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9화 〉 5. 빵과 비수(67)
* * *
유르디나 성은 적막에 잠겼다.
비보가 연달아 둘이나 도착했던 탓이었다.
하나는 대륙의 영웅 이안 페르쿠스의 실종 소식이었고, 또 하나는 유르디나 가문을 지탱하던 충신의 부고였다.
알렉스가 죽었다.
그는 천생이 북부인이었다. 호탕한 성미와 싸움을 피하지 않는 용맹, 그리고 말단 병사의 이름까지도 기억하는 철두철미함까지.
유르디나 시에서 그를 존경하지 않는 이가 드물 정도였다.
그토록 사랑받던 노기사의 죽음이었다.
성에 우중충한 분위기가 감돌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하물며 유르디나 가문의 몇몇 고위 인사들은 더욱 충격적인 소식까지 들은 뒤였다.
이안 페르쿠스가 인류를 배신했다.
델핀은 말없이 잔에 담긴 포도주를 들이켰다. 미주(美?)의 향긋한 주향이 코끝을 간질여야 마땅했나, 지금은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사대의 보고를 맡은 것은 성녀였다.
남은 이들은 정신적 상흔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세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엠마는 그날부로 방 안에 틀어박힌 지 오래였다. 종종 히끅거리며 눈물을 삼키는 소리만이 들려온다고 했다.
황녀?
그 소녀는 어디서 무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방에 틀어박혔다가, 어딘가를 배회하거나, 손톱을 짓씹고 있거나.
무엇이든 하고 있겠지.
성녀도 가까스로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남을 걱정할 여유 따위는 남아있지 못했다.
철없는 꼬마 아이가 무얼 하고 돌아다니든 관심이 있을 턱이 없었다.
다만 성녀는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과연 이 소식을 들은 델핀 유르디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두 사람의 관계가 복잡하다는 사실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악연으로 시작해서, 동료가 되었고, 그 이후에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최근에는 염문설까지 떠도는 마당이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백옥의 여인, 델핀 유르디나.
과연 그녀도 눈물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그 해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그래서요?”
“……네?”
지나치게 담백한 반문이었다.
유심히 델핀의 기색을 살피던 성녀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든 말든, 델핀은 잔에 담긴 포도주를 찰랑이며 말을 이어갔다.
“제 판단은 그래요, 성녀님… 결국 본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남은 것은 시체뿐. 그리고 사인조차도 명확하지 않죠.”
“알렉스 경의 사인은 다소 명확해 보입니다만…….”
“정작 유언을 남겼다는 병사의 사인이 의문이에요.”
흐음, 하고 고민에 잠겨 눈을 내리까는 모습마저 고혹적이었다.
천성이 남자를 홀리기 위해 태어난 생물 같았다. 성녀 또한 수많은 남성들에게 구애를 받는 입장이었으나, 저토록 뇌쇄적인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존재 자체가 선정적인 여인이었다.
이안이 넘어간 것도 이해는 갔다. 성에 대해 무지한 성녀와 달리, 델핀은 누가 봐도 유혹에 능란해 보였으니까.
예전에는 그 사실이 참으로 싫었다.
지금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어차피 이안이 없다면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아니, 바람을 피워도 좋으니까 제발 돌아와만 달라고 기도하기를 며칠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신은 아무런 대답도 보여주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성녀는 욱씬, 하고 이는 통증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반면 델핀은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포도주를 홀짝이며, 여인은 추론을 덧붙여 갔다.
“왜 하필 그래야 했을까요? 만일 흉수가 단독으로 저지른 짓이었다면, 당연히 사인도 일치했을 텐데.”
“엘프들의 조력이 있었다면요?”
델핀은 그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또 다른 의문을 덧대었을 뿐.
“반대로 엘프들의 이간계가 있었을 수도 있고.”
지금껏 제시된 가설 중 가장 진실에 가까운 추론이었다.
허나 성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여인들은 필사적이었다.
이안이 인류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일말의 확률이라도 있다면,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던 참이었다.
그럼에도 함부로 병사가 남긴 글귀를 부정하지 못한 까닭이 있었다.
“유르디나 자매님, 이안은 기억을 잃었어요.”
성녀의 침착한 목소리에는 애상의 감정이 짙게 배어있었다.
델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비어버린 잔에 쪼르륵, 하고 술이 차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리고 이안은 알렉스 경을 죽였어요. 시체에 남은 상흔을 보면 확실하죠. 이미 엘프의 편에 서기로 했다는 뜻인데… 왜 엘프가 굳이 병사들의 죽음을 꾸며야 하나요?”
“그가 변심해서 돌아가지 않도록?”
“비약이죠.”
쓴웃음을 지으며 던진 말이었다.
하기야 전령이 전한 소식에 따르면, 엘프 마을의 전력은 약한 편이라고 했다. 그러한 마을에서 이안의 눈을 속일 만한 실력자가 있을 리는 없었다.
모종의 지원을 받았다면 몰라.
하지만 지원군의 존재를 고려하더라도, 그들이 이안과 인류 사이를 이간질해야 할 필요성을 떠올리기는 힘들었다.
이미 이안은 기억을 잃은 뒤였으니까.
그러니 엘프의 편에 섰을 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 인연이 머무르고 있는 인류를 등질 까닭이 없었다.
진퇴양난이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논리의 귀결은 가장 명쾌한 해답으로 흐른다.
이안 페르쿠스는 인류를 배신했다.
지금으로선 그 가설이 가장 유력했다.
성녀는 마지막으로 애처로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유르디나 자매님의 뜻은 잘 알겠어요. 저도 이안을 믿고 있어요, 그가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리라고… 단지, 지금은 조금 힘드네요. 다음에 또 말씀 나눠요.”
성녀가 떠나간 이후, 델핀은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알렉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델핀의 마음도 평온하지는 않았다. 하물며 그를 죽인 인물이, 이안 페르쿠스라니.
처녀를 바쳤던 상대가 아닌가.
우스운 꼴이었다.
일평생을 함께하던 측근이 죽었음에도,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는 만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사내였다.
하룻밤을 불태운 탓일까.
처음이라서, 몸뚱아리가 멋대로 제 서방이라 착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델핀이 품은 마음은 연심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래, 그럴 터였다.
몇 번이고 스스로를 다독여도 초조함은 가시지 않았다. 델핀은 연거푸 몇 잔의 술을 식도에 털어놓은 다음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라이넬라… 이제 슬슬 나오지 그래?”
그러자 정체되어 있던 기류에 변화가 감지됐다.
델핀의 침대 위로 봉긋이 솟아오른 이불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푸하, 하는 소리를 내며 그 안에서 나타나는 사랑스러운 여인.
엘시 라이넬라였다.
꽤 오랜 시간 그 안에 숨어있던 탓인지,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제 옷깃을 잡아당겨 공기를 통하게 하는 꼴이 이를 증명했다.
델핀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금 술잔을 기울였다.
“왜 숨은 거야? 남에게 들려주기 싫은 소리라도 하려고?”
“그,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앙증맞은 주먹을 불끈 쥐며 내뱉은 반론이었다.
엘시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정리한 뒤, 침대 아래로 폴짝 뛰어 내려왔다. 크흠, 하는 헛기침 소리가 쑥스러운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최소한 그 젖탱이 년한테는 비밀이야… 귀찮아질 테니까.”
우물쭈물하는 엘시의 기색에, 델핀은 말없이 술잔을 흔들었다.
포도주가 찰랑이며 파문을 남기고 있었다.
질문이 던져진 것은 그 이후였다.
“그래서, 무슨 부탁을 하려고 내 침실까지 찾아오셨을까? 참고로, 내겐 용건 없는 손님을 맞이하는 취미는 없어.”
“길잡이를 붙여줘.”
난데없는 요구였다.
그러나 그 의도가 너무나 투명해서, 델핀은 쓴웃음과 함께 술잔을 내려놓았다.
“혼자서는 무리야.”
“그,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그야말로 엘시다운 말이었다.
무리라는데도 일단 길잡이를 내어달라니, 함께 가야 할 길잡이가 불쌍하지도 않은 걸까. 이 또한 평소 엘시의 성정을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엘시는 늘 그랬다.
언제나 불꽃 같았고, 남들이 뭐라 해도 꺾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델핀은 유독 엘시가 싫었는지도 몰랐다.
얌전히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니까.
혹은, 그 승부에 대한 집념에서 덜덜 떨기만 하던 금발의 꼬마를 보았는지도.
만일 예전이었다면, 델핀은 엘시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을 터였다.
쓸데없는 곳에 전력을 투자하는 선택은 델핀답지 못했다. 냉정히 말해서, 침엽수림을 대규모로 수색할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탐색을 하고 싶다면 소수 정예를 꾸려야 한다.
그리고 여러 정황을 보았을 때, 이안은 잠재적인 적대 전력으로 분류해야 합당했다. 그렇다면 이 임무의 위험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이안 페르쿠스는 부무장을 활용한 다양한 변수 창출이 특기였다.
그런데 숲처럼 엄폐지형이 많은 곳에서 그를 만난다?
최악이었다.
무의미한 전력 손실만 날 공산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자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지.
한참을 침묵하던 델핀은 충동적인 판단을 내렸다.
“……좋아, 붙여줄게.”
“야 이, 속 좁은 년아! 우리 동료가 엘프 소굴에 잡혀갔는데 그 정도도 못해… 응? 부, 붙여준다고?”
당연히 거절을 당하리라 예상하고 있던 엘시였다.
기다렸다는 듯 장전해 두었던 욕설을 쏟아내긴 했으나,델핀의 말뜻을 깨닫고 어안이 벙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델핀은 엘시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간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단지 태연한 목소리로 조건을 덧붙였을 따름이었다.
“대신,나도 함께 갈 거야.”
더더욱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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