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68화 (368/649)

〈 368화 〉 5. 빵과 비수(66)

* * *

불화살과,불덩이와,비도가 날아와 동료들의 심장과 머리를 관통했다.그때마다 어김없이 비명이 터져 나오며 목숨이 하나씩 스러졌다.

“으아악!”

“컥!”

한스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가득 채웠을 뿐이었다.

그는 엉금엉금 기어,슬쩍 불화살이 날아든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길쭉한 신장,뾰족한 귀,그 늘씬한 팔다리까지.

엘프였다.

설마 떠났던 엘프들이 돌아온 것일까?

그러나 이전에 한스가 마주쳤던 엘프는 이토록 강하지 못했다.만일 이 정도의 전력을 갖춘 상대였다면,애초에 교전 자체를 회피했을 터였다.

덜덜 떨리는 한스의 눈동자에 유독 이질적인 그림자가 들어왔다.

장신의 엘프 사이로,땅딸막한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화상으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흉측했다.더불어 모발마저 타버렸는지,그 흉측한 낯짝을 숨길 머리카락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눈.

그 푸른 눈동자만큼은,깊이 가라앉아 있어서.

한스는 일순 혼란이 일었을 정도였다.

허나 그에게 남은 여유는 얼마 있지 못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기어,불타 스러진 오두막의 잔해 사이로 몸을 던졌다.그리고 죽은 척 눈을 감고 기다렸다.

제발 저 괴물들이 얼른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잿더미의 잔열로 피부가 따끔거리며 아파왔다.심지어 처음에는 몰랐는데,그의 곁에는 웬 눈치 없는 까마귀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신음이 절로 나올 것만 같았다.그럼에도 한스는 최선을 다해 참아냈다.

평생 그를 괴롭혀 왔던 악몽이 재생되고 있었다.

마을이 불타던 날.

그날도 그는 잿더미가 된 헛간에 숨어 겨우 목숨을 부지했었다.

닫힌 시야 사이로 엘프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절절한 아픔이 담긴 음색이었다.

“이럴 수가…이미 늦었군요.근처에서 인류의 군영이 발견되었다고 해서,혹시나 싶어 지원을 왔는데.”

“그래도 복수를 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중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에 나른한 맞장구가 따라붙었다.

한스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상황을 파악할 수 없으니 더욱 불안했던 탓이었다.

결국 한스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실눈을 떴다.

그러자 보였다.

흉측한 몰골을 한 중년의 사내와,그를 수행하듯 선 장신의 엘프를.

엘프의 눈에는 붉은 천이 감겨 있었다.맹인처럼 보였는데,그 거동은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마치 또 다른 눈이 달려 있기라도 하다는 듯.

중년의 사내가 한탄을 터트렸다.

“복수,오…복수라니!이보다 비극적인 운명이 있을 수 있을까요?허나 이 또한 신의 뜻이라면 따르는 것이 종의 의무…다만,우리 형제자매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리는군요. ‘축복’으로 살펴봐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레오릭 님.”

장신의 엘프는 순순히‘레오릭’이라 불린 중년의 명을 따랐다.

그가 입을 열고 혀를 쭉 빼물었다.그리고 꿀렁거리며 목을 타고 올라오는 무언가.

흉측한 눈동자가 등장할 때까지는 금방이었다.

혀 위를 데구르르 굴러 나타난 눈동자가 끔벅거리며 주위를 훑었다.이윽고 중년의 사내가 엘프의 어깨에 손을 얹자,푸른 빛으로 명멸하기 시작하는 살덩이.

레오릭은 이내 탄성을 터트렸다.

“이안 페르쿠스?하하하!설마 그가 엘프 마을에 숨어있었다니…심지어 우리의 형제자매를 구하기 위해 칼을 들기까지 했군요.”

낼름,하고 장신의 엘프는 그제야 혀를 거두었다.

자연스레 흉측스러운 눈동자도 목을 타고 모습을 감추었다.장신의 엘프는 레오릭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훌륭한 분입니다.우리의 형제자매의 목숨을 구해주셨으니,다만…….”

중년의 사내는 괴로운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낯가죽을 두 손으로 가리는 폼이,무척이나 심란하다는 티를 내고 싶은 듯했다.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군요.저기,죽은 척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엿듣는 인간 형제님처럼.”

한스는 일순 숨이 멎을 뻔한 공포를 느꼈다.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어떻게든 미동조차 하지 않을 수 있었다.부디 착각이기만을 바라는 마은뿐이었다.

허나 레오릭은 한스의 짧은 평온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헛된 연기는 그만두시지요,형제님.그만하면 오래 사시지 않으셨습니까?우리,엘프 형제자매들의 피를 손에 묻혀가며…….”

“너희가 먼저였어.”

으득,하고 이를 으깨어 가며 내뱉은 말이었다.

한스의 눈이 단숨에 부릅떠졌다.이미 자포자기한 이 특유의 결기일지도 몰랐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도를 넘어선 공포로 헝클어진 지 오래였다.그러나 한편으로는 울컥하는 심정도 있었다.

평생을 시달려 온 악몽이다.

그런데 또 다시 물러서고 후회해야 하는가?

그러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달라지지 않을 결과라면,마지막까지 저항하고 싶었다.

누가 준 기회인데.

한스는 손도끼를 든 젊은 기사의 얼굴을 떠올리며,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너희가 우리 마을을 먼저 불태웠다고!아직도 기억 나,그 불화살…네놈들이 우리 마을을 습격했구나!”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레오릭은 옅은 한숨을 내쉬면서,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를 수행하는 엘프들이 깜짝 놀라 만류하려 들기도 했다.그럼에도 그의 뜻은 확고했다.

레오릭이 손을 들어 제지하자,엘프들은 거짓말 같이 얌전해졌다.

무시무시한 통제력이었다.

한스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멈출 수 없었다.

“한때는 인간과 엘프의 공존을 꿈꾸었습니다.패잔병이 되어,길을 헤매고 있던 차에 발견한 엘프 소녀가 제게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죠.그녀는,제게 빵을 주었거든요.”

그러면서 레오릭은 슬쩍 제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그의 손은 더듬거리며 품속을 뒤적이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그는 빵을 하나 찾아서 꺼내들 수 있었다.

레오릭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빵을 내밀었다.

“드시겠습니까?”

“닥쳐.”

흠,하고 레오릭은 아쉽다는 듯 침음을 삼켰다.

그의 손이 다시금 품속을 향했다.그러면서도 사내는 한 걸음,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제게도 억울한 점은 있습니다.그야,인간들은 지금껏 엘프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오지 않았습니까?그들의 고향,그들의 식량,그들의 목숨까지도…….”

“너희 엘프들도 똑같잖아!”

“네,그렇습니다!그게 바로 핵심이죠!”

레오릭은 두 손을 마주치며 탄성을 내질렀다.누가 보면 장난이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저는,저는 깨닫고 말았습니다…인류의 손에 불타던 엘프 마을을 보던 날,그리고 절 구한 엘프 소녀가 굶어죽던 날.”

우뚝,중년의 발걸음이 멎었다.

그가 조용히 성호를 그으며 두 손을 모았다.천신교의 신도들이 곧잘 취하는 자세였다.

“임마누엘,주를 찬미하라!이 모자란 종은 얼마나 오만했단 말입니까?!”

열정적인 설교에 그를 수행하던 엘프들이 곧장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성호를 그으며 두 손을 모으기까지.

한스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요?!서로 상생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는,그 역겨운 오만!그 오물덩어리 같은 신념이 우리를 속이고 있었습니다!보십시오,이 불타는 마을을!”

어느덧 달아오른 레오릭의 목소리에는 흐릿한 광기가 어려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맹렬히 타올랐다.

“엘프도,인간도 똑같습니다!서로를 상처 주고,빼앗고,도태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이 세상을!이것이 어찌 주께서 돌보시는 현세란 말입니까?이곳은 지옥입니다!우리는 사실 지옥에 갇혀 있던 겁니다!”

“그,그래서 우리 마을을 습격했다고?!”

“네,바로 그렇습니다!그것이 바로 주의 뜻이니까요!”

저벅,저벅.

다시금 발걸음을 내딛는 레오릭의 낯빛에는 강한 확신이 가득했다.한스는 왠지 모를 으스스한 한기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던 차에,그의 발에 걸리는 무언가.

타다 만 각목이었다.길쭉한 막대 형상의 그것은,끝부분이 뾰죡하게 벼려져 있었다.

됐다.

한스는 차오르는 희열을 억지로 꾹꾹 눌러 담았다.

단지,이윽고 레오릭이 그의 지척으로 다가왔을 찰나.

그는 재빨리 각목을 들고,그대로 내찔렀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간격이었다.상대는 허름한 사제복을 입고 있었으므로,이 각목이 가슴을 파고들 것은 분명했다.

그래,그랬어야만 했다.

그러나 탁,하는 저항감이 팔에 전해졌을 때.

한스는 멍하니 그 눈을 레오릭에게로 향해야 했다.그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채였다.그저 서서,애달픈 미소를 짓고 있을 뿐.

레오릭의 손이 둔중한 파공성과 함께 한스의 어깨를 후려쳤다.

콰득,하는 소리가 얼핏 들린 것만 같았다.

그조차도 순간이었다.어느덧 한스의 팔은 어깻죽지부터 날아가,절단 부위에서 핏물을 울컥울컥 토하고 있었다.

인간의 완력이 아니었다.

한스는 무시무시한 통증에 비명을 내질렀다.

“크윽,끄아아아아악!”

“임마누엘,주를 찬미하라!인간 형제여,그대는 이제 구원을 얻는 겁니다…….”

그리고 팍,하고 발길질이 한스의 복부를 후려쳤다.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과 함께,한스는 땅바닥을 뒹굴며 울컥 핏물을 한 사발 게워냈다.단 두 방만으로 한스의 시야는 흐려지고 있었다.

빈사 상태다.

심지어 레오릭은 한스를 철저히 봐주고 있었다.그가 마음만 먹었다면,한스는 진작에 죽은 목숨이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레오릭은 한스를 죽이지 않았다.

천천히 죽이기 위해서.

한스는 뜨거운 분노와 함께,얼어붙을 듯한 공포를 느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이 사내,미쳐 있다.

진심으로 이것이 한스를 위한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감격에 겨운 레오릭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를 원망히십시오,증오하십시오…그 죄는 제 몫입니다.누군가 지옥을 가야 한다면,제가 가야 합니다!그러니 형제께서는 속죄를 마치고 속히 천국으로 떠나십시오!”

품손을 헤매던 레오릭의 손이 다시금 뽑혀 나왔다.

그 손에 들린 것은 빵이 아니었다.

비수,누가 봐도 명줄을 끊기 위한 흉기였다.

한스는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느꼈다.

가망이 없다.이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한 방은 먹이고 싶어서,한스는 망가진 폐부를 짜내 웃음을 터트렸다.

“크,큭큭큭…레,레오릭이라고 했나?”

우뚝,하고 비수를 쥔 레오릭의 손이 멈칫했다.

그의 눈동자가 어느덧 침중해져 있었다.유언만큼은 들어주겠다는 듯.

한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너,너는 실패할 거야…너 따위보다 훨씬 더,구원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거든…….”

인류를 등질 수도 있는데,엘프를 위해 검을 든 사내.

그를 죽이려고 들었던 이들마저 목숨을 거두지 않았던 기사.

그토록 미웠던 사람인데,이제는 그보다 든든할 수가 없었다.

울부짖는 한스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이,이안…큭큭,이안 경이 널 무너트릴 거다.기대해,우리 인류가 벼려낸 칼날이 얼마나 무시무시할지…….”

“……참고하지요.”

그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팍,하고 비수가 틀어박힌 목덜미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한스는 끄르륵,하고 피거품을 머금더니 이내 경련을 멈추었다.

죽음.

레오릭은 그 익숙한 결과에,괴로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형제님의 조언은 잘 알아들었습니다.이안 페르쿠스,과연…그가 있었군요.”

홀로 중얼거리던 그의 눈동자가 문득 만들어지던 눈의 봉분을 향했다.

그 위에는 대검이 꽂혀 있었다.아마도 무덤을 만들고 있었던 중이리라.

레오릭의 입가에 희미한 호선이 그어졌다.

“그가 그토록 위대한 영웅이라면,그에 마땅한 시련을 이겨내야 하는 법…….”

중년의 손에 새하얀 빛이 어렸다.

그 빛은 곧 한스의 터져 나간 팔을 감싸기 시작했다.뿐만 아니라,그의 뒷덜미에 난 상처까지도 치료하고 있었다.

기괴할 정도의 치유력이었다.

그 위대하다는 성녀조차도 이만한 재생 능력을 부여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이 기적과도 같은 광경에도,레오릭을 비롯한 엘프 일행은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다만 레오릭은 이미 명이 끊어진 병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은,이안 페르쿠스의 배신을 고발하는 영웅이 되는 겁니다…설정은 이게 좋겠군요.죽은 줄 알고 무덤에 묻혔지만,그때까지도 당신은 희미한 의식을 붙들고 있던 겁니다.그리고 당신은 마지막 힘을 짜내,제 피로 이렇게 씁니다.”

엘프들이 병사들의 시체를 거두고 있었다.

레오릭의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서.

“……‘이안 페르쿠스가 인류를 배신했다.’어떻습니까?”

그 이후,엘프 마을에는 몇 개의 봉분이 더 만들어졌다.

다음에는 유르디나 성에서 출발한 일행이 당도했고,종래에는 하녀복을 입은 갈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도착했다.

그녀는 조용히 주위를 살피다가,무너져 내린 잔해 사이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 위로 날아드는 까마귀가 하나.

까마귀가 까악,하고 울자 여인의 손을 타고 푸른 마력의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여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미심장한 신음을 흘렸다.

“……이안 님께 보고드려야겠는걸.”

다음날,이안은 엘프를 앞두고 말했다.

“그 '본부'라는 곳으로 가봐야겠습니다.”

폭탄선언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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