한 모양이야.”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뭘 어쩌긴 어째? 알렉스 님이 전령을 보냈으니, 버티다 보면 병사들이 오겠지. 그때까지 알렉스 님의 무덤이나 만들어 두자고.”

그 막힘없는 설명에, 한스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틀린 말이 없었다.

그는 결국 목숨을 구원받았다. 비록 이안의 만류가 있었다곤 하지만, 복수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엘프들의 손에.

이보다 허탈한 수치가 있을까.

다만 동료 병사의 생각은 조금 달라 보였다.

그의 손이 또 다시 한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나도, 뭐… 이 기회에 다시 생각해 봤는데, 이 짓거리도 그만두려고.”

“……은퇴하겠단 소리야?”

“그래, 알렉스 님도 돌아가셨잖아.”

동료 병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머물렀다.

그는 회상에 잠긴 듯 몽롱한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동안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혔어… 처음엔 복수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그 원수들에게 목숨을 구원받으니 허무해지더라고.”

“어차피, 엘프들은 전부 잠재적인 살인마들이야.”

“그리고 우린 그냥 살인마고.”

동료 병사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삽자루를 쥐었다. 그의 마지막 조언이 이어졌다.

“하여튼, 너도 다시 생각해 봐. 언제까지 이러고 살 수만은 없잖아? 그래도 모아둔 돈은 조금 있을 테니… 끄아아아아악!”

그래, 그야말로 마지막.

불붙은 화살이 동료 병사의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한스가 갑작스러운 기습에 얼이 빠진 사이, 폭발하는 머리통.

작은 폭음과 함께 두개골이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핏물과 살점이 잔뜩 튀어오르기 직전, 한스는 본능에 몸을 맡겨 땅 위로 엎어졌다.

철퍽이며 떨어져 내리는 뇌수의 소리가 끔찍했다.

그러나 이는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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