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3화 〉 5. 빵과 비수(71)
* * *
널브러진 시체의 품속을 뒤적였다.
아비앙의 손에 희생된 사내의 이름은 볼프였다. 내가 지내던 자그마한 마을에서는 따로 신분증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본부’는 아닌 듯했다.
피 묻은 나무패가 섬뜩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언제 보아도 불쾌한 얼룩이었다. 나는 혈흔을 소매로 닦아내려다가, 결국 수통의 물을 부어 씻어냈다.
나무패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땅에 채 부닥치기도 전에, 서리로 화해 흩어지는 수분.
북부의 추위란 이토록 무시무시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나와 아비앙이 이 맹추위 속에서도 멀쩡하다는 점이었다.
나는 익스퍼트에 이른 무인이었고, 아비앙은 내가 선물해 준 설표 가죽을 걸치고 있었다. 북부의 칼바람이 파고들 틈은 없었다.
유일한 골칫거리가 있다면, 이미 목숨을 잃고 쓰러진 사내뿐이었다.
그는 유독 얇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태생적으로 추위를 잘 타지 않는 체질일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기형적인 복장을 설명할 수단이 없었다.
난감한 현실이었다.
아비앙의 변신 마법은 교묘했다. 타인의 생김새를 완벽히 모방할 뿐만 아니라, 그 흔적조차 감지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모든 마법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아무리 아비앙이라고 한들 차림새까지 속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시 말해, 저 얇은 옷이 곧 아비앙의 위장복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당장 저체온증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 아비앙에게 물었다.
“……엘프가 또 오길 기다릴까?”
“시간 없잖아요. 또, 동족의 생명을 필요 이상 빼앗고 싶지도 않고요.”
아비앙의 대답은 단호했다.
지당한 사유였다. 나로서는 마땅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옅은 신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걱정이 되기는 했다.
겉으로는 건장한 사내의 모습을 취하겠지만 아비앙의 본신은 가녀린 소녀였다. 몇 시간이나 되는 시간을 혹한의 추위 속에서 견딜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본인의 의지가 워낙 확고해 보였으니.
그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칼을 빼들긴 했으나, 동족을 죽이고 마음이 평온할 리가 없었다.
결국 나는 끝까지 아비앙을 만류하지는 못했다. 단지 내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흔해빠진 걱정의 말뿐.
“조심해야 해, 아비앙.”
“걱정하지 마세요. 저, 엘프잖아요… 나고 자란 곳이 이곳인데, 설마 몇 시간 추위를 이겨내지 못하겠어요?”
그러면서 아비앙은 제 어깨를 쭉 펴기까지 했다.
나름대로 자신감을 보여주려는 듯했다. 정작 군살 하나 붙지 않은 그 메마른 몸이 더욱 강조돼서, 내 동정심을 자극하는 역효과가 났지만.
최근에는 식사량이 많이 늘었는데도 이 꼴이었다.
체내 지방이 없으니 추위를 버티기는 더욱 힘들 테지.
그럼에도 나는 아비앙의 허세를 받아주기로 했다. 어차피 말릴 명분도 없던 참이었다.
어색한 미소와 함께 내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비앙은 그제야 채비를 시작했다.
피 묻은 옷은 우선 잘 닦아내 말리기로 했다.
모닥불을 피우는 사소한 시간 소요가 있었으나, 아비앙은 이내 ‘본부’에 진입할 수 있었다. 외형을 온전히 볼프의 것으로 뒤바뀐 뒤였다.
나는 그보다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렇다고 상황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아비앙의 어깨 위에 앉은 까마귀 덕이었다.
제국이 탄생시킨 이 마도 생물은 무척이나 유능했다. 보고 들은 화상을 저장할 뿐만 아니라, 실시간으로 술자와 시야를 공유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일정 범위 이내에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의 내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눈을 감자 낯선 풍경이 부상했다. 더불어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까지.
까마귀의 눈과 귀였다.
“볼프, 이 까마귀는 뭐야?”
“모르겠는데? 어디서 날아들어 어깨 위에 앉더라고. 혹시 날 좋아하나?”
아비앙은 마침 위병과 천연덕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시 봐도 연기에 재능이 있는 소녀였다. 만일 전문적인 훈련까지 이수했다면, 인류 사회에서 암약할 위험한 첩자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인류로서는 다행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래? 뭔가 수상한데… 혹시 위험한 동물 아니야?”
“응? 이 까마귀가?”
흐음, 하고 아비앙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후에, 소녀는 능청스러운 변명을 이어갔다.
“흠, 그럴 수도 있겠는데… 어차피 우리들로서는 알 수 없는 문제잖아? 차라리 레오릭 님께 여쭈어볼까.”
“레오릭 님? 아아.”
아비앙의 변명을 듣던 위병은 무언가 떠오르는 바가 있는 듯했다.
짤막한 탄성을 터트린 직후, 그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비앙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레오릭 님께서 너를 찾으시더라고. 볼프… 드디어 네가 인정받는구나.”
느닷없이 무슨 소리일까.
아무래도 볼프는 레오릭과 선약이 있었던 듯했다. 위병의 사연이 있어 보이는 표정을 보니, 최근 볼프에게 특별한 일이 있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나와 아비앙으로서는 그 내막을 짐작할 수 없었지만.
자칫하면 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비앙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상황을 반전시켰다. 괜히 아는 척을 하기보다 말을 얼버무리는 쪽을 택한 것이다.
나쁘지 않은 전략이었다.
그 증거로 위병도 마주 웃음을 터트릴 따름이었다.
의심을 하는 기색은 없었다.
“고마워, 레오릭 님을 한시라도 기다리시게 할 순 없지… 가봐야겠어. 지금은 레오릭 님께서는 어디 계시지?”
“늘 계시던 곳에.”
아비앙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내딛었다.
위병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은 지나가듯 축하의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
아비앙은 은근히 긴장한 낯빛이었다.
본질적으로 겁이 많은 소녀였다. 이처럼 돌발적인 변수가 반가울 턱이 없었다.
다만 위안으로 삼을 만한 부분이 있다면, 레오릭을 만나기 위해 귀찮은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일까.
아비앙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름한 오두막 앞에 섰다.
얼핏 보기에는 마을의 엘프들이 지내는 곳과 비슷해 보였다. 사교의 우두머리가 머무르는 거처임에도 불구하고, 호위조차 보이지 않는 소박한 거처였다.
그러나 나도, 아비앙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레오릭은 호위가 필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지닌 무력은 괴물에 가까웠다. 아무리 단련을 거친 무인이라 하더라도, 신체를 그토록 강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금지된 힘’, 암흑교단이 숨기고 있는 저력이리라.
레오릭과의 조우를 앞둔 아비앙의 몸이 잠시 뻣뻣이 굳었다. 긴장한 탓이었다.
더불어 세찬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자, 그러지 않아도 얇은 옷을 걸치고 있던 아비앙의 몸이 으스스 떨렸다.
더는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아비앙이 각오를 다진 눈빛으로, 걸음을 내딛은 직후.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찾고 있던 인물을 목격할 수 있었다.
허름한 오두막은 위장에 불과했다. 레오릭의 진정한 거처는 지하실이었다.
삭막하기 그지 없는 방이었다.
돌로 된 침대 하나와, 각종 수술 도구들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레오릭은 그 사이에서 끙끙거리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레오릭 님.”
그 나지막한 부름에, 흉측한 중년의 사내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엉망진창으로 녹아내린 낯가죽에 미소가 떠올랐다. 징그러운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인자한 미소였다.
레오릭은 볼프로 변장한 아비앙을 보며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오, 임마누엘! 볼프 형제님, 드디어 오셨군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레오릭 님. 잠시 특이한 동물을 발견해서…….“
그러면서 아비앙은 제 어깨 위에 있던 까마귀를 가리켰다.
레오릭의 어리둥절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정확히는 까마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 시야를 공유받고 있던 덕에 레오릭의 낯짝을 자세히 뜯어볼 기회였다.
깊은 눈빛을 가진 사내였다.
한때는 신실한 사제였음이 분명했다. 오랜 시간 정신을 수양한 종교인만이 이처럼 심유한 동공을 지닐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의문이었다.
이 사내가 완전히 미쳐버리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레오릭은 저벅저벅 걸어 조심스레 까마귀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살살 까마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까마귀는 반항하지 않았고, 레오릭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귀여운 동물이군요. 그런데, 침엽수림에 까마귀가 살고 있던가요?“
”가끔 본 적은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낯가림이 없는 개체는 처음이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볼프 형제님. 이 또한 주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환난 가운데 있다지만, 모든 생물을 부정하는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아비앙은 화들짝 놀란 척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엘프가 레오릭을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인 듯했다.
누가 봐도 상관을 섬기는 모양새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배움이 짧아…….“
”스스로를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제가 틀리고, 형제님께서 옳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의문을 가지는 자세를 견지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레오릭은 손바닥을 짝, 하고 마주쳤다.
화제를 환기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그의 입에서 상냥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아무튼 수고 많으셨습니다, 볼프 형제님. 오늘은 약속한 대로 볼프 형제님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 혹시 선물이라 하시면……?“
”물론 ‘축복’입니다.“
그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아비앙의 몸이 살짝 뻣뻣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