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70화 (370/649)

〈 370화 〉 5. 빵과 비수(68)

* * *

당장 엘시를 말려도 모자를 판에,함께 가겠다니?

누가 봐도 델핀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쯤 되니 엘시는 넋이 나가다 못해 미심쩍은 눈빛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델핀의 낯빛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꼿꼿이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몸짓에서 머뭇거림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던진 제안이 한 점의 숨김 없는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결국 엘시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델핀에게 물어야 했다.

“너, 너… 혹시, 그 소문 사실이야?”

“무슨 소문?”

델핀이 시치미를 뚝 떼고 던진 반문에, 엘시는 더욱 애가 닳는 기색이었다.

소녀의 목청이 높아지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주, 주인님이랑 묘한 관계라는 거! 그래서 무리해서라도 구하려는 것 아니야?!”

“흥, 또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러나 델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다소 취기에 젖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시시한 질투는 그만둬 주겠어?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네 침대에서 주인님 냄새가 났다고!”

엘시가 발을 동동 구르며 외친 말에, 델핀의 몸이 우뚝 굳었다.

냄새가 난다니?

당연히 침구는 매일 세탁을 하고 있었다. 당일 온갖 체액으로 젖은 이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안의 냄새가 난다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허나 동요는 찰나에 불과했다.

델핀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눈빛까지.

“라이넬라… 너 진짜 구제불능이구나? 이제는 남의 침구 냄새까지 맡고 다니는 거야?”

이제는 엘시가 굳을 차례였다.

앗, 하고 당황한 소리를 내던 그녀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화들짝 놀란 소녀가 펄쩍 뛰어오를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 아니이! 내가 일부러 맡은 건 아니고, 어쩌다 그리운 냄새가 나서… 그, 그래서 잠시 넋을 놓고 있었던 것뿐이야! 지, 진짜로 의도한 건 아니라고!”

“알겠어, 알겠어… 그런데, 나는 변태를 방에 들이고 싶은 생각이 없거든. 슬슬 나가주었으면 하는데?”

엘시는 한동안 횡설수설하며 변명을 늘어놓았으나, 델핀은 경멸의 시선을 보냈을 뿐이었다. 결국 엘시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힌 채 떠나가야 했다.

이안을 구하러 가자는 약속을 단단히 하면서.

홀로 남은 델핀은 그제야 몸을 일으켜,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스스로도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유르디나 후작이 쇠약해진 이상, 유르디나의 기둥은 자신이었다. 함부로 자리를 비워서도 안 됐고, 위험을 감수해서는 더더욱 안 됐다.

그럼에도, 어째서.

진짜로 그 남자가 좋아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델핀은 말도 안 된다며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무심코 제 이불에 코를 가져다 대고 말았다.

이안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하여간, 영락없는 개라니깐.”

정적에 잠긴 방에는, 한탄만이 옅은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그렇게 잠이 드는 델핀의 낯빛에는 흐릿한 감정이 비치고 있었다.

아쉬움, 그리움.

여인의 본심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는 그 자신조차도.

그리고 며칠 후.

소수의 병력과 함께 떠날 채비를 마친 델핀과 엘시 앞에, 의외의 손님이 찾아왔다.

“저도 갈래요.”

적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 엠마.

그녀는 강한 의지가 여실히 느껴지는 눈빛으로 말했다.

“저, 이안을 만나봐야겠어요.”

그렇게 ‘이안 구출조’가 꾸려졌다.

**

나의 제안에 엘프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곳은 침엽수림 모처에 숨겨진 은신처였다. 알고 보니 엘프들은 아무도 모르는 안전 가옥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비상시를 대비한 보험이었다나.

그 위치는 마을 엘프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심지어 나조차도 그 존재를 몰랐을 정도니, 그 보안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단지 내가 다소 서운한 낯을 했을 뿐.

어느덧 얼굴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루게트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나를 달래듯이 말했다.

“이안, 알지? 말하고는 싶었는데, 그동안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는 걸…….”

“모르겠는데.”

“야, 진짜 이러기야?!”

그러한 투닥거림을 거쳐, 시간은 지금.

엘프들을 소집한 나는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본부’에 가고 싶다.

레오릭과 엘프의 핵심 전력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물론 엘프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본부가 인간을 받아줄까? 심지어 너, 그 뭐냐… 봉직? 봉작? 그런 것까지 예정되어 있을 만큼 유명한 사람이라며.”

루게트의 의견이었다.

타당한 주장이라,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꼭 본부로 가야겠어? 그냥 우리 이곳에서 새로 마을을 짓고 살자… 주변에 나무도 많이 있잖아!”

이어진 것은 이샤의 애원이었다.

마을이 불타고, 목숨까지 잃을 뻔한 그녀는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더는 위험을 감수하거나 사건을 벌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절절이 전해졌다.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뒤이어 돌프 아저씨부터 미에라 아줌마까지, 마을의 엘프들은 대개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몇몇은 마을의 핵심 전력인 내가 이탈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이윽고 차례는 포프 영감에게로 돌아갔다.

그제야 나는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왜냐.”

단도직입적인 물음이었다.

그 도전적인 말투에, 몇몇 엘프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나와 포프 영감 사이를 살폈다. 나의 위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본래 엘프들은 내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어디서 유능한 외지인이 굴러들어와, 마을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기특해할 뿐이었다. 그러나 단 몇 시간 새 나의 위치는 격변했다.

나는 이제 마을의 은인이자, 유일한 수호자였다.

나 없이 인류의 침략을 이겨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허나 포프 영감만큼은 여전했다. 그는 내 눈치를 조금도 살피지 않았다.

도리어 직설적인 특유의 어조로 나를 채근할 정도였다.

“본부가 위험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겠지?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네가 없으면 불안해 할 테고… 당장 본부로 가야 할 이유가 있는 건가?”

“……네리스 선배.”

나는 대답 대신 네리스 선배를 호명했다.

그러자 네리스 선배의 허리가 공손히 숙여졌다. 내 뒤에 시립해 있던 그녀의 어깨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종종거리며 뛰어올랐다.

엘프들은 의문을 가득 담은 눈으로 그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느닷없이 웬 까마귀가 나온단 말인가.

네리스 선배는 그 의문을 해소해 주려는 듯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 까마귀는 일종의 사역마입니다. 보고 들은 장면을 저장하고 술자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죠. 자세한 사항은, 제국 첩보부의 기밀입니다만…….”

딱, 하고 맑은 소리를 내며 퉁겨지는 네리스 선배의 손가락.

이에 호응하듯 까마귀는 까악, 하고 우짖었다. 곧이어 그 새까만 눈동자가 푸르게 명멸하더니, 허공에 화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처음에 엘프들은 난생 처음 보는 신기술에 넋을 놓았다.

그리고 영상이 이어질수록 표정을 굳혔고, 종래에는 침음을 삼키거나 불신이 어린 눈빛을 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중에서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쪽은 포프 영감이었다.

“조작되었군! 자네, 이 여자 말을 믿나?! 제국에서 보낸 여자라면서!”

“따지고 보면 저도 제국 소속일뿐더러… 포프 영감.”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냉정히 말해, 이곳의 엘프들은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굳이 네리스 선배가 우릴 속여야 할 이유는 없어요.”

“우리 말고, 자네를 속이는 걸지도……!”

“전 네리스 선배를 믿습니다. 제가 신용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에요.”

강한 확신이 담긴 말이었다.

내 단단한 어조에 포프 영감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허공에 떠오른 화상과 네리스 선배를 번갈아 보았다.

정작 네리스 선배는 제 신뢰가 쑥스럽다는 듯 볼을 붉히고 있었지만.

그의 낯빛에 번민이 스치고 있었다.

포프 영감은 열성적인 신도였다. 이처럼 논리와 증거를 들이대더라도 납득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종교란 이성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었던 탓이었다.

나는 내심 포프 영감의 저항이 좀 더 길어지리라 예측했다.

이를 증명하듯 그는 울컥한 얼굴을 하고 나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네가 뭘 알겠냐는, 절절한 반항심마저 묻어나오는 눈동자였다.

그러나 이 또한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포프 영감의 시선이 툭 떨어졌다.

그도 알고 있었다.

나는 동족을 등지면서까지 마을을 구했다. 내가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포프 영감의 입에서 힘없는 한탄이 이어졌다.

“그럴 리가, 레오릭 님이 인간을 습격하고 다녔다니… 그, 그래서 인류가 우리를 그토록 이 잡듯이 잡으려 들었단 말인가?”

“반반으로 보입니다. 알렉스 경을 주축으로 한 세력과, 레오릭을 주축으로 한 두 세력이 서로를 이간질하지 않았나 싶네요.”

포프 영감은 그대로 넋이 나가 버렸다.

남은 엘프들 또한 괴로운 심정을 숨기지 못했다. ‘본부’는 그들의 정신적 기둥이었다.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장소.

그런데 그곳이 사실은 증오의 연쇄를 이어붙이고 있었다.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나 또한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알렉스 경을 베던 당시, 내 마음이 그랬으니까.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는 루게트였다.

아직 혼란이 가시지 않는 낯빛으로, 그는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본부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어. 하지만 그곳은 엘프조차 그 내부로 들어가기 힘겨워하는 곳이라고… 어떻게 하려고?”

합당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고.

솔직히 다소 곤란한 심정이긴 했으나, 나는 일부러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믿음을 주기 위해서였다.

“내가 들어가지 않으면 되지.”

“……?”

루게트는 여전히 의아한 눈빛이었으나, 나는 일부러 답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들이 납득한 이후에나 계획을 털어놓을 작정이었다.

다만 나는 은근슬쩍 누군가에게 눈길을 주었다.

깊이 고민에 잠긴 회색 머리카락의 엘프 소녀.

아비앙이었다.

그리고 허공에 화상을 비추고 있는 까마귀까지도.

내 작전은 전적으로 이 둘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걱정거리가 있다면, 과연 아비앙이 '본부'를 배신하고 나를 따라줄 것인가.

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사실 이를 제외하고도 내게 근심거리는 하나가 더 있었다.

유르디나 성에 있을 내 동료들, 괜찮을까.

레오릭의 음해로 마음을 졸이고 있지 않을지.

나는 막막한 심정에 기나긴 숨을 내쉬었다.

이 또한 잠깐에 불과했다. '본부'를 다녀올 무렵이면, 오해를 풀 수단이 구해지리라.

그때까지 동료들의 마음고생이 심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황녀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내 잘못이야, 전부 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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