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4화 〉 5. 빵과 비수(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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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이라니,아비앙은 이미‘축복’을 받은 뒤였다.이대로 가다간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럼에도 레오릭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아비앙을 향한 의심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걱정스레 물어왔을 뿐.
”괜찮으십니까,형제님?안색이 다소 창백해 보이십니다.“
”무,물론입니다!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바깥이 워낙 추워서…….“
”허허,이상한 말씀이시군요.볼프 형제님은‘축복’을 받을 준비를 하느라 몸에 열이 넘치실 텐데요.혹은 수술 준비에 문제가 생긴 겁니까?“
아비앙의 근육이 더욱더 딱딱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한 탓에 실언을 하고 만 모양이었다.정작 레오릭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넘어갔지만,나조차 절로 식은땀이 배어 나올 정도였다.
위병을 상대할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아비앙도 내심은 레오릭을 가장 어려운 상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그래서 긴장의 강도가 달라졌으리라.
지금 이 공간에서 느긋한 이는 레오릭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강자의 특권이었다.
”설사 수술 준비에 차질이 있더라도 상관없습니다.오늘은 자매님 한 분께서 자진해서 봉사를 와주셨기에…우선 침대 위로 누우시죠.“
레오릭이 등을 돌리자,다시금 그 넙대대한 등판이 드러났다.
그의 손이 망설임 없이 상자 하나를 덮쳤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에 잡혀 올라오는 굵직한 밧줄이 하나.
아니,쌍두사였다.
쌍두사는 레오릭의 손에 잡혔음에도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도리어 그가 쌍두사의 입을 강제로 벌려 독니를 짜낼 지경이었다.
”쌍두사는 한때 악신의 앞잡이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머리가 두 개인 동물이 영원한 투쟁을 반복한다…해소되지 않는 갈등과 전쟁의 상징이죠.그래서 젊은 시절 저는 의문을 품기도 했습니다.도대체 왜 주님께선 이 악랄한 동물을 그대로 놔두시는 걸까?“
아비앙은 레오릭의 일장연설에 맞장구조차 치지 못했다.
다만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갈등에 잠겼을 따름이었다.어떻게든‘축복’을 이식받는 수술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러다간 아비앙의 변신 마법이 풀려 버릴 테니까.
”하지만 엘프 형제님들과 함께하며 깨달았습니다.사실 이 쌍두사는 진리를 담고 있었던 겁니다!영원히 반복되는 투쟁…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이를 끝내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죠.“
한참이나 잔에 쌍두사의 독을 짜내고 있던 레오릭은,그제야 다시 손을 움직였다.
직후 으직,하고 울려 퍼지는 소름 끼치는 소음.
쌍두사의 머리가 박살나며 핏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레오릭은 이를 한 방울이라도 놓칠까 세심하게 잔의 위치를 조정했다.
”……말살.“
한참을 망설이던 아비앙의 눈빛이 단단해진 것은 그때였다.
아직 물어야 할 것은 많았다.
도대체 엘프들을 데리고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인지,이 사건에 연루된 인류 측의 배신자는 누구인지.
또 암흑교단은 어떻게 접촉했으며,그들의 목적은 무엇인지.
‘흡혈귀’에 대해서도 물어봐야 했다.
허나 지금은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잠시 물러나서 전선을 재정비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아비앙도 이를 잘 알고 있으리라.
”저,레오릭 님?“
”아아!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수술은 조금도 아프지 않습니다.쌍두사의 독과 피를 섞어,엘프에게 주사하면 특이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죠.강력한 진통 성분…오히려 구름에 붕붕 뜨는 느낌이라고 할까요?다만 직접 주사하면 환각 반응이 너무 강해서,한 차례 타인에게 주사한 후 정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얼중얼 이어지는 레오릭의 설명은 끝이 없었다.
레오릭의 침착하던 눈빛이 돌변하고 있었다.그의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지더니,눈에 실핏줄이 투둑 떠올랐다.
명백히 흥분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변화입니까?이 보잘 것 없는 생물 하나에도 주님의 설계가 작동하고 있다니…아아,임마누엘!그리고 이 약물을 정제하기 위해 지원한 자매님의 신앙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 망설이다간 꼼짝없이 수술을 받아야 할 판이었다.
아비앙은 더욱 다급해져서 외쳤다.
”레오릭 님!저,몸이 왠지 좋지 않아서…수술을 다음으로 미루면……!“
”아,마침 자매님께서 도착하셨군요.이리 오시죠.“
허나 재차 애원하는 아비앙의 목소리는 무참히 묵살되고 말았다.
주춤주춤 걸어들어오는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비앙은 이제 결단을 앞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레오릭이 한 눈을 팔고 있는 사이 도주를 시도할 것인지,혹은 또 다른 활로가 있을지.
내 눈앞에만 있다면 당장 도망치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내 소망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나와 아비앙은 멀리 떨어져 있을뿐더러,등 뒤를 살피던 아비앙이 얼어붙은 탓이었다.
침묵이 지하실에 내려앉는다.
사뿐사뿐 소녀가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대략 열 살을 조금 넘었을까,아비앙보다도 어려 보이는 외형이었다.본래 인형처럼 아름다웠을 그 얼굴은 다소 파리해 보였다.
거뭇한 눈 밑과 얼굴의 반을 덮고 있는 붕대까지.
앙상한 팔다리 곳곳에 붙은 반창고가 소녀의 상태를 증언했다.누가 봐도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그녀를 마주한 순간,아비앙의 눈은 그대로 고정되고 말았다.
부릅떠진 눈만이 그녀의 경악을 드러냈다.
일순 의문에 잠겼던 나였으나,이내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아비앙이 굳어버렸는지.
소녀의 머리카락은 회색이었다.그리고 눈동자는 푸르렀다.
아비앙과 유사한 색조였다.
”……베티.“
그 나지막한 중얼거림이,나의 추측을 사실로 확정지었다.
다름 아닌 아비앙이 내뱉은 말이었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던,여동생의 이름.
그러나 베티는 볼프의 외형을 하고 있는 아비앙을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단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레오릭의 소매를 붙잡았을 뿐이었다.
소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원했다.
”레,레오릭 님…주사,주샤 쥬세여…….“
혀에 힘이 풀렸는지 발음이 새어나갔다.나는 두 손으로 낯가죽을 덮고 말았다.
큰일이다.
아비앙이 이성을 유지할 리가 없었다.
레오릭의 손이 가엾다는 듯 베티의 회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오,베티 자매님…걱정하지 마시죠.제게 자매님의 병을 낫게 할 힘은 없어도,고통을 없애드릴 수는 있습니다.“
”빠,빨리!빨리!“
지능이 퇴화하기라도 한 듯 보채는 베티의 모습.
이비앙은 피가 날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어떻게든 참아내기 위해서.
헛된 발악이었다.
레오릭이 주사를 들고,그 안에 약을 담자 베티는 엉덩이를 쭉 뺐다.그리고 개처럼 헐떡이며 침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눈빛이 희열과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메마른 몸뚱아리와 기묘한 대비를 이루는,생기 넘치는 표정이었다.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참혹한 몰골이었다.
나조차도 이럴진대,아비앙이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야,이…….“
악물어진 잇새로 달아오른 목소리가 흘러나오자,나는 곧장 몸을 일으켜 내달렸다.이제 아비앙을 구할 수단은 하나뿐이었다.
연결을 끊기 직전,아비앙가 울부짖는 소리가 내 뇌리를 관통했다.
”개자식들아!“
나는 속으로 몇 번이고 성호를 그었다.
부디 아비앙이 무사하기를.
내가‘본부’의 위병들을 덮친 것은 그로부터 몇 분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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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떡이면서 이샤는 눈을 떴다.
난데없는 침입자에게 제압당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너무 짧았다.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한참이나 기억을 수복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저 금빛의 궤적이 그어지고,벼락이 내리친 것이 끝이었다.
이샤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너무나 강한 상대였다.
이샤는 이안을 제외하면 이보다 강한 적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몸이 절로 부들부들 떨리려 했으나,자존심 강한 이샤는 가까스로 이를 진정시켰다.
도대체 목적이 뭐지?
이안이 없는 지금,이만한 침입자를 격퇴할 여력은 존재하지 않았다.이샤는 곧장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마침 주위에 여인이 자리하고 있던 참이었다.
심문이라도 하려는 요량인데,이샤는 죽더라도 의리만은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너,너희 누구야!감히 엘프들을 건드리고 살아남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놀랍게도,우리는 너희 엘프들의 목숨에는 관심 없어.“
최소한 지금까지는.
금빛 머리카락에 핏빛 눈동자를 가진 여인의 말이었다.그 스산한 중얼거림에 이샤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릴 뻔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이샤를 둘러싼 여인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었다.금발의 여인부터 시작해서,고깔모자를 쓴 자그마한 소녀와 적갈색 머리카락의 여인까지.
그들의 분위기가 워낙 살벌했다.
당장 이샤의 목을 베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가 궁금한 정보는 하나야…이안,어떻게 했어?“
”……누구?“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샤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하자,대번에 흥분한 쪽은 고깔모자를 쓴 소녀였다.
그러지 않아도 초조한 낯빛을 하고 있던 그녀였다.이샤의 얼빠진 대답에 소녀는 단번에 목청을 돋우었다.
”이안 페르쿠스!우리 주인님 말이야!기억 잃었다며,어떻게 했냐고!“
아아,하고 이샤는 그제야 옅은 탄성을 터트렸다.
이제야 무얼 묻고 싶은지 이해가 갔다.그러고 보니‘인간’의 이름이‘이안 페르쿠스’라고 했던가.
되짚어 보면,그는 인간 중에서도 높은 신분이라고 했었다.
알렉스를 비롯한 병사들의 깍듯한 태도나,지금 이샤를 겁박하는 여인들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무려‘주인님’이라고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이들은 이안이 기억을 잃은 줄 알고 있는 상태.
때마침 이샤의 뇌리를 번뜩이며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잘만 하면 저 건방진 여자들을 당황시킬 수 있지 않을까?
만일 이샤가 이안의 소중한 존재라 한다면,이처럼 푸대접을 한 것을 후회할지도 몰랐다.더불어 무사히 풀려날지도 모르고.
이샤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아,알지!내 애인…….“
단 한 마디.
그것이 내뱉어지는 찰나,이샤는 으스스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여인들의 분위기가 너무나 싸늘했다.
오랜 시간 북부의 추위에 적응한 이샤조차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여인 셋이 아무 말도 없이 이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 낯빛에서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아서.
오직 눈빛만이 서늘한 적의를 말하고 있을 뿐.
그럼에도 이샤는 재차 여인들에게 허세를 부려보고자 했다.
”내,내 애인…….“
파직,하고 옅은 전류가 허공에 튀었다.
무엇의 전조인지는 알 수 없었다.다만 이샤의 본능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죽는다.
이샤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내,내 애인의 절친한 친구거든!아하하…우,우연이네?그럼 우리도 친구지?“
그제야 안온해지는 주위의 분위기를 느끼며,이샤는 눈물을 찔끔 흘렸다.
인간,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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