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71화 (371/649)

〈 371화 〉 5. 빵과 비수(69)

* * *

시엔은 차디찬 밤을 헤맸다.

북부의 달은 유독 처연한 빛을 흩뿌렸다. 그 시린 은빛이 망막을 파고들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밤바람은 채찍과도 같았다.

북풍이 불 때마다 여린 피부가 찢어질 듯 아파왔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이 따끔거리는 통증을 전달했다.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황녀는 황망한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아픔이나 추위조차 소녀의 정신을 일깨우지는 못했다.

내 잘못이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처럼 틀어박힌 자책의 말이었다. 건조한 칼바람이 살갗을 스치듯, 끝없는 자괴감이 소녀의 보드라운 심장을 후려쳤다.

전부, 내 잘못이다.

“흐으, 끄윽…….”

느닷없이 황녀의 호흡이 거칠어진다.

견디다 못한 몸뚱아리가 멋대로 담벼락 아래로 숨어들었다. 그 연회색 눈동자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두 귀를 틀어막은 황녀의 눈앞에 몇몇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물벼락을 얻어맞았던 첫 만남.

암흑사제로부터 황녀를 지켜주던 듬직한 뒷모습.

그 이후에도 이안은 그녀를 탓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황녀를 대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황녀는 무심코 주제 넘는 생각을 품고 말았다.

혹시 용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설픈 마음가짐이었다.

어리석었다.

황녀는 또다시 실책을 저질렀다.

첫 실전을 겪은 황녀의 정신은 불안정했다. 더불어 처음으로 인격체를 해친 뒤이기도 했다. 난생 처음으로 손이 덜덜 떨려 마법이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그 대가는 처참했다.

이안이 설표 마인과 전투를 벌일 때, 황녀가 조금 더 빨리 손을 썼다면.

그랬다면 이안은 실종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기억을 잃을 리도 없었을 테고, 인류의 배신자가 되어 칼날을 황녀에게 향하는 일도 없었겠지.

잔인한 비극이었다.

황녀는 이미 이안에게 빚이 있었다.

그 채무를 청산하기도 전에, 또다시 이처럼 한심한 실책을 저지르다니.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으며 스스로를 책망한 지도 벌써 며칠째였다.

그럼에도 황녀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도리어 인류의 영웅을, 흠모해 마지않는 멋진 기사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더욱 컸다.

하물며 그 책임이 그녀에게 있음에야, 그 마음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흐으, 하아… 흐으윽, 끄으, 아아아악!”

쿵, 하고 소녀의 머리가 담벼락에 부닥쳤다.

질척한 진흙이 끓어오르듯 시엔의 뇌리를 더럽히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소녀는 발악하듯 제 몸을 학대하곤 했다.

그래야만 잠시나마 사고가 명쾌해질 것만 같아서.

하지만 언제나 후회는 늦을 뿐이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떻게든 이안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만, 도대체 어떻게?

난제가 송곳처럼 뇌리를 파고들자, 다시금 사고가 헝클어진다.

쿵, 하고 황녀가 담벼락에 머리를 처박는 소리가 이어졌다.

쨍한 통증과 함께 시야가 맑아진다. 황녀는 으득, 으득, 제 손톱을 씹으며 고민에 잠겼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생각해, 생각해 내라.

인질 교환은 어떨까?

이안보다는 제국의 황녀가 더 가치 있는 볼모가 아니겠는가. 제 몸을 희생해서 이안을 구할 수만 있다면, 황녀는 얼마든지 제 목숨을 걸 의사가 있었다.

“하으, 으윽…….”

진심으로 떠올린 발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첫 살인의 충격과, 사랑하는 사내를 잃은 소녀의 두뇌는 진작에 망가져 있었다. 어떻게든 제 죄를 씻고자 하는 욕망이 황녀를 지배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괜찮았다.

시엔은 엘프에게 가고, 이안은 인류에게 돌아온다.

기억상실증?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최소한 엘프의 편에 서서 인류의 배신자로 낙인 찍히는 것보다 몇 배는 나았다.

물론 시엔은 온갖 수모를 당해야 할 것이다.

황실의 금지옥엽으로 자란 소녀였다. 모든 것이 부족한 침엽수림에서 귀한 대접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쯤은, 익히 알고 있었다.

무섭고 두렵다.

그러나 지금, 삶이 지옥이 된 소녀에게 있어 그것은 유일한 구원이었다. 마침 델핀과 엘시를 위시로 한 구조대가 파견되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들을 잘만 설득한다면 불가능은 아니었다.

시엔은 불쾌한 상상을 털어버리고, 몽롱한 눈빛으로 그 이후에 이어질 일들을 망상했다.

이안은 되돌아올 것이다.

반면 시엔은 엘프들에게 끌려가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그토록 고생하는 사이, 이안은 또다시 여인들의 품에 안기겠지.

델핀 유르디나.

그 여우의 몸을 다시 탐할지도 몰랐다. 한때는 치가 떨리도록 강렬한 열패감을 안겨 주었던 사건이었으나, 상관없었다.

기억을 되찾은 이안은 매일 밤 황녀를 떠올리리라.

여태껏 관찰해 온 그의 심성을 두고 추론한 결과였다. 잠들기 직전에도, 식사를 할 때도, 심지어 다른 여자를 안을 때도.

이안은 황녀를 뇌리에서 지우지 못하겠지.

어차피 사랑 따위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지은 죄가 이미 너무나 많은 황녀였다. 낯짝 두껍게 이안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소리를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흉터로 남겠다는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언젠가 이안이 그녀를 구하러 올지도 모른다.

그때는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형벌은 죄를 씻어내는 가장 고전적인 수단이다. 몇 년이든 고생해서 이안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시엔은 그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다 보면, 또 언젠가는.

황녀의 뇌리 위로 후끈한 열기가 부유했다. 증기처럼 피어오른 기억들이 어느 날 밤의 풍경을 비추었다.

두 남녀가 뒤섞여 열락을 나누던 날의 화상이었다.

“하아, 하아… 흐읏, 응…….”

시엔의 목소리에 헐떡이는 소리가 섞여들기 시작했다.

황녀는 숨을 최대한 죽이고, 무심코 제 손을 아래로 가져가고 있었다. 성에 처음으로 눈 뜬 사춘기 소녀처럼.

그러나 황녀의 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흠칫, 굳어버려야 했다.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렸다.

바스락, 하고 눈이 밟히는 소음이 얼핏 귓가를 스쳤다. 비밀스러운 행위를 하려던 황녀는 더욱더 숨을 죽이고 말았다.

이곳은 유르디나 성에서도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

애초에 유르디나 성은 신분이 보장된 인물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 사용인을 제외하면 대개는 귀족들이었다.

어지간하면 심야에 이토록 외진 곳까지 올 까닭이 없었다.

황녀처럼 멍하니 걷고 걸어 도착했다면 몰라도 말이다.

마침 돌로 쌓아 만든 담벼락에는 자그마한 구멍이 위치하고 있었다. 시력만큼은 자신 있는 시엔이 그 너머를 훔쳐보기에 적당한 크기였다.

연회색 동공이 바람 구멍을 불쑥 덮자, 시엔의 눈동자에 시린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저 멀리에서 어느 사내의 그림자가 보였다.

두터운 옷을 입고 있어 자세한 외모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쳐진 어깨만 보더라도 노쇠했다는 느낌이 전해져 오는 뒷모습이었다.

황녀의 연회색 동공이 본능적으로 찢어졌다.

워낙 흐릿한 시야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긍정적인 감정은 엿보이지 않았다.

불안, 초조, 절망.

그 우중충한 색감에 황녀는 그만 미간을 찌푸릴 뻔했다.

그러나 황녀가 진정으로 놀랄 일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채였다.

"……그만 나오게."

혹시 그녀에게 던진 말일까.

황녀는 깜짝 놀라 무심코 몸을 일으킬 뻔했다. 하지만 그 직전, 사내의 그림자 뒤로 또 다른 사내의 그림자가 겹쳤다.

뛰어난 은신 능력이었다.

황녀는 이 수상한 회합에 더욱 의문을 느끼고 귀를 기울였다.

찬란한 달빛이 반사되며, 새로 나타난 사내의 낯을 비추었다.

가면을 쓴 괴한이었다.

그는 지직거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가 봐도 변조된 음성이었다.

"알렉스 경이 죽었더군요. 비밀을 잘 지켜지고 있습니까?"

"전령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네. 무시무시한 친구가 그의 목을 노리고 있다고 말이지……."

무기력한 대답에 가면의 괴한은 침묵을 지켰다.

노쇠한 사내는 피곤한 눈빛을 괴한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이군… 요즘 교단에는 인력이 넉넉한가 보지?"

"후작께서 신경 쓰실 문제는 아닙니다."

후작?

황녀는 그 낱말을 듣자마자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삼켰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담벼락을 주르륵 미끄러지고 나서야 겨우 숨소리가 진정될 정도였다.

후작이라니.

유르디나 성에 머무르는 후작은 단 한 명뿐 아닌가.

유르디나 후작.

이 성의 주인이었다.

**

불타 버린 마을에는 잿빛만이 흩날렸다.

델핀은 눈으로 만들어진 무덤 앞에 섰다. 그녀의 핏빛 눈동자가 대검이 꽂힌 봉분을 겨누고 있었다.

"알렉스……."

여인의 목소리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 있었다.

알렉스는 왜 이곳으로 온 것일까?

말로는 단독으로 실종 사건을 담당하고 있었다지만, 델핀은 그러한 보고를 들은 적이 없었다.

누군가 또 보고 체계를 뒤흔들었거나, 혹은.

델핀은 그 외의 가능성을 차마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문을 섬겨 온 충신이었다. 죽은 이후에 불명예를 덮어씌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어차피 진실은 곧 밝혀질 테고.

델핀의 눈이 흘깃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적갈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퀭한 낯빛을 한 채 땅에 액체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따라붙어 연신 탄성을 터트리는 중이었고.

"우와, 앗! 발자국이잖아! 야, 평민! 어떻게 한 거야?"

"오는 길에 만들었어요."

절절한 피로가 녹아든 목소리였다.

엠마의 고백에, 엘시는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침묵을 지켰다.

침엽수림을 탐색하는 과정은 강행군 그 자체였다.

일신의 무력조차 뛰어나지 못한 엠마에게는 더욱 가혹한 일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잠 자는 시간을 아껴, 물약을 만들어 내다니.

그 의지에 엘시도 일순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제 목숨은, 어차피 버린 것이나 다름없어요. 이안이 없었으면 죽었을 테니까… 그러니, 조금이라도 이안을 돕고 싶어요."

"그, 그래……."

땅바닥만을 훑는 엠마의 연녹빛 눈동자에는 짙은 각오가 서려 있었다. 단단히 가라앉아, 결정화된 의지.

엘시는 이내 픽,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엠마에게 달라붙었다.

"평민, 제법인데?! 너 마음에 들었어… 주인님을 찾으면, 특별히 넌 첩으로 허락해 줄게!"

누가 보면 벌써 정처라도 된 듯한 말투였다.

델핀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으나, 일부러 엘시를 자극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저 꼬맹이는 모를 테니까.

그날 나누었던 달뜬 속삭임과, 척추를 새하얗게 태우며 지니가던 쾌감을.

그 뜻 모를 우월감과 배덕감에 델핀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가슴이 꾹 조여왔다.

찾아야 하는데, 주인님.

그 열망에 응답하듯, 엠마의 낭란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찾았어요! 집단으로 움직인 흔적!"

화들짝 놀란 델핀의 시선이 엠마를 향했다. 과연 그곳에는 어지럽게 늘어선 발자국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모두 특정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 흔적이었다.

델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이안이 떠난 곳.

늦어도 하루에서 이틀이면, 그가 숨은 은거지를 발견할 수 있을 터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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